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生死涅槃常共和

장백산-1 2014. 10. 11. 13:19

 

 

 

生死涅槃常共和 (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은 恒常 함께하고

맑고 고요한 마음, 텅~빈 마음으로 生死의 모습을 지켜볼 때,

도 아니고 도 아닌 緣起關系에서의 中道實相일 뿐.

固定된 實體가 없는 生死를 보게됩니다.

곧, 生死가 如來法身이며 華嚴世界입니다. 

 
 
텅~빈 마음으로 여실(如實)히 지켜보기
 
修行이란 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이란 習慣的으로 現象을 同一한 모습으로 認識하게 하는 힘으로

이 힘에 依해서 是非善惡 등의 二元性의 意志가 發生하게 됩니다. 生覺이 일어나는 瞬間은 언제나

의 要素가 同伴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마음을 텅~비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텅~빈 마음으로 事物을 如實히 보는 修行을 念處修行이라고

합니다. 모든 見解放下着하고 오로지 있는 그대로, 되는 그대로를 觀察하면서 삶의 眞實을 아는 修行입니다.

 

 

 
이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태어남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중생과 사물 사람을 如實히 지켜보면

生成消滅이 根本바탕입니다. 生成消滅을 如實히 안다는 것이 별것 아닌 듯하지만 대단히 重要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부처님 時代는 삶의 裏面에 삶의 기체(基體)로서

階級間의 差別을 決定하는 永遠한 存在가 있다고 하는 常住論과

因果의 理致를 否定하는 잘못된 見解인 斷滅論의 兩大 思想이 풍미하고 있던 때입니다.

 

 

 

이런 生覺을 前提하고 본다면 태어남과 죽음은 지금 여기서의 因果關係가
아니기 때문에 現象的으로는 說明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生覺을 비우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면 因果關係에서 삶과 죽음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을 꿰뚫고

存在하는 差別된 永遠한 存在도 없고, 因果를 떠나 遇然히 存在하는 삶과 죽음도 아닙니다.

 

 

 

 

또한 죽음이 있기에 永遠한 것도 아니고 태어남이 있기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나눌 수 없는 因果關係의 同時的 現象으로 常住論과 斷滅論의 思惟로는 說明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見解를 正見이라고 하며 中道 말합니다. 여기에는 生成과 消滅의 主體를 設定한다든지 因果를

否定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으니, 이런 見解는 단지 生覺이 만들어 내는 虛構의 삶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온갖 삶의 모습은 단지 緣起關係에서 生成消滅 뿐입니다. 緣起關係에서 因緣條件의 結合에 따라 生成과 消滅의

모습만 있는 것이 지금 여기의 우리이며 이것은 너무나 當然합니다. 따라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등으로 分別하고 執着할 理由가 전혀 없습니다.

 

 

 
의 執着에 의해서 生死가 不滿足스러울 뿐입니다. 不滿足스러운 모습은 生死의 本 모습이 아니라

執着하는 마음 作用인 의 마음 作用에 依해서 잘못 認識된 結果입니다. 그래서 앞서 苦의 發生이

生死에 있지 않고 生死를 색칠하는 業의 活動인 衆生의 마음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生死가 不滿足으로 다가 올 때는 우리들의 眞實한 삶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고

執着하는 自身의 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遍計所執性의 世界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이때는 生死가 生과 死로 區分된 別個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生과 死로 나누어 生을 탐하거나 싫어하며 死를 탐하거나 싫어하게 되는데, 이것은 生死의 眞實한 모습을

알지 못한 어리석은 마음의 作用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의 狀態를 如實히 지켜보아 執着하는 마음의 作用인 止滅될 때 念處修行의 맑

고요한 마음이 되며 이때는 생사를 왜곡하여 상주론이나 단멸론과 같은 잘못된 견해를 갖지 않게 됩니다.

 

 

이때 生과 死로 나누었던 것이 잘못된 見解임을 알고 生死가 나눌 수 없는 임을 알게 됩니다.

