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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2강 1부

장백산-1 2014. 12. 11. 03:34

 

 

 

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2강 1부 (~25:00)|영상법문 녹취록

 

예. 오늘 날씨가 너무 좋네요. 완전히 그 구름한점 없는 파아란 가을 하늘인데요.

가을 나들이 가셔야 되는데..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우리 법성게 의상조사 법성게 강의를 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이제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하는 부분까지 했었습니다.
법의 성품은 원융해서 두 가지 모양이 아니다.제법부동 본래적 그래서 '일체 모든 법은 부동해서 그 움직임이 없고

본래부터 아주 적적하다 고요하다' 하는 부분이었구요.

 

오늘은 이제 무명무상 절일체(無名無相 絶一切), 증지소지 비여경(證智所知 非餘境).
이름도 없고 상도 없고 일체가 끊어져서 증득해서 안 바이지 다른 경계가 아니다. 하는 이런 부분입니다.
무명무상 절일체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일체가 다 끊어졌다.인제 이런 표현인데요.
아.. 이름도 없다. 본래 이름이란 건 우리가 인제 사물을 이해할 때 사물을 우리가 우리식대로 알아들을 때 

入力을 할 때 우리 머릿속에 입력을 할 때 이름을 부여해서 입력하지 않습니까?
컴퓨터도 뭐 저장을 하려면 이름을 지정해 주어야지만 탁 저장이 돼서 저장된걸 꺼내오듯이
우리도 머릿속에 입력을 할 때 이름을 부여해서 입력을 한단 말이죠.

그리고 그 이름은 特定한 모양과 함께 저장이 됩니다.

사과다! 사과라는 이름이 내 머릿속에 기억이 되는 동시에 사과라는 이미지가 우리 안에 탁 들어와서

기억되어 저장되는것이지요.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파악할 때 이 우주법계를 파악할 때
눈으로 뭔가 보는 대상, 귀로 들리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 입으로 맡는 맛, 촉감, 의식의 대상 이 모든게 마찬가진데 이 모든 것들을 보고 나서 그것을 이름과 모양으로써 딱 기억을 합니다. 우리가 뭔가 안다 그럴땐 그 이름과 모양으로 아는거죠 어린 아이들 보면 어린 아이들 보면 인제 젤 먼저 배우는게 그거잖습니까?
응애응애하고 태어나서 처음에 배울때 모양 같은걸 보여주고 사과 사과 이렇게 하고 아니면 그림책 같은것도 그렇잖아요. 자동차며 비행기며 그려놓고 그걸 가지고 뭐라고 뭐라고 이름을 자꾸 비행기 사과 알려줘야 아는것처럼.

이름과 눈으로는 모양을 기억하게 하고  소리로는 이름을 불러준단 말이죠.
이름과 모양을 통해서 그것을 알도록 한단 말이죠
이런식으로 우리가 우리의 앓음알이가 이런식으로 만들어진단 말입니다.

 

그런데 本來는 처음에 태어난 아이 같은 경우에는
이 세상 모든걸 이름과 모양으로 기억하지 못하니까 뭘로 기억하겠습니까?
그냥 뭐랄까 이 한바탕으로 기억한단 말입니다. 통으로 기억한단 말입니다.
이거다 저거다라는 槪念이 없단 말이죠. 분별이 없이 그냥 모든게 전부 하나지.
이건 뭐고 저건 뭐고, 이건 내편이고 니편이고도 없고, 좋고 나쁘고도 없고,

이건 나를 좋아하는거 같고 나를 싫어하는거 같고, 이게 크다 작다 이런 뭐 일체가 없단 말입니다.
분별해서 들어오지 않는단 말이죠.

 

그런데 인제 우리는 애석하게도 세상을 알아가면서 이 相과 이름 짓는 걸 배웁니다
이렇게 이름 짓고 모양 짓는걸 배우고 나서 다시 이제 우리가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것을 다시 打破하는 이 이름과 모양이 그대로 있으면서도 이름과 모양을 타파하는 이 공부를 해야한다는 거죠.
金剛經에서도 약견재상 비상이면 즉견여래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니 약견재상비상이면 즉견여래다 무릇 상이 있는 바 모든 것은 개시허망이란 말이죠.

