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家隨分得資糧 (귀가수분득자량)
집에 돌아가 분에 따라 자량을 얻네
또한 마음입니다. 마음은 三界를 이루기도 하고 三界를 벗어나 비로자나佛의 世界를 이루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단 한 번도 結定된 自己 모습을 갖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執着 없는 흐름과 結定된 自己 모습을 갖지 않으면서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諸各各의
모습을 나투면서 세상 삶의 온生命을 나타내는 것이 佛性으로 修行者의 집입니다. 修行者가 돌아갈 집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곳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텅~빈 마음으로 온 宇宙生命을 살고 있는 宇宙法界의 因緣의
흐름인 毘盧遮那佛이 修行者가 돌아갈 집입니다.
時間의 흐름에서 보거나 空間의 한 接点에서 보면 時空의 制限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存在하고 있는 時空에서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 곧 時空의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抽象된 모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現實이라고 여기는 것도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며
無常 無我를 그 본바탕으로 합니다.
差別的 時空을 이루고 있는 重重無盡의 宇宙法界가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들의 마음 밖에 또다시
宇宙法界를 이루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生覺/마음/意識이 일어나는 그것 自體가 宇宙法界이며,
그 生覺/마음/意識의 作用은 단지 우리들의 腦 波動의 떨림이 아니라 宇宙法界 波動의 떨림입니다.
宇宙法界 波動의 波長은 어떤 때는 적극적으로 서로의 모습을 일으키거나 사라지게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옆에서 지켜보듯이 다른 모습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防害하지 않고,
즉, 텅~빈 마음의 時空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서로의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功能의 相卽相入에서 各各의 모습을 띠면서
無差別의 宇宙法界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現象을 自己의 분(分)을 따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自體로 宇宙法界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法界는 上下의 差別이 일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各各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이 各各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 自身의 功能만이 아니라, 바로 重重無盡으로
겹쳐있는(重疊되어 있는) 時空에서 모든 衆生들의 無差別 生命力에 依해서 自身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分'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것을 全切의 部分이라든가 上根機 下根機 등으로 區分한 理解여서는
안됩니다. 一法界의 無差別로 겹쳐 있는 重重無盡의 時空에서 各各의 모습들이 存在하기 때문에 修行者의 根本인
마음자리에서 그 모습 그대로 宇宙法界를 나타내는 分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根本마음자리를 드러내는 데는 지금 쓰고 있는 마음 밖에 따로 얻을 자랑이 없습니다. 이 마음 그대로 宇宙法界 全切에 보배비를 보내고 있으며 그 보배비로 一切 衆生의 온 삶이 있습니다. 만일 이 마음 밖에 따로 얻을
資糧이 있다고 하면 執着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비록 資糧을 얻는다고 했지만 資糧 自體가 텅~빈 마음으로 빛으로 나툰 비로자나佛이기
때문에 얻으려고 한다면 마음으로 마음을 보려고 하는 것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앎의 對相이
될 때는 이미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다고 합니다.
不安이란 놓치고 잃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무엇인가를 갖고서 잃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마음이 중생의
삶이며 이를 執着이라고 했습니다. 執着이란 이 世上 모든 것들의 根本實際가 텅~빈 모습임을 알지 못하고서 마치
텅텅~빈 虛空을 움켜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단지 執着心이 있을 뿐 執着할 만한 對相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온갖 是非分別心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 衆生의 마음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비분별을
가리는 말을 삼가하고 삼가하면서 그 場面을 그저 지켜보기 始作하면 우리 業을 이루는 特性인 言語分別의 虛構에서 점점 自由스럽게 됩니다.
沈默이 修行者의 큰 德目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是非分別의 對相이 단지 言語의 虛構에 依한 것으로
그 是非分別하는 生覺/마음/意識의 實在가 空한 것임을 分明히 自覺하는 데서부터 出發해야 합니다.
欲心내고 성내는 마음의 波動의 波長도 줄어듭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所重히 여기는 삶의 全切들도 마음쉼에서 보면 별것 아닙니다.
지금 그대로 온전히 열린 世界에서 깨달음의 빛을 나투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본바탕이 서로가 서로에게 生命의 빛을 나누면서 나뉨 없는 한 마음으로 法界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生覺에 依해서만 可能한 分別 執着을
버릴 때 緣起된 宇宙法界가 眞如空性으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을 如實히 알게 됩니다.
우리 삶이 眞正한 宇宙的 緣起法界의 實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 곧 佛性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衆生心은 끊임없이 마음 밖을 向해 무엇인가를 求하고 있는 데에 反해, 修行者는 마음을 마음 自體에 놓고
返照해서 마침내 그 마음자리가 바로 求하고 있던 모든 것이 이미 갖추어진 것임을 알고 求하는 마음이 쉬고 아울러 圓滿한 비로자나佛 世界를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