生이 死를 그대로 담게 되고 死가 生을 그대로 담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生은 死를 原因으로 하고 死는 生을 原因으로 해서

生死가 하나로써 함께할 때 비로소 우리가 있게 되니, 生이 不生生이며, 死가 不死死입니다.

여기에서 不生不死(不生不滅)이 우리 存在의 眞實한 모습이며 圓融한 일상(一相), 卽 無二相임을 보게 됩니다.

 

 

 

 

이울러 맑고 고요한 마음, 텅~빈 마음으로 生死의 모습을 지켜보게 될 때 執着으로 이루어진

業인 行의 作用이 그침과 아울러 끊임없이 變하는 無常의 自己의 本來 흐름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無常이 그 極에 이르러 오히려 고요한 不動의 微妙한 곳임을 보게 되면서 無常과 不動의 끊임 없는 交流,

連續과 不連續이 함께하는 것이 삶의 眞實임을 알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에서 不動을, 不動에서 動을

自由롭게 넘나들어 動과 不動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中道實相의 本來面目을 알게됩니다.   

 

 

이 中道實相에 비추어 自我란 動으로서 同一하거나 不動으로서 同一한 實體를 갖지 않고

因緣條件에 따라 제 모습을 갖기 때문에, 에 依한 習慣的 執着에 依해서 同一한 實體로 認識되고 있는 自我가

없음을 確實히 體得하게 됩니다.

 

 

 

 

 

 

身受心法을 지켜 보는 如實修行인 四念處修行으로 無常 無我의 自己 本來面目을 보게 되고

그 瞬間 모든 衆生과 事物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無常의 動으로서 不動을,

無我의 텅~빈 모습으로서 各各을 이루는 法界 인드라網의 相關關係를 體驗하게 됩니다.

 

 

 

 

 

 

生死 속에서 텅~빈 마음으로 法界 인드라網을 如實히 알게 되어 無常 無我의 흐름을 볼 때

生死의 모습 그대로 涅槃寂靜이 됩니다. 이것을 圓成實性이라고 말합니다.  

 

 

 

 

生死의 모습은 이것이 하므로 저것이 生하고 이것이 滅하므로 저것이 滅하는 緣起實相인데,

이것을 生과 死  個別로 나누어 그 自體로서 生과 死를 設定할 때 遍計所執性의 世界가 나누어

그 自體로서 生과 死의 遍界所執性의 世界가 있게 되고 그 結果 人生은 괴롭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비록 遍計所執性의 世界라 할지라도 그것은 잘못된 마음 作用인 의 執着에 依한 것일 뿐 그 根本은 無常無我입니다. 이제 수행에 의해서 無常無我를 보게 되는 瞬間 의 止滅이 이루어지고 모든 執着이 사라집니다. 이 執着이 苦의

根源이므로 이 止滅되는 瞬間, 苦가 消滅하고 涅槃의 맑고 고요하며 온갖 삶을 서로서로 있게 하는 따뜻한 慈悲의 氣運이 넘쳐나는 世界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보면 生死란 遍計所執性에 依한 苦의 世界도 아니고 涅槃寂靜에 依한 의 世界도 아니고,

緣起關係에서의 緣起의 場, 中道實相일 뿐입니다. 따라서 涅槃寂靜도 그 自體로서 實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 執着과 止滅이라는 狀態의 變化와 마음 비움의 轉換만 있을 뿐입니다.

 

 

 

 生死 그 自體도 緣起關係로, 生死의 實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遍計所執性으로 因한 生과 死의 分別과 거기에 따른 慾心과 성냄의 對相인 生死도 단지 의 執着일뿐 固定된 實體가 없기 때문에 生死와 涅槃은 아무런 差異도 없습니다. 生死가 中道緣起實相으로 如來法身이며 華嚴世界입니다. 生死가 비로자나佛, 법신자리의 모습이니 텅~빈 마음으로 삶을 지켜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重要한지를 아실 것입니다.
 

 

온 몸에 힘을 빼고 對相의 나눔이 사라지는 瞬間,

마음의 轉換이 이루어지고, 스스로가 法界實相의 비로자나부처님(法身佛/法身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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