모두 다 허망하다 그래서 만약에 모든 相을 볼 때 相이 相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보면 그것이 바로 여래를 즉시

보는거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보는것 상이라는것은 모든 다  허망하다.
우리 마음속에 맺혀진 모양 槪念 이미지 生覺 觀念 그런것들은 全部 다 實體가 아니라 虛妄한거란 말이죠.
相이라는것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槪念으로 우리가 머릿속에 만든거란 말이죠.
본래 그렇게 정해진것은 없는데 우리가 이름과 모양으로써 명(名) 상(相)으로써 그것을 탁 槪念 지은거에

불과한 것이죠. 本래부터 그렇게 定해져 있는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이건 그냥 우리가 죽비라는 이름으로 정해놨고 이렇게 나무에 이만큼을 비어있게 만들어놓으면
이건 죽비다! 라고 相을 짓는단 말이죠. 또 이런 소리가 나면 이건 죽비다 이런 相을 짓는다 말이에요.
이것은 수행하거나 명상할 때 쓰인다. 또 이걸 보면 좋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겠죠.
불교를 아주 싫어하는 이를테면 배타적인 타 종교인들이 있다 그러면 이것을 보면 안좋은 느낌을 가질수도 있겠죠.
어릴적부터 이런걸로 맨날 매맞고 컸던 애들 같으면 이것만 보면 아주 싫어할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이 죽비라는 이름과 죽비라는 모양은 特定한 相이 있지 않은거.
相이라는건 뭐냐면 이 物質的인 모양 이것도 相이라고 하지만
精神的으로 받아들인 槪念的인거 또한 相이란 겁니다.

 

相이란 것은 무엇이냐?
사랑 이러면 사랑이라는 相이 딱 定해지지 않진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사랑이란 것은 싫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남녀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고 

부모자식지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고  저마다 다른 槪念으로 이해된단 말입니다.
죽비도 다른 槪念으로 이해한단 말입니다.
이런거처럼 우리안에 맺혀져 있는 모든 相들 우리안에 기억되어져 있는 모든 이름과 모양 相이라는 것은

내가 내 식대로 끌어맞춘거에 불과하다. 그건 실체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공통적으로 마련한 相이 있죠.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相이 있고, 나만 가지고 있는 어떤 나의 특수적인 相이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이 만들어 놓은 相도 사실은 실체가 아니고 空虛하고

내가 만들어 놓은 모양 相도 실체가 아니라 空虛합니다.

相이라는 槪念에 절대적인 모양 가진게 있습니까?
어떤 槪念이 이건 절대 선이다 이건 절대 악이다라고 特定지어서 생각할 수 있을만한 그 어떤것이라도 있는가?
 

그 옛날에  어떤 스님은 木佛을 부처님 나무로 된 부처님을 장작으로 추울 때 때기도 했단 말이죠.
相으로 본다면은 相을 打破하는게 부처님 가르침이지, 相에 얽매이는게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모든 相을 打破하는거.
相을 타파하지 못하니까 그 相을 보고 좋다 싫다라는 分別이 일어나는 거에요.
아까 無二相이라고 했는데 두가지 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두가지 相으로 나눈단 말이죠.
두가지 相으로 나누는 이유가 生覺으로 나누는 이유가 이 相 때문입니다.
相을 槪念지어서 이해하게 되면 그 모양에 따라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가지로 나눌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相을 지어놓으면 그 相에 얽매이게 되고

特定한 相을 이것이 이것이다 이렇게 기억을 하게 되고

그것을 언제나 둘로 나누는 마음 作用 煩惱의 作用들 이런 것들을 가져옵니다.

하여간 相이라고 내가 저장해 놓은거 자체가 이 妄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럼 相을 여의고 相을 내려놓고 이게 뭡니까?

