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無名無相絶一切

장백산-1 2014. 10. 11. 13:38

 

 

 

無名無相絶一切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모든 것이 끊어져

 
우리 삶의 實相은 그 어떤 이름으로도, 어떤 모양으로도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連續된 흐름과

不連續인 變化의 二重性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생생한 삶은 變化만 있을 뿐, 變化의 主體는 없습니다.

이것을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춤이라고 합니다.


 
분별(分別) 떠난 삶,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춤

 

앞서 우리 삶의 실상(實相)이 무상(無常), 무아(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셋을 理解할 때는 무상상(無常相), 무아상(無我相), 열반상(涅槃相), 곧 槪念을 通해서 理解합니다.

 

이와 같은 理解를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學習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學習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學習은 올바른 槪念을 定立시키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理解는 업상(業相)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

니다. 사유(思惟)와 수행(修行)이 뒤따라야 합니다. 槪念은 理解의 一定한 틀을 提供하지만 實相은

언제나  一定한 틀을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理解를 위한 이름과 모양은 이 틀을 말합니다. 이 틀은 자신(自身)과 대상(對象)을 一定하게 分別

하면서 多樣한 理解를 가로막습니다. 우리들의 理解란 理解가 自己 確信에 지나지 않으니, 定해진

理解의 틀에 새로운 理解를 맞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每瞬間마다 經驗하고 있는 多樣한

삶의 모습들이 一定한 틀에 依해 理解되면서 생생한 삶이 죽은 삶이 되고 맙니다.

 

생생한 삶은 명사화(名詞化)되지 않은 變化들입니다. 變化의 主體는 없습니다. 다만 變化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우주법계(宇宙法界)의 춤'이라고 합니다. 宇宙法界 全切가 서로서로 맞물린

춤사위의 '우리'일 뿐, 춤을 추는 主體가 따로 없습니다. 아울러 춤을 멈춘 적도 없습니다. 정지(停止)도

동작(動作)도 춤일 뿐입니다. 오히려 停止가 極的인 움직임이 됩니다.


宇宙法界의 춤에는 主體로서의 이름과 形相, 춤이라는 動作에 붙이는 이름과 形相이 떠나 있습니다.

宇宙萬物이 그저 함께 어울려서 추고 있는 춤일 뿐입니다. 마지 못해 춤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理解를

위해 여러 가지로 說明하고는 있지만, 지금 우리들이 認識하고 있는 一般的인 춤이라는 그림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經驗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고자 합니다. 알고자 하는 그것은 지각(知覺)일 뿐입니다. 知覺의 特性은

無常의 變化를 固定된 狀態의 性質, 곧 同一性을 確立하는 것입니다. 이를 업상(業相)이라고 합니다.

業相은 이 世上을 分別하고 造作하면서 이름짓고 無常의 變化 狀態를 固定시켜 同一化하는 흐름입니다.

이것을 業의 傾向性이라고 하는데 이 性質에 依해서 實在가 歪曲되고 스스로가 삶에서 疎外됩니다. 이는

人間의 感覺, 知覺의 條件인 몸과 마음의 特性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業의 投影 나툼이기

때문입니다.

 

業相이 몸과 마음을 一定하게 固定시키고, 이 몸과 마음은 自身과 對相을 把握하기 위해서

自身의 固定된 認識의 틀을 이용하면서 時間과 空間을 固定하고 結定論을 세우게 됩니다.


이와 같은 知覺作用에 依해서 파악된 固定되어 同一한 모양을 유지한다고 여기는 現象에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名)과 모양(相)은 無常한 變化와 無我의 世界를 나타내기에는

適節하지 않으며 根本的인 모순관계를 면치 못합니다.

 

곧 知覺과 言語에 依해서 파악된 固定된 同一性의 틀(槪念/觀念)을 가지고는 우리 삶의 實相을 理解할

수 없습니다. 한 個體의 흐름은 잠시라도 固定된 同一性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個體는 다른 것과의

全切的인 相互連結 속에서만 個體일 수 있기 때문에 이 相互連結 關係를 떠나 固定된 이름과 모양으로

分別 지음은 業만 增長시킬 뿐입니다.

 

어떤 이름으로도 어떤 모양으로도 無常, 無我의 連續된 흐름과 不連續인 變化의 二重性인 우리 삶의

實相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의 實相를 思量分別에 依해서 分離지워진 나눔의

모든 分別을 떠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부처님 시대의 佛敎 以外의 認識一般이 結定된 主體를 設定하고 그 有無를

주장했음은 知覺 能力 곧, 業識의 흐름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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