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莊嚴法界實寶殿

장백산-1 2014. 10. 11. 12:32

 

莊嚴法界實寶殿 (장엄법계실보전)


법계의 참된 보배궁전을 장엄해

 

 

 

법계의 참된 보배궁전을 장엄하는 것은 깨어있는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깨어있는 마음만이 삶의 온전한 모습이며 法界의 實相이기 때문입니다.

법계를 장엄하는 법성게다라니의 한없는 보배란

마음 마음이 因緣따라 限量없는 모습으로 빛(光明)이 되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生覺/마음/意識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緣起法을 나타내는 게송 곧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에서 이것은 저것에게서 獨立될 수 없으며

저것도 아것에게서 獨立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것이면서 저것도 이것에게서 獨立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것이면서 저것과 하나된 場이 ,곧 법계(法界), 緣起空性의 場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이것으로서 저것을 貫通하고, 저것은 저것으로서 이것을 貫通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 그대로 法界이며 저것 그대로 法界입니다. 곧 相互關係의 緣起의 場에서 저것으로서의 法界의 모습과

이것으로서의 法界의 모습이 겹쳐(重疊되어) 있는 宇宙法界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이것일 수 있고

저것이 저것일 수 있음은, 이것과 저것 그 自體가 공(空)이 본바탕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 關係에서는

이것과 저것이 完全히 같은 것이며 이것과 저것이 함께 서 있는 場도 空입니다.

 

 

 

이 空인 接面에서 이 세상 모든 現象들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一切가 그대로 空의 表現입니다.

때문에 修行者는 이 接面인 空이 瞬間瞬間 無常으로 나툰 變化에 투철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유훈으로 남긴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이것은 瞬間瞬間 깨어 있는 意識/마음이 完全한 깨달음(正覺)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結定된 形態로서 時空이 있는 것이 아니라 無常한 瞬間瞬間의 變化만 있을 뿐이며

瞬間瞬間의 變化는 同一한 어떤 것이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變化만으로 存在하는 것입니다. 렇기 때문에

한 瞬間  意識이 깨어있음은 그 自體로서 完成된 부처님이며, 깨어 있지 못한 瞬間은 그 自體로서 衆生입니다.

 

 

중생과 부처님은 깨어 있음과 깨어 있지 못한 無明을 接面으로 하여 나누어 있을 뿐, 중생과 부처님의 自性에

差異가 없으며, 깨어 있음과 무명의 差異도 그 자성(自性)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自性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修行者는 每瞬間 全切로 깨어 있어야 하며 그것이 꿈속이나 잠속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이때 비로소 緣起的의 因緣으로 겹쳐있는 모든 것들이 깨어 있게 되니 이를 일러서 莊嚴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莊嚴이란 莊嚴되고 있는 무엇이 莊嚴이 아니라, 空性의 빛으로 인드라網을 이루고 있는 모든 보배들이

빛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修行者가 瞬間瞬間 깨달음의 빛으로 自身을 無化시키면서 全切를 이루고,

그 全切와 無化된 修行者로 하여금 個體의 빛으로 있게 하는 相卽相入의 華嚴緣起/緣起空性를 말하고 있습니다.   

 

 

莊嚴은 수행자의 텅~빈 마음이며 이는 緣起實相인 다라니法의 인 것입니다. 이 빛이 또한 法界이니 彼此가 없는

가운데 빛으로 제 모습을 나투어서 함께 인드라網의 보배구슬처럼 相卽相入의 大日如來를 나투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修行者의 意識/마음이 瞬間瞬間 無常의 變化인 因緣實相의 無我에 투철히 깨어 있음이 大日如來의 自己表現이며 이것만이 眞實한 世界입니다.

 

 

 

法界의 참된 보배궁전을 莊嚴하는 것은 깨어 있는 修行者의 마음/意識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만이 삶의 온전한 모습이며 法界의 實相이기 때문입니다.

이 法界를 莊嚴하는 다라니의 限없는 보배란 마음마음이 因緣따라 

限 없는 모습으로 이 되는 것입니다.

 

 

無常이란 緣起關係 속의 變化가 限量없는 것을 말하며, 이 變化는 제때 제때 으로 을 나투니,

時節因緣에 따라 피는 꽃이 곧 宇宙法界의 莊嚴이며, 부처님의 품이며, 다라니의 總體입니다.

아울러 이 꽃은 自身의 빛으로 宇宙法界를 莊嚴하여 열며 各己가 부처가 되게 하면서 다라니의 總體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선사 스님께서는 모든 佛菩薩이 오직 나만을 위해 存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宇宙法界가

佛菩薩님의 나툼이며 그 宇宙法界가 나를 存在케 하는 根源이라는 말입니다. 同時에 나는 宇宙法界의 부처님을

存在하게 하는 根源이며, 나와 宇宙法界는 空인 接面에서 서로가 서로를 부처(佛)로서 存在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참[眞]입니다.

 

 

마음 밖에서 또는 마음 안에서 부처를 求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나툰 宇宙法界 그것이 그대로 全切의 부처를 이루는 것이며 이것만이 참된 보배입니다.

 

 

每瞬間 깨어 있는 마음/의식이란, 안팎이 따로 없을 뿐만 아니라, 높고 낮음, 오고 감, 깨끗함 더러움 등으로 規定된

自性이 存在하지 않는 다는 事實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우리의 日常에서 그대로 實踐되어야만 합니다.

智慧와 慈悲를 수레의 두 바퀴에 比喩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 중 하나가 비어도 온전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의 온전한 깨달음은 어느 한 사람만의 問題로 登場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人類 全切가 當面한 問題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修行이 個人이나 어느 集團만의 일일 수 없는 理由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問題들은 個人이나 集團 또는 안팎 등의 區別속에 갇혀서 自身의 삶을 살고 있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執着에서

오는 不滿足이며 우리의 眞正한 삶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執着에서 오는 개인과 집단 등의 利益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 宇宙法界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 莊嚴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莊嚴이란 깨달음으로 새롭게 이루는 世界가 아니라, 잃어버린 莊嚴을 되찾는 세계이니, 오늘날 環境運動 등이 좋은 例입니다.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智慧와 慈悲, 곧 텅~빈 마음과 함께 사는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작은 實踐일지라도

동시에 그것은 宇宙法界를 莊嚴하는 크나큰 運動이며 希望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宇宙法界의 莊嚴을 위한 修行은

그것이 비록 크게 드러나지 않는 실천일지라도 온 宇宙法界를 감싸는 아름다운 모습이며 보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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