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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1강 |영상법문 녹취록

장백산-1 2014. 12. 11. 02:19

 

 

 

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1강   |영상법문 녹취록

 

네 반갑습니다!

 

1. 오늘부터는 의상조사 ‘법성게’, ‘화엄일승법계도’ 라고 하는, 의상조사 ‘법성게’에 대해서 말씀드릴까합니다.

이 ‘법성게’는 ‘華嚴經’의 思想을 含縮시켜놓은 210字로 신라시대 의상스님이 이렇게 함축시켜놓은 경전인데요,

‘화엄경’이라고 하면, 보통 어떻게, 이제 우리가 보통 ‘오십여판’ 같은 데서는 중국에서 만든 그 곳에서는 경전을

整理하면서 어떻게 정리를 했었냐 하면은, 처음에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자마자 그 깨달음에 그 온전한 깨달음의

가르침 그 自體를 있는 그대로 설을 했다고 그럽니다. 그야말로 깨달음의 境地 自體를 그대로 설한 거죠.

 

그렇다보니까 중생들이 알아듣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이해를 못했다. 그래서 안되겠구나 해서 다시 쉬운 것부터

方便說法으로 아주 쉬운 가르침인 ‘아함경니까야’ 같은 아주 쉬운 가르침부터 하나하나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깨달음을 얻자마자 바로 法을 설했던 그 깨달음의 세계, 잔해증해의 세계라 그러는데, 스스로 어떤

內的인 깨달음의 世界를 그대로 法을 설한, 加減없이, 方便없이 그대로 그냥 설했던 그 가르침이 ‘華嚴經’입니다.

그래서 그 ‘華嚴經’은 그야말로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의 世界를 그대로 설파해놓았다라고 할 정도의 아주 大乘經典의 어떤 최고봉에 있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이제 마지막에 다시금 華嚴의 思想을 根機가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 다시 설하게 됐다 하는데요, 그 정도로 이제 ‘화엄경’은 대승경전에서도 가장 그야말로 꽃 중에 꽃이고, 아주 그야말로 꽃으로 莊嚴되어있는 아주 그 아름다운 그런 경전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우리가 日常的인 意識으로, 어찌 生覺하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우리들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으로써는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각오를 하고 들어야 되요. 내가, 아! 이 ‘法性偈’를 한 번 내가 머리로 잘 이해를 해봐야 되겠다, 뭐 어느 정도는 머리로 이해는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길잡이가 되어있는, 뭐 그런 법문을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저 또한 뭐 어느 정도 그렇게 할 것인데, 그것이 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誤算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듣기는 듣되, 듣기는 듣되 머리로 알음알이로 헤아려서, 내가 지금 ‘法性偈’에 대해서, 華嚴思想에 대해서 듣는 이 가르침이 ‘화엄경’의 전부구나! 부처님가르침의 핵심이구나! 야! 나도 이 정도는 이해하고 있구나! 이렇게

하면 벌써 팔만사천에 어긋난다. 이건 전혀 부처님가르침과는 아무 相關이 없는 겁니다. 왜 그런가하면 우리가

머릿속으로 이해되는 모든 것들을 ‘識’이라 그럽니다. ‘識’, ‘認識되어지는 것’, ‘알음알이’, ‘分別心’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 眞理는 알음알이의 對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認識의 對相이 아닙니다 法은, 眞理는. 法, 眞理는 헤아림(思量分別)의 對相이 아닙니다. 헤아림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2. 나중에 이제 차차 그 말씀은 조금 더 드리기로 하고요. 그래서 화엄경의 법성게 가르침을 공부는 하지만,

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데, 그러면 왜 가르치느냐?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을 왜 가르치느냐?

法을 있는 그대로 설하게 되었을 때, 꽉 막히고 모른단 말이죠. 꽉 막히고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工夫해나갈 수 있는 길을 수많은 禪僧들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은 이미 드러나 있다 完全히 드러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 있다.

