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性圓融無二相,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고
법성(法性)으로 사는 삶이란 '나'와 '너'가 相互 包攝과 調和를 이루면서 한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연기(緣起)의 世界입니다. 연기의 세계를 사는 것을 지혜(智慧)라고 하며 이 때에는 저절로 慈悲行이
이루어집니다. 삶, 세상, 현실 全切가 智慧와 慈悲로 충만한 모습이 法性이기 때문입니다.
연기(緣起)로 하나된 삶, 법성(法性)
自己[別業]와 集團[共業]의 觀點으로 世界를 限定시키는 데서 오는 葛藤과 不滿足인 업(業)의 束縛에서
해탈(海脫)로 이끄는 가지가지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잃지 않고 每瞬間 드러내 보이며 實踐하는 것이 解脫에 이르는 수행(修行)입니다. 그리고 修行의 完成인
解脫은 무아(無我)로서 집착(執着)을 다 비운 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삶은
修行으로 새롭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앞에 이미 完全한 現實로 드러나 있습니다.
지금 법성게(法性偈)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이 만남의 장(場)도 自己 없음의 緣起法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서로 다른 個體로 完全히 나뉘어져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야기하고 있는 眞空場, 零点場場에서는 하나로 連結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場面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場面이 나눔 以前의 하나된 波動하는 에너지場으로 있으며,
이 場으로서의 回復이 無我의 緣起法인 自己 本來面目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修行이면서
同時에 삶의 本質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너가 全切를 이루는 部分으로서의 나와 너는
아닙니다. 나 그대로 全切이며 너 그대로 全切인 데서 나와 너가 하나가 된 場이 無我의 緣起空性場
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自己없음(無我)의 緣起法을 쉽게 經驗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世界입니다.
눈을 감고 떠올리면 나타나는 生覺, 꿈, 禪修行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影像들이 좋은 例입니다.
生覺이나 꿈, 禪體驗 등이 반드시 認識 主觀과 認識 對相으로 나누어져 나타나는 듯하지만
마음 밖에 따로 對相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은 마음의 한 世界일 뿐, 삼매(三昧) 體驗에서 보면
지금 分明히 마음 밖에 있는 것처럼 여겨기는 마음이란 認識 主觀이 아닌, 主와 客으로 나누어지기
以前의 하나된 場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自己없음의 三昧야말로 如實히 아는 것이며,
解脫의 바탕이 됩니다.
앞서 말한 이야기에서 하나의 場이란 이야기 三昧를 뜻합니다. 이 때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텅~빈
마음의 氣運이 이야기를 담아 듣는 사람의 텅~빈 마음으로 들어가고, 듣는 사람의 텅~빈 마음의 氣運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텅~빈 마음으로 들어가서[相入], 이야기하는 사람의 텅~빈 모양을 이루고, 듣는
사람의 텅~빈 모양을 이루어 하나[相卽]가 됩니다.
우리가 삶의 實相을 如實히 보기 위해서는 三昧 體驗이 必要하지만 三昧 體驗은 반드시 特殊한 狀況
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時間 空間에서 人間과 人間,
人間과 環境 등의 關係는 언제나 三昧 속에서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들은 나누어져 있는
各各인 것 같으나 잠시도 분리되어서 나뉘어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 세상, 현실은 緣起法으로 언제나 調和로운 '하나의 世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을
法性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삶의 온전한 모습이며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全切가 그대로 三昧인 緣起
의 모습으로 無我를 나타내는 創造的인 삶입니다. 이 삶은 自己없음의 열린 마음에서 서로가 서로를 포섭
하되[相入], 自己의 모습으로 自己없음을 나투는 데서 동일[相卽]합니다.
이와 같은 關係는 어느 한 쪽이 一方的이지 않고 相互 同等한 位置에서 包攝하고 包攝되고 있습니다.
相互 包攝되고 있는 것을 상입(相入)이라 하며, 包攝된 氣運, 곧 나 속의 너가 나로 살아나고,
너 속의 나가 너로 살아나는 것이 상즉(相卽)입니다.