................................................................

................................................................

정답입니다.
아무말 하지 않는 침묵이 이럴땐 정답이죠.
이걸 뭐라고 입을 벌려서 얘기하는순간 相이 개입된거죠.
길다 해도 相이고, 나무다 이래도 相이고, 무슨 색깔이다 이렇게 해도 相이고

이걸 뭐라고 이름 붙임과 동시에 그럼과 동시에. 이름을 붙인것이 相을 붙여서 이해한 것이죠.
바로 지금 여러분이 한거처럼 그렇게 다른 對相을 바라 보시란 말이죠.
이 앞에 부처님이 계시는데 相을 딱 떼놓고 부처님을 잠시 한번 바라보세요.
解釋하지 않고 槪念짓지 않고 이름짓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란 말이죠.

뭡니까?
..................................................................

이번엔 이 시계를 한번 보세요. 이 시계를 槪念을 딱 빼고 이름과 모양을 싹 빼고.
이 시계를 보자마자 生覺이 일어났다? 生覺이 일어났습니까? 안일어났습니까?
아마도 生覺이 일어났을거에요. 시계가 옆으로 비스듬히 있네. 나의 쪽으로 나쪽으로 돼 있지 않구나.

이런 생각 정도는 일어났겠죠.

부처님 보고 상호가 원만하시구나 지지난 주엔가 부처님이 어둑어둑하더니 이제 불을 좀 갈았거든요.
부처님이 환해졌구나. 이런生覺을 할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봐도 그것을 보자마자  槪念이 싹 들어옵니다.
머릿속으로 槪念이 싹 들어오고 이름이 싹 들어와요. 그래서 연이어 分別심 二相, 둘로 나누는 맘이 딱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이것은 공부인의 자세가 아니란 말이죠.물론 그 말은 이렇게 얘기하니까 어떤 분들이 그러세요.
그럼 내가 회사 가서 바보가 되란 말이냐? 회사에서 부장님이 뭐 해오라고 하고 뭐 해오라고 하는데
이걸 탁 보고도 槪念이 이해가 안되고, 뭘 일을 해야 하는데 가도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고

아무 槪念도 짓지 않고 있으면 제가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렇게 하라는게 아니죠

 

이 부처님 가르침은 이름 다 짓고 槪念 다 지어도  지어도 지은 바가 없는 게 이 가르침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얻는다. 마음을 내지도 않는게 아니란 말이에요.
마음을 내지만 내가 이름 짓고 生覺한 相에 머물러 執着하지 않는다 라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平常時에 日常生活 속에서는 이름 짓고 개념 짓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개념 짓지 않으면 내 자식이 와도 내 자식이 와도 내가 좋을것 더 없죠?
남의 자식이 오나 내 자식이 오나 똑같은거죠. 성경을 보나 불경을 보나 개념을 따라가지 않으면  똑같은거죠.
뭐라고 말해도 어떤 단어를 말해도 그 다 똑같은 法을 眞理를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眞理 그 자체를 드러내는거죠.

 

 

무명무상 절일체 (無名無相 絶一切)
상과 명이라는것 개념과 이름이라는것을 딱 끊어서 일체가 끊어져 버리면 若見諸相非相이면 바로 卽見如來다.

이게 바로 우리가 공부해야 할 공부가 무엇인가 알려줍니다.여러분들이 명상을 하고 싶다 수행을 하고 싶다 그러면
하루중에도 딱 시간을 정해서 이분 명상도 좋고 삼분 명상도 좋고 한시간 앉아 있어도 좋습니다.
다만 억지로 두시간 세시간 네시간씩 앉아 있는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선방에 가도 오십분 정진하고 십분 이십분 삼십분 한시간씩 쉰단 말입니다.

