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能仁海印三昧中

장백산-1 2014. 10. 11. 13:15

 

 

 

能仁海印三昧中 (능인해인삼매중)

 

 

 

 

 

 

 

 

 

부처님께서 해인삼매(海印三昧) 가운데

 

 

능인(能人)이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法身자리이며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限定되어 있는 마음을 놓을 때 온 宇宙의 마음이 스스로 나타납니다.
모든 衆生과 事物들이 그 마음 가운데서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나툽니다.
이처럼 法界緣起로 이루어진 重重無盡한 生命의 場을 海印三昧 卽, 깨달은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삶을 如實히 아는 淸淨한 마음

 

 

여기서 말하는 能人이란 비로자나佛, 우리들의 마음을 말합니다. 華嚴世界에서는 緣起實相의 모든 法이 부처님을

이루는 根本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因緣關係에서 모든 중생과 사물들이 부처로서 제 모습을 나투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능(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또는 하나의 사물이 그 自體로서 宇宙法界를 創造하는

主人으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能力者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緣起世界를 成立시키는 根本이 바로

各各의 모든 것이며 그 自體가 能力者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事物이 없으면 다른 一切의 사람과 事物이 存在할 수 없는 것[此無故彼無] 등이 緣起實相의 우리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면 마음이 萬法의 主人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法이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法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法이 일어나면 모든 法이 일어나고, 마음法이 있으면 모든 法이있고 마음法이 없으면

모든 法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中心이 마음을 떠나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곧 마음이 能人이며 부처님(佛)이며 華嚴法界를 이루는 비로자나부처님의 實相입니다. 그래서 옛스님들께서는 마음 밖에서 부처를 求하는 것을 外道라 하셨습니다. 外道란 부처님 가르침 以外의 모든 가르침을 뜻합니다만 이 가르침조차 마음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마음 밖에서 부처를 求한다면 삶의 眞實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삶의 歪曲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人類史가

온갖 不滿足스러운 일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도 그 原因이 마음 밖에서 實다운 法을 求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能人이라는 우리 스스로도 마음도 밖에서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음의 實相을

正確히 알지 못하고 그저 일어나는 마음대로 活動하면서 不滿足스러운 生活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그 證據입니다.

 

 

이와 같이 끊임 없이 일어나는 欲望의 持續을 잠시 쉬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기 始作하면 修行이 됩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習慣的으로 일어나는 欲望을 持續하고자 하는 마음의 作用을 이라하고

을 지멸(止滅)하는 것이 修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들여다보기란 瞬間瞬間 일어나고 있는 欲望의 止滅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한 生覺이 일어나니 三界가 열리고 한 生覺이 그치니 法界가 열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가만히 自身의 지나온 길을 生覺해 보십시오. 마음 가운데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난 瞬間부터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마음이 흔들림 없이 便安했는지,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마음이 얼마나 얽매여 있었는지,

그래서 金剛經에서는 어느 곳에도 얽매임이 없이 마음을 내어 쓰라고 하였습니다.(應無所住 而生其心) 마음에서

일어나는 欲望을 붙잡아 집착하려고 하는 마음이 머물러 얽매이는 마음입니다.

 

 

놓으십시오. 놓는 瞬間 그때까지 스스로를 옭아매던 모든 것들이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業이라고 합니다.

 

 

 
어느 누구든 설사 신통자재하신 부처님까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自身만은 속일 수 없으니, 이 속일 수 없이

훤히 알고 있는 自身의 모습이 스스로의 業이며 이것에 依해 끊임없이 속고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지요.

 

 

 

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業의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를 주시해서 지켜보십시오. 마음이 主人입니다만은

마음 또한 제멋대로 될 수 없습니다. 마음도 제 모습을 結定하여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瞬間瞬間 그와 같이 있다가

사라져 갈 뿐, 習慣的으로 이어가는 것이 眞實한 마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음 지켜보기는 스스로에 限定되어 있는 마음 지켜보기가 아니라 限定된 마음의 結定을 버리는 것을 뜻하며 이때 온 宇宙의 마음이 스스로 나타납니다. 어느 하나 빠짐 없이 모든 衆生과 事物들이 宇宙마음 가운데에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나투게 됩니다.

 

 

 

마음이 宇宙萬物를 成立시키면서 同時에 모든 法이 마음을 成立시키고 있는 重重無盡法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때의 마음은 禪定에 依해서 特別히 고양된 狀態의 마음이 아닙니다. 自我意識으로 限定된 마음을 놓을 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게 되고, 그때 모든 것이 無常, 無我의 緣起關係로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世上 宇宙 어느 것도 그 自體만으로써
自身의 生命을 이룰 수 없으며 어느 것도 緣起關係의 그물網을 떠나

外的 存在에게서 生命을 賦與받는 것이 아님을 分明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에게 生命을 주고 받으면서 하나의 法界를 이루고 있고 나아가 하나의 모습으로 法界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生命의 을 演出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法界緣起로 이루어진 重重無盡한 生命의 場을 海印三昧라고 말합니다. 깨달은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海印三昧란 禪定에 依해서 多樣하게 體驗되고 있는 여러 가지 三昧 가운데 하나의 三昧가 아니라

三昧 中의 三昧입니다. 왜냐하면 自我意識이 完全히 脫殼된, 곧 業의 主體가 虛相임을 分明히 알고 모든 業이

完全 消滅된 無我의 智慧와 慈悲가 充滿된, 分別 以前의 맑고 청정한 비로자나佛의 世界를 海印三昧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海印三昧는 修行者가 華嚴의 十波羅密이 完成될 때 드러나는 世界이니 相卽과 相入의 걸림 없는 世界입니다.
삶을 如實히 아는 청정한 마음으로 온갖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生死를 말할 때

生死가 苦를 낳는 것은 生死 自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 生死를 虛相의 自我와 結附시켜 執着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生死를 如實히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生死를 如實히 알게 될 때 生死에서 벗어나며

海印三昧에서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걸림 없는 마음으로 사는 부처님이신 能人께서는 海印三昧, 곧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如實히 나투고 있는

宇宙生命의 場  全切를 스스로의 모습으로 하고 있는 때를 '海印三昧 가운데'라고 表現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能人이 海印三昧이며 海印三昧가 能人입니다. 能人과 海印三昧는 修行者가 行의 止滅을 完成하여

하나된 世界로 있는 것을 나타내며 이것을 중(中)'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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