이 關係에서 보듯 나는 너의 氣運을 받아 나가 되고, 너는 나의 氣運을 받아 너가 되어, 서로를 온전히
살게 하는 生命의 場이 곧 연기(緣起)의 상입상즉(相入相卽)입니다. 제 모습으로 서로를 無限히 받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삶의 根本이 무상무아(無常無我)로 텅~비어 있으면서도 텅~비어있음으로
因해 서로 제 모습을 지켜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法性으로 사는 사람이란 너와 내가 相互 包攝과 調和를 이루면서 한-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緣起의 世界
입니다. 緣起의 世界를 사는 것을 智慧라고 말하며 이때에는 저절로 慈悲가 實踐되어지고 있습니다.
삶, 세상, 현실, 현상의 세계 全切가 智慧와 慈悲로 가득찬 모습이 法性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三昧를 通해서 드러나는 우리들의 眞實한 삶의 모습이며, 바른 삶으로 사는 것이 法性이 우리에게
드러난 모습입니다. 따라서 法性으로 사는 사람, 곧 三昧로 삶을 사는 사람은 앎 그대로가 每瞬間 全切로
있는 것이지, 그와 같은 삶이 앎의 對相으로 理解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융(圓融)한 삶
이와 같은 三昧의 삶을 또한 圓融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 圓融한 삶은 마음을 지우고 有爲差別의 時空을
벗어나 무위(無爲)의 삶을 살며, 時空을 벗어난 無爲의 삶에서 時空의 差別을 나투면서 사는 삶입니다.
우리 삶의 온전한 모습인 無常과 無我란 時空을 超越하여 時空 밖에 있는 삶의 흐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無常이란 한 瞬間도 一定한 모습으로 계속되지 않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時間, 길이를 갖지 않는 時間,
時間이라고 하지만 時間 밖에 있는 時間의 變化입니다. 時間 밖의 時間인 無常의 變化가 眞如이며 空性의
모습이 됩니다.
無我란 모든 法은 그 自體만으로 固定된 實體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法은 相互連結 關係에서만이
제각각 모습을 나투면서 時空間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無常과 마찬가지로 無我도 또한 緣起空性을
말하며, 이 空性이 삶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인 眞如입니다.이와 같이 時空間 밖에 있으면서 時空
그대로를 投影해 나투는 공(空)으로서의 無常, 無我이기 때문에 이 世上 모든 것(諸法)이 眞如, 空性,
如來의 모습을 나투면서 差別이 있다고 金剛經에서 말합니다.
일어남이 바로 사라짐
生과 滅을 通해 무위법(無爲法)으로 있는 差別心을 살펴봅시다. 생(生)은 어떠한 것이 일어남을 말하고,
멸(滅)이란 어떠한 것이 사라짐을 말합니다. 여기서 '어떠한 것'이라는 명사(名詞)를 사용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生과 滅이라는 동사(動詞)가 恒常 同伴하고 있음에 注意해야 합니다. 명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명사가 가리키는 것이 無常이며 無我인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生과 滅은 無常으로 時空을 超越하여 벗어난 眞如, 空性의 끊임 없는 自己 變化입니다.
그리고 나타난 變化가 그대로 眞如, 空性의 表現인 것에서의 生과 滅입니다. 般若心經에서는
色 그대로 空이며, 空 그대로 色(色卽視空 空卽是色)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人間의 認識은 固定된 對相 없이는 成立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認識이 對相을 固定하면서
實體化 하기 때문에 生滅 그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인 眞如를 잃고, 生相(생상 : 生의 名詞化)과 滅相
분리 분별된 相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眞如인 無常의 흐름이 時空의 制限된 認識으로 업화(業化)하여
있는 그대로의 세상 모습을 알지 못하고 結定된 상(相), 곧 자성(自性)을 갖게 됩니다.
自性을 갖게 되면 마음이 닫히고 生覺 煩惱妄想 즉, 分別心이 뿌리를 내립니다. 여기에서 生도 없고
滅도 없는 時間 밖의 永遠性만을 세우게 되고 現實의 삶이 그 眞正한 意味를 喪失하게 됩니다.
그러나 自性을 갖지 않는 生과 滅의 無常한 찰나(刹那) 그대로 空性의 自己 表現일 때,
지금 여기 우리의 日常이 大自由의 모습으로 肯定되면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禪, 法, 道, 佛, 心의
表現이 됩니다.
