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以多羅尼無盡寶

장백산-1 2014. 10. 11. 13:01

 

 

 

 

以陀羅尼無盡寶 (이다라니무진보)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

 

瞬間瞬間 깨어있는 마음/意識이 宇宙法界를 이루는 보배이며, 이런 마음은 늘 새롭게 世界를 밝히고 있습니다.

다함 없는 보배인 깨어 있는 순간순간의 한 마음이 바로 緣起法界의 總相이 되어 모든 것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陀羅尼 ,곧 총지(摠持)라고 합니다.

다함없는 불성(佛性)의 빛으로 어른 스님께서 법상(法床)에 올라 법문을 하실 때 가끔씩 묻습니다.

 "이것을 주장자라고 해도 맞지 않고 주장자가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다. 그럼 이것을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
 
이것은 주장자라는 이름과 주장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事物과의 關係뿐만 아니라, 삶의 여실한 모습을

깊숙이 꿰뚫어 보는 智慧가 瞬間瞬間 살아있는 가를 点檢하는 말입니다. 만일 주장자를 주장자라고 말한다면

이는 常見에 떨어지는 것이며, 주장자가 주장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斷見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주장자가 주장자가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有, 無, 역유역무(亦有亦無),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주장을 부처님께서 사견(邪見)이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있고[有] 없는[無] 것의 主語를 設定하고 그에 對해서 있다거나 없다고 斷定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有無 등의 術語로 보면 다르지만 이 術語가 가리키고 있는 主語로 어떤 것이 前提된다고 하는 데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有 無의 主語가 金剛經에 따르면 四相이 됩니다.

그래서 상(相)을 갖지 않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며 법계(法界)기 됩니다.

相에 執着하는 것은 중생이면서 同時에 自身의 참된 삶, 깨달음의 世界인 宇宙法界 비로자나(毘盧遮那)부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相을 버리는 것이 스스로의 本來모습인 緣起實相의 宇宙法界로 사는 삶입니다.

 

 

相은 말과 生覺으로 나타내는 모든 것입니다.

 

지금 相을 떠난 世界를 說明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方便인 말을 빌려 쓰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신통력을 사용하여 相을 떠난 如如한 모습을 가리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無我, 무상(無相)의 本來 모습을 확실히 증득하고 無念無相의 마음 쓰기가 相을 떠난 깨달은 삶입니다.

相을 갖는다는 것은 制限된 時空을 사는 것이며 무념무상(無念無相)이란 時空의 制限을 떠난

언제나 全切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全切란 앞서 서까래가 집이라고 했던 비유를 생각하면 됩니다.

 

한 生覺 일어남이 宇宙法界의 일어남이요, 한 生覺이 사라짐이 宇宙法界의 사라짐입니다.

물론 겹쳐진 다른 모습의 限없는 宇宙法界 모두가 한 生覺과 함께 成立된 것입니다. 그래서 重重無盡法界라고

말하는 것이지 重重無盡法界 가운데 한 宇宙法界가 生覺의 일어남 사라짐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드라網의 한 구슬이 重重無盡으로 펼쳐진 인드라網 구슬 全切를 나타내고 있듯이, 한 生覺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 生覺이 緣起法界를 建立하는 것이지, 주어진 緣起法界에서 한 生覺의 泡沫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한 生覺이 緣起法界의 總相이면서 別相등으로 六相 모두가 그 가운데 들어 왔습니다.

한 生覺이 宇宙法界의 緣起實相을 모두 드러내 보이고 있으므로 總持라고 말하며 陀羅尼라고 합니다.

 

 

 

 

그래서 陀羅尼는 한 生覺이며 緣起實相이며 空性이며 宇宙法界입니다.

緣起法界란 무상(無相), 무아(無我), 열반(涅槃)의 다른 이름이며 時空을 벗어나 있으면서도 時空 그 自體입니다.

 
이 緣起關係에서 衆生은 制限된 時空만으로 自我를 삼고 그것으로 온갖 事物의 척도를 삼습니다. 그래서

時空이면서 時空을 벗어난 色 그대로 空인 陀羅尼의 總相을 보지 못하며, 時空을 벗어나 있으면서도

온갖 時空으로 諸 모습을 나투는 空 그대로 色인 陀羅尼의 別相을 보지 못한 眼目을 갖는 것입니다.

이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고 말합니다.

 

遍計所執性이란 制限된 時空, 곧 相을 갖는 것을 말하며 知覺 對相으로 남아 말로 表現되는 것으로

衆生의 業을 이루는 根幹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業으로 알게 되는 世界가 꿈이고 구름 등과 같다고 합니다.

 

修行으로 말미암아 말과 生覺/마음/의식이 일어나기 前의 法界實相을 보게 되면

한 발자국도 眞如佛性이 如實하게 나타난 世界를 떠난 적이 한 순간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佛性이란 중생의 안에 있는 부처가 되기 위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 있는 宇宙法界 그대로가 佛性이며 이 佛性은 制限된 生覺과 말을 떠나 있습니다.

 

 

빛나는 마음인 宇宙法界 그대로가 佛性인 世界는 時空의 制約을 떠나 있기 때문에 어느 곳 어느 때를 가리지 않고

빛으로 나투는 보배입니다. 다함 없는 빛나는 마음, 佛性의 빛이 또한 陀羅尼, 緣起法입니다.

 

그래서 온 世界가 온 宇宙法界가 부처님의 德相인 智慧光明으로 빛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함 없는 빛인 보배는 相을 갖지 않는 텅~빈 마음입니다. 遍計所執性의 相을 떠나 法界에 充滿한 빛나는 마음,

이 보배를 圓成實性이라고 말합니다. 한 生覺이 사라지는 瞬間에 宇宙法界가 한 모습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緣起實相의 世界, 緣起空性의 場입니다.

 
따라서 工夫하는 사람은 어떠한 相도 가져서는 안됩니다. 相을 갖는 瞬間 마음 밖에서 마음을 구하는 것이 되며

아울러 이 世上 모든 것들이 自性을 갖고 있다고 錯覺하게 되면서 삶의 實相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삶의 實相을 알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工夫人들이 自身의 수행법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때도

일정한 모습으로 實在하고 있다고 여기는 데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수행법을 가르침에 의해서 臨時方便의 가법(假法)으로 傳해지고는 있지만, 그것도 모두에게 똑같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修行者와 關係를 갖게 되면서 새롭게 展開되는 緣起關係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말과 生覺을

빌어 가르침이 傳해지고는 있지만 그 가르침조차도 修行者를 벗어난 別個의 가르침으로 存在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와 가르침이 緣起關係로서 새로운 世界를 瞬間瞬間 열고 있는 것이며, 같은 가르침인 것 같지만

같은 것이 아닌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남기신 말씀, "게으르지 말고 항상 깨어 있으라",

 "法을 의지처로 삼고 自身을 依持處로 삼으라"고 하신 말씀도,

생각/마음/의식이 또렷이 깨어 있을 때만이 法이 삶의 빛으로 나투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金剛經>에서 決定된 法이 없다고 强調하신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瞬間瞬間 깨어 있는 마음의식이 宇宙法界를 이루는 보배이며, 이 마음은 늘 새롭게 世界를 빛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다함 없는 보배인 깨어 있는 瞬間瞬間의 한 마음이 바로 緣起法界의 總相이 되어 모든 것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이를 陀羅尼, 곧 총지(總持)라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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