경행을 한단 말입니다. 경행과 좌선이 이어지면서 한단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명상을 하느냐? 집안에 앉아있다 잠시 명상을 하겠다 티비를 끄고 앉아서 티비를 바라보며
名과 相을 탁 뻬고 티비를 보는 겁니다. 티비라는 개념을 짖지 않고 있는 그대로 티비를 바라보는거에요.
그리고 있는 그대로 이것이 들어온다 그러면 그 옆에 있는 다른 것들을
뭐 오디오가 되었든 화장품이 되었든 화장대가 되었든 거울이 되었든 액자가 되었든  농이 되었든

그 전에 한 번 평상시 보는거처럼 봐보세요. 그러면 화장품을 하나 하나 볼때마다
그 저 출가하신 인하스님 처음 출가할때 한 십년을 여자분이 결혼 안한 채로 십년을 직장생활하다

출가를 했단 말입니다.서울에서 일하면서 자취방에서 살았으니까
얼마나 이것저것 많이 이것저것 살림이 모였을거 아니에요.

 

출가하려고 친구들 불러서 하나하나 나눠주는데 그때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하나하나마다 전부 다 分別心이 들어가 있더랍니다. 화장품 나눠줄 때 이건 두번째 남자친구가 선물해 준 거고
이건 누가 쓰길래 너무 좋아보여서 내가 돈을 모으고 모아서 어렵게 어렵게 어디가서 산거고
이 향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향수였고 이 향수는 특별히 예를 들면.. 예를 들면입니다.. 그랬다는게 아니고
남자친구 만나러 갈 때만 쓰는거고 이를테면 이런 槪念들이 있을거 아니겠습니까?
처음 구입할 때 어떻게 구입했고 이건 첨에 내 손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고
이거에 딸린 온갖 槪念들 이미지들이 따라온단 말입니다.
우리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거 하나를 바라볼 때 가만히 따져보면 그거에 담긴 온갖 槪念과 標象과

온갖 이미지들이 다 떠오르는 겁니다.  그거에 담긴 槪念과 虛象이 다 딸려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스님 하는 얘기가 친구들한테 하나하나 나눠주면서 차마 손이 안떨어지더라는거죠.
특히니 내가  애정과 애착이 있던 것들은 더 주기가 어렵더라는 겁니다.

출가하면 어차피 의미가 없는건데 하나하나 내손으로 주다 보니까 하나하나 집착이 다 들어가 있더랍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이미지가 槪念이 다 따라 오더란거죠.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엇을 보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을 보더라도
그 사람을 딱 보는 순간 누구 닮았다 옛날에 내가 좋아하던 누구 닮았다
아이 재수없다. 그 사람이랑 헤어졌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죠.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을 닮아서 괜히 첫인상이 싫게 느껴질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깝깝하겠어요.
오죽했으면 뇌과학 하는 사람들이 이삼만개에서 오륙만개의 생각이 하루에도 일어난다 합니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오만가지 육만가지 생각이 일어난다 하니.
이거 딱 보자마자 지난 번에 이거 꼭 다리가 뿌러졌었는데 어떻게 이게 붙었지?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그때 불교 박람회 할 때 신도님들하고 불교 박람회 갔다가 보살님들이 사주신거구나
이런 生覺이 딱 연이어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것처럼 모든것은 볼 때마다 槪念이 일어납니다
이미지와 그 相이 탁 介入이 되어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습관이 되어서 그 이미지를 보는거에요.
이것을 보면서 이것을 있는 그 자체로 보는것이 아니라
이것에 담긴 이름 이것에 담긴 相 이것에 담긴 槪念 標象을 보는겁니다.

이것이 이건 그냥 하나의 이것일 뿐입니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걸 이미지 槪念으로 解釋해서 보느라고 여기에 이제 價値를 賦與 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 이것은 우리 부모님이 쓰시던 유품을 나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냥 똑같은 컵일 뿐인데 여기 더 애착이 가고 애정이 간단 말이에요.
내가 이건 어디에 가서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든거다 그럼 애정이 간단 말이에요 사람들이 저마다.