禪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삶, 곧 無常 그대로 영원성(永遠性)으로 언제 어디서나 살아감을 말합니다.
宇宙萬物 즉, 모든 衆生의 根本이 無常, 無我의 텅~빈 열린 마음,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禪의 삶인 해탈이
可能하며 역대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께서 證하신 것입니다.
本來마음은 언제나 텅~비어 열려있는 반탕으로 空性이 根本이며 自性을 갖지 않습니다.
自性을 갖지 않는다는 말은 無常, 無我로 전찰나(前刹那)와 후찰나(後刹那)에 變함 없는 同一한 自己의
모습을 이어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밝고 어둠에 따라 눈의 因緣 條件이 變하지 않는다면
본다는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生覺이 일어난 瞬間 이 生覺을 明確히 지켜 보아 그 生覺을 無常으로 알아차릴 때,
衆生의 制限된 時空間인 닫힌 마음이 상(相)을 갖지 않게 돠고, 時空을 超越하여 全切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일어남이 바로 사라짐임을 보는 것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하는 말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하나의 事實을 이르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事件이 일어남은 宇宙全切의 因緣條件이 그 事件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한瞬間을 가리킵니다.
이 事實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事件에서 法界를 보는 것이며, 그 事件 自體로서 無常, 無我를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宇宙全切의 因緣條件은 잠시도 멈춤 없는 變化性으로 生이 그대로 滅이며
滅이 그대로 生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宇宙法界의 生이며 滅입니다.
곧, 生도 生滅이며 滅도 生滅입니다. 따라서 同時 生滅이라고 해야 한 刹那를 온전히 表現한 말이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라지는 쪽에서 보면 불생(不生)이요,
사라지는 것 같지만 일어나는 쪽에서 보면 불멸(不滅)이 됩니다.우리의 삶이란 이와 같이 生과 滅이
同時에 함께 하는 總體的인 波動하는 에너지의 흐름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와 같이 나타내는
모양 있음도 그대로 모양 없음을 同伴하고 있는 것이요, 죽어 消滅될 것 같지만 그 消滅이 바로 모양을
나타내게 됩니다. 逆說的이게도 自己 모습의 正體性을 유지하기 위하여 變化하지 않으면, 즉 죽지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 삶입니다. 無常한 變化만이 우리들이 삶, 세상의 本來 根本 모습인 眞如空性,
緣起空性을 나타내는 方法입니다.
따라서 태어남과 죽음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 眞如空性의 가장 微妙한 나툼인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普遍的인 認識態度는 一定한 時空間에서의 固定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닫힌 마음이고 업(業)입니다. 한 生覺이 일어날 때마다, 그 한 生覺이 不生不滅의 텅~빈 모습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認識, 意識이 닫힌 마음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삶의 全切가 무엇인지 明確히 알아차려 참다운 삶의 모습을 如實히 나툴 때 同時에 全切의
調和로운 世界가 펼쳐집니다. 이때 비로소 完全한 是非 分別 比較 判斷이 사라지게 되어 圓融한 삶이 됩니
다. 圓融한 삶, 是非 分別 比較 判斷이 사라진 세상, 삶은 시비분별을 꿰뚫어 보는 無心, 無念에서 業의
種子까지 사라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是非分別하는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마음, 自我
를 세우지 않는 마음속에서 이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더욱 自身을 살펴야 합니다.
나눌 수 없는 삶의 어울림
宇宙法界는 緣起關系의 한 모습으로 生命을 나투고 있고, 우리의 삶이란 宇宙法界의 한어울림 가운데
서로가 各己 제모습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無常, 無我인 緣起關係에서 各者의 모습은 宇宙法界의
部分이면서 全切의 因緣을 結定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곧 各者의 모습을 이루는 힘이 宇宙法界
全切를 貫通하고 있고 宇宙法界 全切의 因緣으로 各者의 모습을 이루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뭇生命들이 重疊되어 있되 各己 제모습으로 나투는 중중무진세계(重重無盡世界)라고 합니다.
