證智라야 아는 바이지 다른 境界는 아니네
능소(能所)가 한 삶으로 있는 것,나와 너가 일법계(一法界)가 되어 열린 마음의 活動이 證智입니다.
이것이 바로 空性이 그대로 나타난 진여(眞如)의 모습입니다.
分別을 떠나 있는 삶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대상(對象)과 마음이 함께 어우러져 對相이 그대로 마음이고
마음이 그대로 對相이 된 나눔 以前의 삶입니다. 이 삶은 이름과 모양으로 알 수 없으며 固定된 同一性을
對相으로 하는 지각(智覺)에 依해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자의식(自意識)을 넘어서는 瞬間, 곧
삼매(三昧)에 드는 瞬間 體驗된 世界입니다. 이를 증지(證智)라고 합니다.
나와 너의 分別을 넘어서 全切가 하나의 지(智)로 나타나는 瞬間입니다. 아는 者[能]와 알려지는 것[所]이 없이
그저 앎으로 하나된 場面입니다. 이 場面은 능소(能所)의 分別을 떠나 있기 때문에 三昧 體驗의 對相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부득이 證智라야 아는 바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증지(證智), 곧 三昧 속에서는 능지(能知)가 곧 소지(所知)이고 所知가 곧 能知로 된 앎의 한 場面이기 때문에 證智에 이르게 되면 알 수 있는 對相이 있다고 生覺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열린 마음의 智慧에서 한삶으로 사는 慈悲가 實踐될 뿐입니다. 能所가 한삶으로 있는 것, 나와 너가 一法界가 되어 열린 마음의 活動이 證智인 무문별지(無分別智)입니다. 이것은 바로 空性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며 진여(眞如)의 모습입니다.
반야지혜(般若智慧)가 實在의 삶에서 드러났다고 해서 般若의 모습, 空과 眞如의 모습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금강경(金剛經)>에서는 '般若가 般若가 아니요, 般若라고 이름 부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關係를 앞서 생멸(生滅)과 동정(動靜)의 關係에 비추어 보면 生滅이 불생불멸(不生不滅)에서 生滅이었으며
動靜이 부동부정(不動不靜)에서 動靜이었듯이, 般若도 般若 아닌데서 般若입니다.
이 모두가 이름과 모양으로 規定지을 수 없는 데서 제 모습을 나투고 있을 뿐입니다. 般若, 空, 眞如 등의 말로
表現하고 있는 우리 삶의 흐름은 어느 瞬間을 固定하여 同一하게 파악할 수 없으며, 더구나 緣起關係의 重疊된
모습을 하나의 모양으로 나타낼 수 없음은 自明한 일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方便으로 言語와 모양을 사용하여 諸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삼법인(三法印)도 삶의 온전한 모습을 설명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텅~빔[空] 가운데 智慧로
諸 모습[眞如]을 드러내는 것, 곧 結定된 實體를 갖지 않는 無我, 無常의 텅~빈 모습이, 時空을 넘어서 모든
모습으로 드러나는 본바탕이 되기 때문에 分別을 떠난 一切 諸法이 諸 모습대로 如如[涅槃]합니다.
곧 般若가 般若가 아닌 데서, 空조차 空인 공공(空空)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眞如가 三法印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과 말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分明히 알아야 만이 방편(方便)으로서의
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