말을 하고, 밥을 먹고, 길을 걷고, 눈을 뜨고 世上의 事物을 볼 수 있다면, 귀로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처(佛)를 보고 있고, 부처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처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알음알이 分別心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 生覺 妄想 分別心으로 理解할려고하는, 부처님법(佛法)을 生覺으로 理解할려고하는 그 모든 意圖들, 그 試圖들, 그런 알음알이 分別心이 眞理, 法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經典을 보거나 法門을 들을 때도 온전히 그 法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旣存에 배우고 익혀왔던 價値館, 固定觀念들을 堅固히 하는 作業만을 主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해서, 들어서 이해되겠다 싶은 것은 쏙 받아들이고, 이건 맞구나 받아들이고, 내가 이해 안 되는 것들은 이건 아니야 라고 生覺한단 말입니다. 옛날 10년 前에 읽었던 책을 다시 되짚어보면 그 때는 그 글이 있는지도 몰랐던 內容들이 뒤늦게 발견되지 않습니까? 내 意識의 水準이 올라가면 전혀 다른 것들이 귀에 들리고 눈으로 보여지고 하는 것처럼 眞理, 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 法, 眞理를 알음알이 分別心 思量分別識으로 헤아려 보려고 해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法을 탁! 듣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모를뿐, ‘오직 모를뿐인’, 崇山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모를 뿐’ 그리고 ‘이 法을 깨닫는 方法도 없다’ 그런단 말이죠. 중국 선사스님들에 의하면 法, 眞理는 언제나

完全히 드러나 있는데, 다른 어떤 法이 있을 수가 없다. 100% 이렇게 드러나 있는 法, 眞理인데 그 法, 眞理 거기에 무슨 方法이 있나? 方法이 있으려면 내가 가야될 길이 있고, 가는 方法이 있을 때 그 方法이 필요한 것인데,

깨달음이라는 저 뭔가가 있고 내가 그곳을 向해 달려가면 이 方法이 필요하죠. 자동차로도 갈 수 있고, 버스로도 갈 수 있고 , 빠른 길도 있고, 천천히 가는 길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法, 眞理는 깨달음의 對相,境界가 아니란 말이죠. 바깥에 있는 어떤 特定한 對相이라서 우리가 달려가서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 그런 對相이 境界가 眞理, 法이 아니고, 언제나 100% 完全하게 드러나 있고 언제나 우리가 眞理, 法과 함께 있기 때문에 對相化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認識의 알음알이 對相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眞理 法 이것은 따로 가는 方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럽니다. 그러면 方法이 필요 없으면 어떻게 우리가 이 法, 眞理를 깨닫습니까?

3. 옛날에 육조스님 혜능스님도 그랬고, 마조스님도 그랬고, 이 禪師스님들 全部가 했던 말씀이,

修行해서 眞理, 法을 깨닫는다? 이건 둘로 나누는 法이다! 二法일 뿐이다! 조금 있으면 나오는데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둘로 나눠지는 이 마음(二法) 가지고는, 알음알이 分別心을 가지고는 알음알이를 헤아릴 수 있을 뿐이지

眞理를 法을 헤아릴 수는 없다 思量分別할 수 없다. 方法이 없는데 그럼 무엇이 方法이냐? 그야말로 마음속에

간절한 이 眞理, 法을 工夫해야 되겠다는, 이 眞理, 法을 깨달아야 되겠다는, 이 工夫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工夫를 반드시 해야되겠다하는 간절한 發心이 서야 된다는 말이죠. 모든 게 마찬가지입니다.

이 간절한 發心만 서있으면, 공부든, 무엇이든 나를 끌고 갑니다 그 간절한 發心이.

 

여러분 生覺에는 돈이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 같고, 주변상황이 나를 어떻게 좋게 만들어 줄 것 같고, 이렇게 生覺하지만 결코 그런 건 하나도 없습니다. 이 世上에 내가 生覺해왔던 내 바깥에 있는 어떤  絶對的인 무언가는 없습니다. 내가 누구한테 잘 보이면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좀 잘 봐주겠지. 그런 건 없다는 말이죠. 이 世上 모든 것 그건

다 虛妄한 分別心일 뿐인 마음에서 드러나는 것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이 世上, 삶이라는 것은 마음의 作用이 드러나는 것일뿐이지 마음 바깥에 獨者的인 뭔가가 있지 않다. 그래서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에 따라서 마음이 나를

끌고 가는 겁니다. 언제든, 무엇이든. 부자가 되게 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거고, 돈을 벌게 하는 것도 마음이하는 것이고, 깨닫게 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것이고, 모든 것은 다 마음이 하는 것이지 마음 以外의 다른 것이 하지 않는다.

