자기계발과 마음공부

歸家隨分得資糧

장백산-1 2014. 10. 11. 13:03

 

 

 

                   

歸家隨分得資糧 (귀가수분득자량)

집에 돌아가 분에 따라 자량을 얻네

 

 

根本 마음자리를 드러내는 데는 지금 쓰고 있는 마음 밖에 따로 얻을 資量이 없습니다.
이 마음 그대로 宇宙法界 全切에 보배를 보내고 있는 것이며 그 보배로 一切 중생의 온 삶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로 온전히 열림
華嚴에서는 三界가 오직 마음(三界唯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解脫을 이루는 것도 마음이요 衆生界를 이루는 것

또한 마음입니다. 마음은 三界를 이루기도 하고 三界를 벗어나 비로자나佛의 世界를 이루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단 한 번도 結定된 自己 모습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金剛經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라고 決定된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結定된 自己 모습을 갖지 않는 마음 씀씀이가 위없는 바른 깨달음의 나툼입니다. 마음을 떠나서 위없는 깨달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執着 없는 흐름과 結定된 自己 모습을 갖지 않으면서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諸各各의

모습을 나투면서 세상 삶의 온生命을 나타내는 것이 佛性으로 修行者의 집입니다. 修行者가 돌아갈 집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곳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텅~빈 마음으로 온 宇宙生命을 살고 있는 宇宙法界의 因緣의

흐름인 毘盧遮那佛이 修行者가 돌아갈 집입니다.

 

 

 

돌아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은 가고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자리가 집입니다. 집이라고 하지만 마음 自體가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모습을 나투어 結定된 자기 모습을 갖지 않는 것이어서 집의 모습도 또한 宇宙法界의 因緣의 나타남에 지나지 않습니다.
 
宇宙法界의 因緣이란 無常 無我로서 時空의 制限을 떠나 있으면서도 모든 時空을 나타내고 나아가 한 時空의 接面에서 一切 時空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宇宙法界의 因緣의 흐름, 곧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現象을

時間의 흐름에서 보거나 空間의 한 接点에서 보면 時空의 制限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存在하고 있는 時空에서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 곧 時空의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흐름은 그때그때마다 모양을 지니면서 아울러 時空을 創造하고 있습니다. 마음 밖에 따로 時空이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抽象된 모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現實이라고 여기는 것도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며

無常 無我를 그 본바탕으로 합니다.

 

 

 
마음이란 腦의 作用이 아닙니다. 온 宇宙法界의 활짝 열린 時空에서 時空의 差別 없이 作用하면서도 各各에서는

差別的 時空을 이루고 있는 重重無盡의 宇宙法界가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들의 마음 밖에 또다시 

宇宙法界를 이루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生覺/마음/意識이 일어나는 그것 自體가 宇宙法界이며,

그 生覺/마음/意識의 作用은 단지 우리들의 腦 波動의 떨림이 아니라 宇宙法界 波動의 떨림입니다.

 

 

宇宙法界 波動의 波長은 어떤 때는 적극적으로 서로의 모습을 일으키거나 사라지게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옆에서 지켜보듯이 다른 모습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防害하지 않고,

즉, 텅~빈 마음의 時空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의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功能의 相卽相入에서 各各의 모습을 띠면서

無差別의 宇宙法界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現象을 自己의 분(分)을 따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自己의 分이라고 해서 낱낱 衆生마다 上下의 差別이 있다고 生覺해서는 안 됩니다. 衆生마다의 差別이란 말은 

그 自體로 宇宙法界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法界는 上下의 差別이 일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各各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이 各各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 自身의 功能만이 아니라, 바로 重重無盡으로

겹쳐있는(重疊되어 있는) 時空에서 모든 衆生들의 無差別 生命力에 依해서 自身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分'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것을 全切의 部分이라든가 上根機 下根機 등으로 區分한 理解여서는

안됩니다. 一法界의 無差別로 겹쳐 있는 重重無盡의 時空에서 各各의 모습들이 存在하기 때문에 修行者의 根本인

 