그것 자체의 가치란 건 없습니다. 그것 자체의 가치란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부처님이다. 이건 우리가 만든 相이자 槪念이지 이거 때려부순다 해서 여러분이 무슨 죄를 받겠습니까?
여러분이 부처님 相을 도끼로 갖다 부순들 죄를 받겠냔 말이에요. 죄받지 않습니다.
단 우리는 불교인이니까 불자니까 부처님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하고 우리가 따르는 부처님이니까 

어떻게 감히 부처님 相을 깨부술 수가 있느냐 이런 相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얘기 잘 들으세요. 그래도 된단건 아닙니다.
그런 相을 가지고 있죠

 

다리 아프신 분들 다리 앞으로 쭈욱 피세요. 그래도 아무도 다리를 안 핀단 말이에요.
펴도 됩니다. 진짜로. 절이라는 相이 있으니까, 절에서 내가 그렇게 할수가 있겠느냐?
그런 生覺을 한단 말입니다.모두 다 이와 같이 이미지 相 槪念을 가지고 世上을 살아간단 말입니다.

그럼  회사에 가서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槪念과 相이 탁 들어가 있어요.
직장상사에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식에게는 어떻게 대하는지
집에왔을 때 부모님으로서의 나였을 때와 아들로서의 나였을 때 아내로서 남편으로서의 나였을 때

직상상사로서의 나, 직장부하직원으로서의 나 그때그때마다 우리는 탁탁 槪念 모드가 바뀌지 않습니까?

 

그때그때  바로바로 필요한 어떤 役割을 한단 말이에요. 定해진 역할이 없단 말입니다.

定해진게 없으니까 그때 그때 역할따라 달리 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말은 뭐예요? 本來 定해진 相은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다만 우리가 槪念을 지어 놨을 뿐이다.
그래서 이 演習을 많이 하시면 좋습니다.무엇을 보든 그것을 槪念으로 價値 賦與해서 보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마음의  演習, 어디까지나 모든 것은 내가 만든 가치지 그거대로 정해진 가친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한번 집에 가서 해보세요
그러면 처음엔 하나하나 볼때마다 다 개념이 떠오르는데 이제는 개념이 떠오른다는걸 딱 알아차리고
槪念이 떠올랐구나 이걸 보니까 槪念이 떠오르고 있구나 알아차리면 그 槪念이 딱 내려집니다.

 

 

그것을 또 바라보는데 또 다른 개념이 올라와요.또 다른 개념이 올라올 때 또 알아차리고 바라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든 똑같습니다. 무엇을 보든 똑같겠죠.
티비를 보나 숟가락을 보나 자식을 보나 소파를 보나 무엇을 보나 다 똑같단 말입니다.
아무런 分別心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내 式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든 애착이나 집착이 가거나 좋아가지고 과도하게 집학하거나 싫어해서 과도하게 밀쳐내거나

이런 일들이 훨씬 적어지겠죠.

 

 

이 명상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담겨 있는 오만개 육만개의 생각이 하나하나 다 때려 부셔야지만

명상이 되는게 아닙니다. 남방불교에서 하고 있는 위빠사나라는 수행이 계속해서 24시간 지켜보는 겁니다.
지켜보면서 온갖 일어나는 妄想 온갖 일어나는 生覺 온갖 일어나는 妄想들을

이 相들을 전부다 지켜보면서 때려부수는 겁니다. 다 하나씩 타파하는거에요
그럴려면 아주 고난도의 집중도가 있어야 해요 언제나 24시간 늘 관찰하고 있어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쉽죠? 이게 쉽지 않단 말이에요. 쉽지 않습니다.

 

근데, 선불교의 방식은 또 어떤 방식이냐?
오만개 육만개나 되는 걸 어떻게 하루종일 다 관하고 있느냐 어떻게 다 관하고 쫒아가고 있느냐 도저히 불가능하다.
하나하나의 妄想을 다 일일이 깨는게 아니라 이 선불교의 방식은 화두 같은 것을 통해서 어떤 疑問을 통해서 
한방에 탁 치는 방식이란 말입니다. 한방에 끝내는 방식. 돈오적인 방식이죠. 점수적인 방식이 아니라.