心外無物!!!

 

쉽게 말해서, 스님들의 표현에 의하면 ‘修行이 나를 깨닫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럽니다. 근데 그러면 수행 열심히

하는 사람은 빨리 깨닫지 않습니까? 그건 수행 열심히 하는 사람은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겠어요. 간절한 마음이다

보니까 절도하고, 참선도하고 뭔가 열심히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간절한 마음이 하나의 方便입니다. 하나의 表現입니다. 修行은 반드시 必要한 것은 아니고 반드시 특정한 수행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절만을 해야만 한다거나 坐禪만이 올바른 수행이라거나 念佛만이 훌륭한 修行이라거나 그렇지 않다. 

 

우리 조계종이 왜 조계종이에요? 육조혜능스님이 법을 편 곳이 조계라는 마을입니다. 육조혜능스님이 조계종의

가장, 그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물 아니겠습니까? 그 육조혜능스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이 말이. 修行이라는 건

必要가 없다! 간절한 發心을 通해서 우린 法에 가까이 갈 수가 있다. 修行해서 깨닫는다는 妄想을 버려라. 그 전까지 修行해서만 깨닫게 된다고 生覺했던 그 妄想을 다 非判을 했단 말이죠. 그것이 祖師禪이라고 얘기했단 말이죠.

 

이런 얘기를 또 차차 더 하기로 하고. 그래서 간절한 發心을 가지게 되는데, 卽, 法을 보고 眞理를 깨닫고 싶은 마음을 가졌어요. 근데 이제 앞으로 法性偈 공부를 하다가보면 모릅니다. 머리로 어느 정도는 이해를 하는데 이해가 다가

아니란 말이죠. 確然해지지가 않는단 말이죠.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確實하게 알 수가 없어요. 모르다보면

모르는 얘기를 자꾸 하는데 나는 계속 모른단 말이죠. 근데 안다, 안다. 야! 재밌구나! 야! 이 법성게 이렇게 재밌는

거구나! 이렇게 알기 시작하면 사실은 작은 工夫입니다. 그것도 뭐 工夫가 아닌 건 아니지만 그것이 인연의 씨앗을

심어서 그것이 나중에는 결국에는 꽉 막히는 그 공부가 되니까. 그러나 그 공부가 전부가 아니고, 여러분들을 이제

安心시키는 거예요. 이게 너무 어려워도, 이해가 안 되어도, 그것에 막혀가지고 답답해서 난 도저히 모르니까 法門

못 듣겠다 하지 말고, 꽉~막혀서 아무것도 모를 때, 그 때가 工夫가 잘되고 있는 때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알겠구나 할 때는 모를 때란 말이죠. 진짜 알 때가 아니다. 그러니까 꽉~막히고 모르겠다 할 때 그 때가 공부 잘 되는 때구나

하는 것을 알고, 이제 이 공부를 시작해보겠는데요.

4. 義相스님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상스님이 원효스님과 함께 중국으로 공부를, 불교공부를 하러가죠.

가다가 의상스님은 넘어가시고 원효스님은 다시 해골물을 드시고 되돌아오시지 않습니까? 그러고 의상스님이

중국에 가서 중국 화엄종의 화엄경을 중심으로 法을 펴는 종단인 화엄종의 二祖인 지엄스님 문하에서 화엄경을

공부를 했습니다. 8~10년 정도 이렇게 공부를 했는데 아주 뛰어난 제자였다 그래요. 공부를 하고 그야말로 아주

그 많은 공부를 했는데, 어느 날 꿈에서, 꿈속에서 신인이 나타나서 깨달은 바를 저술해서 남에게 알려라하는 어떤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승께 고했더니, 스승께서 ‘그럼 너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글로 한번 남겨봐라.’

그래서 스님이 좍 풀어서 쓴 거죠. 쓴 것이 처음에는 요렇게 요약된 것이 아니었다고 해요. 대승장 10권으로 편집

했다 그러는데요, 그러니까 조금 방대했겠죠.