마음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宇宙法界를 나타내는 分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根本마음자리를 드러내는 데는 지금 쓰고 있는 마음 밖에 따로 얻을 자랑이 없습니다. 이 마음 그대로 宇宙法界 全切에 보배비를 보내고 있으며 그 보배비로 一切 衆生의 온 삶이 있습니다. 만일 이 마음 밖에 따로 얻을

 

資糧이 있다고 하면 執着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비록 資糧을 얻는다고 했지만 資糧 自體가 텅~빈 마음으로 빛으로 나툰 비로자나佛이기

때문에 얻으려고 한다면 마음으로 마음을 보려고 하는 것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앎의 對相이

 

될 때는 이미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다고 합니다.

 

 

 

 

 

깨달음이란 宇宙法界 全切가 그대로 마음이 되는 때입니다. 양경쌍조(兩鏡雙照)를 확실히 여는 것도 그때입니다.
 
그렇다 해도, 곧 本來 집을 떠난 적이 없다고 말을 해줘도 衆生들은 늘 집 밖에서 不安해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不安이란 놓치고 잃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무엇인가를 갖고서 잃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마음이 중생의

삶이며 이를 執着이라고 했습니다. 執着이란 이 世上 모든 것들의 根本實際가 텅~빈 모습임을 알지 못하고서 마치

텅텅~빈 虛空을 움켜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執着心이 있을 뿐 執着할 만한 對相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執着心을 내려놓을 때 모든 不安은 사라지고 宇宙法界의 맑고 빛나는 마음이 비로자나 부처님으로 나타납니다.

온갖 是非分別心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 衆生의 마음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비분별을

가리는 말을 삼가하고 삼가하면서 그 場面을 그저 지켜보기 始作하면 우리 業을 이루는 特性인 言語分別의 虛構에서 점점 自由스럽게 됩니다.

 

沈默이 修行者의 큰 德目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是非分別의 對相이 단지 言語의 虛構에 依한 것으로

그 是非分別하는 生覺/마음/意識의 實在가 空한 것임을 分明히 自覺하는 데서부터 出發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말에서 是非分別이 줄어들면, 마음 씀씀이도 아울러 是非分別이 줄어들게 되고,

欲心내고 성내는 마음의 波動의 波長도 줄어듭니다.

 

 

마치 어렸을 때 장난감을 소중히 여기다가도 어느 날 별 것 아니게 되듯이

우리들이 그렇게 所重히 여기는 삶의 全切들도 마음쉼에서 보면 별것 아닙니다.

 

 

 
이와 같이 마음 쉬어감이 익어가는 것을 資糧을 얻는다고 합니다. 쉬고 쉰 마음의 作用이 커지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삶의 全切를 이루는 言語分別의 虛構에서 완전히 自由스러워질 때 삶의 轉換이 일어나게 되고 그때 비로소 法界가

지금 그대로 온전히 열린 世界에서 깨달음의 빛을 나투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본바탕이 서로가 서로에게 生命의 빛을 나누면서 나뉨 없는 한 마음으로 法界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生覺에 依해서만 可能한 分別 執着을

버릴 때 緣起된 宇宙法界가 眞如空性으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을 如實히 알게 됩니다.

 

 

이때 資糧이 단지 緣起의 場인 宇宙法界를 여는 方便이 아니라, 法界가 衆生의 執着을 여는 資糧으로 限없이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智慧와 慈悲가 法界의 참된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이룬 모든 분들께서  方便으로 어느 곳에도 얽매임 없이 중생을 제도하게 됩니다.
 
분(分)에 따라 法界의 資糧을 얻되 그 資糧이 또다시 모든 중생을 위해 回向되는 자리임이 분명한 것도

우리 삶이 眞正한 宇宙的 緣起法界의 實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 곧 佛性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衆生心은 끊임없이 마음 밖을 向해 무엇인가를 求하고 있는 데에 反해, 修行者는 마음을 마음 自體에 놓고

返照해서 마침내 그 마음자리가 바로 求하고 있던 모든 것이 이미 갖추어진 것임을 알고 求하는 마음이 쉬고 아울러 圓滿한 비로자나佛 世界를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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