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諸法不動本來寂

장백산-1 2014. 10. 11. 13:39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法은 움직이지 않고 本來 고요하다

생멸(生滅), 동정(動靜)을 全切的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하면 制限된 時空을 쫒는 業相을 떠난 것이 고요한 삶입니다.

법성(法性)으로 원융(圓融)하게 사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본래 고요함(本來寂)입니다.이는 修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들의 本來 모습입니다.


 

무아(無我), 무상(無常)의 연기법(緣起法)

 

앞서 이야기했듯이 마음과 대상(對象)은 나눌 수 없는 하나로, 對相은 마음에 依해 있게 되며 마음은 對相에 依해

認識作用을 합니다. 이때는 마음이 對相 全切를 껴안고 있으며 對相도 마음을 껴안고 있습니다. 단지 그 접점(接點)

에서 마음은 마음으로, 對相은 對相으로 나투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相卽 相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相卽과 相入에서 보면 對相 그대로가 마음이고 마음 그대로가 對相입니다. 곧 形相을 떠나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形相 그대로가 마음입니다. 形相도 마음을 떠나 있지 않고 마음 그대로가 形相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마음이고 對相은 對相입니다. 마음이 全切를 나타내는 말이 되고 對相이 全切를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마음이라고해서 對相에 상대(相對)되는 마음이 아니고 對相이라고 해서 마음에 相對되는 對相이 아닙니다.
 
作用面에서 마음은 自己를 나툴 때 반드시 對相 認識을 通합니다. 이럴 때 마음은 對相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또 對相은 마음에다 自己 形相을 비춰서 무엇인가를 認識하게 합니다. 이때에는 對相이 마음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關係가 상입(相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全切를 나타내고 對相이 全切를 나타내는 面에서 보면 마음 그대로가 對相이며 對相 그대로가

마음인 것, 곧 마음이 對相 속에서 對相이 되고 對相이 마음 속에서 마음으로 되는 것을 상즉(相卽)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對相의 關係 뿐만 아니라 모든 事物들의 相關關係도 마찬가지입니다. 낱낱의 事物은 그 속에 모든 氣運을 받아 제 모습을 나투면서 스스로도 온 힘을 다해 제 氣運을 이웃에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相卽相入으로 한 법계(法界)를 살아가는 것을 연기법(緣起法)이라고도 하고 대다라니(大陀羅尼)라고도

합니다. 相卽相入 되어 있는 緣起法界에서 모든 法은 自己의 모습이면서 相對의 모습으로 함께 삶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緣起의 大陀羅尼法을 나타내는 말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곧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는 時空을 超越해 있는 우리 삶을 나타내며 그 곳에서의 온갖 是非分別을 떠난  寂靜한 삶을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因緣의 만남에 依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잠시라도 結定된 自己 모습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變하고 있으니 이를 無我, 無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無常의 궁극(窮極), 곧 變化의 끝은 時空의 길이를 갖지 않는 것,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이 없는 것, 變化 그 自體가 時空을 벗어나 있는 것으로 진여공성(眞如空性)이며 열반적정

(涅槃寂靜)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無常한 움직임이 오히려 日常의 움직임을 벗어나 있고, 움직임 밖에 있는 것이 오히려

日常의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곧 잠시라도 固定된 時空으로 자취를 남기지 않는 無我, 無常의 緣起法이야말로

眞正한 變化며 움직임이며, 이 變化가 바로 涅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 무상(無常)과 불변(不變), 부동(不動)과 동(動)은 손바닥의 앞뒤와 같은 것이 아니라,

完全히 같은 모습이 되고 있습니다. 때문에 無常이 적정(寂靜)이고, 無我가 해탈(解脫)인 것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삶의 眞正한 모습인 연기실상(緣起實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모든 法이란 相卽과 相入, 무아(無我)와 적멸(寂滅), 無常과 不動의 統一된 場에서의 모든 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無常과 無我는 日常에서 나타나는 主觀과 客觀, 움직임과 고요함을 否定함이 아니라 삶의 本來 모습을 말합니다. 無我, 無常의 本來 모습에서 보면 모든 法이 움직임이 없이 本來 고요함입니다.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이는 움직임과 相對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움직임과 고요함 밖에 있으면서 움직임과 고요함을 나타내고 있는 根本 모습을 不動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앞서 말한 不生不滅에서 生과 滅이 同時이기 때문에 생상(生相)이나 멸상(滅相)으로 봐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면서 고요하며, 고요하면서 움직임이 實相의 本來 모습이기 때문에 동상(動相)과 정상(靜相)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동정(動靜)이 동시(同時)이면서 움직임으로 고요함으로 나툴 뿐입니다. 動靜이 全切로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嚴密히 말하면 부동(不動)이라고도 적(寂)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不生不滅, 不動不靜이

지금 여기 우리 모습입니다. 이를 '本來 고요함(本來寂)'이라고 합니다.
 
時空 속의 움직임만을 無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不動不靜의 無常한 모습이 고요한 우리이며,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고요히 한다고 하는 말은 움직이는 마음을 고요함으로 돌이키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동상(動相)과 정상(靜相)을 쫒는 마음이 움직이는 마음이며, 이 動相 靜相이 없는 마음이 고요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그쳐 고요함 속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마음이 더 큰 움직임이라고 信心銘에서 말씀하십니다.
 
生滅, 動靜을 全切的으로 사는 것, 다시 말하면 制限된 時空을 쫒는 업상(業相)을 떠난 것이 고요한 삶입니다.

법성(法性)으로 圓融하게 사는 것이 不動이며 本來寂입니다. 이 本來寂은 修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들 本來 모습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깃발인 三法印에서의 無常, 無我, 寂靜涅槃을 말하고 있습니다.
無常, 無我가 涅槃寂靜의 자리이기 때문에 '본래(本來)'라고 합니다. 만일 修行을 通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새롭게 생기는 것이지 本來가 아닙니다. 
 
無常, 無我, 涅槃寂靜은 새롭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無常, 無我, 涅槃寂靜이 아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멸(生滅)이 함께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동정(動靜)이 함께하는 부동부정(不動不靜)의

연기중도(緣起中道)의 삶으로 圓融한 모습이 바로 우리 삶의 本來 모습입니다


 
http://cafe.daum.net/dongcheonsa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성게 전문 독송  (0) 2014.10.11
法性圓融無二相  (0) 2014.10.11
無名無相絶一切  (0) 2014.10.11
證智所知非餘境  (0) 2014.10.11
眞性甚深極微妙  (0) 2014.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