 

그랬더니 나중에 스승님이 이것을 보고는 번잡한 것을 없애고 다시 좀 추려보자 해서 다시 만든 것이 ‘立義乘縣’이라는 그런 제목으로 또 다시 편집을 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갔더니, 스승인 지엄스님과 의상스님 두 분이서 부처님 전에 가서 祈禱를 드리고 이 글을 올리면서, 불을 태우면서 이것을 태울테니 여기서 쭉정이가 될 만한 번거로운 어떤 글들은 전부 다 타버려도 좋고, 여기서 타지 않고 남아있는 글을 요지로 삼겠다하고 태웠는데 나중에 찾아보니까, 이 210字가 타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210字를 가지고 의상스님께서 다시 조합해서 게송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이 ‘법성게’라는 게송이 만들어진 의미인 것입니다.

 

근데 이런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뭐 제가 그때 태어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라는 것은 그만큼 放大한 華嚴經을 이 열권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을 또 좀 추리고 추려서 다시 만들고, 거기서 또 추리고

추려서 그야말로 핵심 중에 핵심만을, 가장 아주 액기스만을 뽑아낸, 아주 팔만대장경의 어떤 핵심이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겠죠. 그래서 이 210字를 가지고 의상조사 法性偈 華嚴一乘法界圖를 만들었더니 스승인 지엄스님이 경탄을 하면서 나는 32개의 海印을 그렸는데 그대는 한 개의 海印으로 다하였구나. 그대의 海印은 總諦가 되고 내가 만든 海印은 別個가 된다라고 아주 찬탄을 하셨다 그럽니다.

 

그래서 이렇게 210字의 偈頌으로 華嚴經을, 그야말로 핵심만을 설해놓은 法性偈가 이제 나왔습니다. 요정도로

줄이고 법성게 본문으로 들어가겠는데요, 아! 여러분들 법요집 있으시죠?  법요집에 의상조사법성게가 나와

있습니다. 참고를 해주시면 되겠고, 참고 안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하루에 많은 양을 나갈 게 아니기 때문에,

탁! 들으면 그냥 아십니다.

5. ‘法性圓融無二相’ 이것이 그 첫 번째 게송인데요, 이 부분을 많은 스님들은 그 現示證分이라고 해서

그야말로 깨달음을 증득한 부분을 그대로 現示해놓은, 그야말로 드러내놓은 부분이다라고 말합니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까지인데요, 우선 ‘법성원융무이상’부터 보면,

우선 ‘법성’, ‘법성’은 원융해서 ‘무이상’, ‘두 개의 상이 아니다,’ 이 얘긴데요, 이 ‘법성’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되는데요, 이 ‘법성’이 뭔지 알려면 ‘法’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불교에서는 ‘法’이라는 用語를 두 가지 意味로 주로 씁니다. 첫 번째는 ‘法’은 ‘存在’라는 의미로 쓰여요.

‘諸法無我’ 이러면, ‘모든 存在는 실체가 있지 않다’ 이렇게 해석이 되죠. ‘三法印’ 이러면 ‘세 가지 眞理의 도장’,

이렇게 쓰입니다. 다시 말해서 ‘法’은 存在라는 의미로 첫 번째로 쓰이고, 두 번째는 ‘眞理’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러니까 頭頭萬物 一切 萬有가 다 法이라는 말이죠. 너도 法이고, 나도 法이고, 생물도 살아있는 존재도 法이고,

눈 앞에 드러나 있는 모든 存在가 全部 다 法이다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存在라는 의미의 法, 뭐

우리말로 하면은 ‘어떤 것’, ‘것’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거죠. 그래서 이 모든 存在를 法이라고 말하고.

 

또 한 가지 의미는 眞理를 法이라고 말하는데, 存在와 眞理 이 두 가지가 事實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根源인 眞理가 드러난 것이 바로 法, 存在입니다. 이 眞理가 모든 存在의 모습, 法으로써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말이죠. 眞理가 죽비의 모습, 法으로 드러나 있고, 뜰 앞에 잣나무라는 法으로 드러나 있고, 나의 모습 여러분의 모습이라는 法으로 드러나 있고 바람의 모습으로, 구름의 모습으로, 모든 모습의 法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眞理가 모든 것, 法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바로 이 世上이다.

 

그래서 불교는 이 世上을  ‘世界’라고 부르지 않고 ‘法界’ 이렇게 부릅니다.

모든 存在의 世界, 法의 世界는 그대로 眞理의 世界이기 때문에 法界라고 부른다. 그래서 存在, 法은 곧 眞理입니다.