이를 비유하면 시방(十方/空間全切)이 거울로 된 房 가운데 촛불을 켰을 때, 그 불이 十方에 계속해서
겹쳐 있는 것과 같으며, 제석천(帝釋天)에 十方으로 限없이 펼쳐 있는 그물, 곧 인드라網의 그물 코마다
박혀 있는 寶石에 다른 그물 코의 모든 寶石이 反射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事實을 알지 못하고 制限된 時空間의 어느 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理解
입니다. 自己없음(無我)이 如實히 드러나는 삼매(三昧)를 通해서 잘못된 理解가 完全히 사라질 때,
서로가 無限한 生命의 場을 演出하면서 重重無盡世界를 나툽니다.
이 모습은 서로가 서로에 對해서 중심(中心)이면서 주변(周邊)이며, 주인(主人)이면서 객(客)입니다.
이런 重重無盡關係는 철저히 自己로 살되 同時에 自己의 모든 것을 펼쳐서 다른 이를 살게 합니다.
이때 비로소 生과 死를 떨쳐버리고 生에서도 死에서도 無限히 펼쳐진 삶이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生으로서의 삶만을 追求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삶의 本來 모습을 잃고 죽음으로 이끌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나눌 수 없는 生命의 躍動이며 이 過程을 通해서 永遠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無常으로 나툰 眞如空性의 時空間을 超越한 모습에서의 삶과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이 그대로
眞如空性場, 緣起空性場이며 여기에는 삶과 죽음, 眞如空性, 緣起空性이라는 이름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눌 수 없는 生命의 波動을 나누는 데서 죽음은 始作되니 오늘날 人類 全切가 環境汚染으로 生命을 위협
받고 있는 것이 그 좋은 例입니다. 서구(西歐) 思潮가 힘을 갖고 난 以後 지금까지 環境이란 人間에 依해서
정복되는 객(客)으로만 生覺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環境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環境으로 보면 環境 스스로가 主人입니다. 죽음으로 몰린 環境은 다시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主와 客이 同時에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主人이면서 客이고 客이면서
主人으로 한世界를 이루고 있는 重重無盡世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宇宙의 中心이면서 同時에 周邊인 客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事實을 如實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主客을 함께 봐야 합니다. 客으로서 主人을 볼 때는 客의 位置가 自己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하고, 主人으로서
客을 볼 때는 主人의 位置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主人이면서 客으로 있는 데서 비주(非主)가 되며, 客이면서
主人으로 있는 데서 비객(非客)이 됩니다. 主人도 아니요, 客도 아닌 데서 主人과 客으로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緣起中道
부처님 時代의 印度를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갑시다. 부처님 시대 以前부터 印度社會는 아리안 족(族)과
드라비다 족으로 代表되는 差別된 階級과 地位의 지속, 나아가 시대에 따라 더욱 細分된 階級을 갖게 됩
니다. 그리고 決定된 階級의 差別에 依한 삶의 方式이 印度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巨大 國家의 成立과 더불어 새로운 社會秩序가 要求됩니다. 이에 따라 이미 성립돼 있던
宗敎, 思想 등도 變化해야 했으며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밖의 종교, 사상들도 새롭게 일어나게 됩니다.
부처님 以外의 가르침은 대체로 存在의 永遠性을 主張하는 상주론(常住論)과 因果의 理致를 否定하는
단멸론(斷滅論)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만 이 思惟의 배경은 結定論입니다. 곧 結定된 思惟의 틀에 의해
서 모든 衆生의 삶이 演繹되는 것이나, 이는 實存의 우리 모습이 아닙니다. 結定된 사유(思惟)의 틀에
의해서 오늘날까지도 사회의 질곡이 더욱 가중되고 있는 현실에서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常住論과 斷滅論의 가르침이 한 편에 치우친 것이라 하시면서 緣起中道를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텅~비우고, 곧 모든 生覺의 틀, 槪念, 觀念, 相을 버리고 우리의 삶을 지켜
보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도 이와 같은 結定된 生覺의 틀에 매어 있다는 事實을 전혀 모릅니다.
마음을 텅~비우고 實相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四念處修行 입니다.