 

 

이 두가지 수행을 왜 하는가? 그럼 수행이 필요가 없느냐?

물론 선불교에서는 수행이 필요없다 합니다. 선불교 방식은 수행이 필요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수행이 필요하냐 아니냐? 수행이 필요할 수도 있고 수행이 필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 가장 重要한 것은 뭐냐면요. 여러분 가장 중요한것은 이건 바로 뒤에 나오는데요. 같이 설명 드릴게요.

證智所知 非餘境 증득해서 아는 지혜일 뿐이지 깨달아서 아는거 뿐이지 다른 경계는 아니다.

이 무명무상 절일체라는 경계 상이라는게 딱 끊어져서 완전히 모든것이 딱 끊어진 경계
法性이라는 境界 '法性圓融無二相'이라는 境界 '諸法不動本來寂'이라는 이러한 깨달음의 境界
이러한 참性稟의 境界 그런 것은 깨달아야 알 뿐이지 다른 境界는 아니다. 달리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했다 해서 알고 공부해온 것들

알음알이로 '아하' 그 얘기구나 하고 이해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은 진짜 佛性을 法性을 보고

진짜 보고 진짜 깨달은게 아닙니다.  그건 그렇게 아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알음알이로 아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알음알이로 아는것은 전부 다 對相을 아는거지, 境界를 아는거지.

境界에 대한 알음알이일뿐이지 그것은 眞理 自體를 본게 아닙니다. 전체를 아는게 아니에요.
그저 진리를 봤느냐? 깨달았습니까? 이런 질문은 성립될 수가 없어요.
다들 봤다 하는 그 순간 봤다 하는 상이 생기는건데 알음알이가 개입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내가 진리를 봤다 내가 깨달았다 뭐 한소식했다 하면서
그런것을 무기 삼아 법을 설하고  이러는 그런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이런 사람들은 주로 다 외도일 확률이 높습니다.

 

거기에 너무 과도하게 기대어서 갔을 경우에 물론 방편으로 그렇게 표현할 순 있겠지만
선사스님들이 하듯이 방편으로 설명할 순 있겠지만 그 자리를 설명할 순 있겠지만. 방편으로.
그래서 깨달아 알뿐 다른 경계가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가 있느냐?
깨닫는데는 생각으로 깨닫는게 아니란 말이죠. 개념을 이해해서 깨닫는게 아닙니다.
개념을 이해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방법이 없단 말입니다. 방법이 없다 이렇게 표현을 한단 말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히말라야에 올라가는데는 방법이 있죠.
걸어올라갈 수도 있고 좋은 신발을 등산화를 사신고 올라갈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가서 똑 떨어질 수도 있고

무슨 차를 타고 올라 갔다가 다시 걸어갈 수도 있고  다양한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미 히말라야 정상에 올라가 있는 사람에게는 정상까지 갈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방법이 없어요. 이미 와 있는데. 이미 와 있는 사람에게 와 있지 않다고 스스로 착각할 뿐인데
스스로 錯覺하는 그 錯覺만 깨주면 되는거지 錯覺만 없애면 되는거지
다시 히말라야에 올라갈 방법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에는 方法이 없는거에요. 無門關이라고 하는 겁니다. 大道無門이라고 하는겁니다.
진짜 道는 큰 道는 門이 없습니다. 方法이 없습니다.그래서 굳이 방법이라고 설명한다면 불교에서는 뭐를 중시하냐면

發心이라고 하고 또는 菩提心이라고 합니다. 보리심은 보리가 깨달음이에요.

보리를 내고자 하는 마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 그게 發心입니다. 보리심.

우리가 할 수 있는, 굳이 수행이란 이름을 붙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유일한 공부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행 유일한 공부 불교공부 마음공부 이것은 發心입니다.

發心! 菩提心입니다. 發菩提心 이것밖에 없어요.
보리심을 일으키는것 즉, 내가 반드시 깨달아야겠다.
내가 眞理라는 거 이건 한번 알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