이 修行을 통하여 緣起實相을 깨닫게 되니 치우침 없는 중도(中道)의 바른 길(八正道)이었으며, 結定論
을 主張하는 다른 宗敎, 思想 등과는 다른 새로운 길이 었습니다.
緣起中道의 삶이란 서로가 自己 모습만을 固執하지 않으며 因緣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살게 하는 法性의
삶이며 원융(圓融)이며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이며 무애(無碍)입니다. 무자성(無自性)인 一切가 緣起
空性場의 한어울림, 한마당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며, 이 重重無盡 緣起空性場의 關係를 떠나서는
宇宙萬物 諸各各의 삶, 世上은 根據가 없어지고 맙니다. 삶, 세상의 根據가 緣起法이라 함은 個個人의 삶
뿐만 아니라 認識主體로 알고 있는 마음도 또한 그 自體로서는 存立 根據를 갖지 못함을 뜻합니다.
두 거울이 서로 비추듯
앞서 이야기 했던 꿈, 生覺, 三昧 속의 影像 등은 말할 것도 없으며, 마음 밖에 따로 存在하고 있다고
生覺하는 一切의 對相도 그 自體로서 存立 根據가 없습니다. 그것들도 認識 主體인 마음과의 相互連結
關係 속에서만 그와 같이 보이고 들릴 뿐 마음을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認識의 對相을 본다고 하는 것은 主體로서 對相을 보는 것이 아니라
認識 主體인 마음에 依해서 그렇게 보여지도록 對相化된 自己 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對相이 마음으로 하여금 對相을 닮아서 作用하도록 하는 對相의 反影이 認識 主體인 마음의
作用이라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對相을 만들기도 하고 對相이 마음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 말은 마음과 對相이 認識의 場에서 하나임을 뜻합니다. 이들 중 어느 하나가 먼저 있고 그것으로부터
다른 것이 派生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과 對相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對相을 떠나서 存在할 수 없으며 對相도 마음을 떠나서 存在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은 對相이면서 同時에 自己 마음이며, 自己 마음이 同時에 對相이 되어 있는 關係입니다.
이것을 옛 스님들께서는 두 거울이 마주 보고 서로를 비추고 있다[兩鏡雙照]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對相도 마음에 따라 갖가지 다른 느낌과 認識이 있을 수 있으며, 수많은 對相에 따라 마음의
作用도 千差萬別입니다. 한 瞬間도 認識의 場에서 일어나는 關係 속의 變化인 앎은 一定하지 않습
니다. 이와 같은 變化는 時空間을 떠나 있으면서 時空間으로 나투고 있다고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時空間의 制約을 떠나 時空間의 밖에 있으며 無限 소(小)와 無限 대(大)를 同時에 담고 있으므로,
制限된 時空間만을 認識의 對相으로 삼을 때는 알 수 없습니다.
알수 없는 根本 變化인 緣起法을 낱낱의 個別로 나누고 認識主體와 認識客體로 나누는 것을 分別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分別이 일어나는 瞬間이 自身의 眞正한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瞬間이며 스스로 歪曲과
疎外를 부르게 됩니다.
마음과 對相이 한 삶임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나 對相의 固定된 實體가 있다고 여기는 瞬間 分別이
일어나면서 마음과 對相이 타자화(他者化)되고 必然的으로 고(苦/괴로움)이 發生하게 됩니다. 分別이
일어나는 瞬間 삶은 苦와 不滿足의 連續이니 自身의 眞正한 삶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對相을 바르게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됩니다. 分別은 단지 對相, 나와 너로 갈라 놓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눈 뜬 장님, 들리는 귀머거리로 만듭니다. 그래서 나무의 소리, 흙의 소리, 이웃의
소리등의 自然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게 합니다.
거꾸로 分別이 그치는 瞬間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되니, 이 삶을 圓融한 삶, 하나된 삶이라고 합니다.
時空間의 制限을 넘어 마음과 對相이 서로 걸림 없는 全切로 사는 삶입니다. 두 거울이 서로를 마주
비추듯 對相이면서 同時에 마음이고 마음이면서 同時에 對相임을 分明히 ,자타(自他)의 分別을 떠나
사는 삶을 두 모습이 없다(無二相)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