法界, 眞理의 世界를 ‘法華經’에서는 ‘諸法實相’이다. ‘모든 法, 모든 存在는 그것 自體로 實相이다.

그것 自體로 眞理의 참모습이다’ 이렇게 설했고, 禪에서는 ‘立處皆眞’이다, ‘내가 서있는 그곳이 바로 참眞理가

드러나 있는 곳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存在 自體가 그대로 眞理인 줄 알아야한다. 그런데 이 法性, 다시 말해서 ‘法性’하면 眞理의 性稟내지는,

모든 存在의 根源的인 性稟을 얘기합니다. 여러분의 本來的인 根源的 性稟, 性稟이 뭐냐? 이 森羅萬象 諸法의

本來 性稟이 무엇인가? 너와 나의 根源的인 本來性稟이 무엇인가? 참性稟이 뭐냐? 진짜가 뭐냐?

 

이 몸으로 드러난 것은 껍데기일 뿐 아닙니까?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잠시잠깐 백년도 안되는 세월, 잠깐동안

빌려 쓰고 도로 돌려주는 것밖엔 없지 않습니까?  精神, 마음, 느낌, 感情, 五蘊이 全部 다 皆空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라고 生覺하는 모든 것, 法/存在라고 生覺하는 모든 것, 我相 法相이 我空 法空이라고 했단 말입니다. 나도 空하고, 世上 이 宇宙法界도, 全部 다 空하다고 했단 말이죠. 나도 세상도 固定된 實體가 아니다! 텅~비었다!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텅~비었다면 도대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텅~비었다면 그 참性稟은 뭐냐? 진짜 나의 본모습은 뭐냐?

 

이렇게 이제 우리가 質問을 할 때부터 性稟이 뭐냐 이렇게 묻고, 묻는 그 性稟 그것을 法性이라고 부릅니다.

法性, 이 法性은 뭐 다르게 말한다면 佛性, 本來面目, 主人空, 참나, 本地風光등 명칭을 뭐라고 해도 상관없단 말이죠. 근데 法性을 선사스님들은 ‘뜰 앞에 잣나무’ 이렇게도 표현을 했어요. 뜰 앞에 잣나무는 하나의 事物이지 않습니까? 나무 하나이니까 事物이지 않습니까? 왜 그 事物을 가지고 眞理라고 말했느냐? 法性이라고 말했느냐? 本質이라고 말했느냐? ‘죽비다!’ 이렇게도 표현을 했단 말이죠. ‘바람이 부니 시원하구나!’ 이렇게도 얘기했단 말이죠. 

 

6. 法性, 眞理, 本質은 方便上으로 말로 표현은 하지만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뭔가가 아니다.

뜰 앞에 잣나무라는 事物로 표현은 했지만, 事物로 표현한 그 事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뜰앞에 잣나무라는

物의 本性, 法性에 內在되어있는 어떤 참性稟을 말한 것이란 말이죠. 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게 그 法性을

얘기했는데, 그러면 生覺에 그 法性이라는 뭔가가 있구나! 우리가 깨달을 것은 法性이구나! 眞理이구나! 法이구나!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죠. 法性, 眞理, 法 이걸 禪불교에서는 ‘마음(心)' 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을 깨닫는다.

道를 깨닫는다. 本來面目을 깨닫는다. 이렇게 표현을 했단 말이죠.

 

마음, 本來面目, 道 그걸 이제 法性이라고 이름하는데 우리가 法性을 깨닫는다 이렇게 말하니까 性稟을 봤느냐?

이런단 말이에요. ‘見性했다’ 이것은 ‘性稟을 보았다’. ‘法性을 보았다’ 이 소리입니다. 아! 이렇게 얘기하니까 이제

그야말로 초기불교에만 올인하는, 초기불교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초기불교에 너무 사로잡혀있는 사람들 일부는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禪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아트만이라는 어떤 實體가 없다고 말씀했는데, 나라는 自我, 實體的인 自我는 없다고 했는데, 참나라는 것은 없다고 했는데, 無我라고 했는데, 어떻게 초기불교에서는 참나가 없다고 하고 禪에서는 本來面目인 참나가 있다고 말하느냐? 그래서 禪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라고 까지 얘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  사람들은 禪불교 그야말로 禪師스님들이 써놓은 책조차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선사스님들이 다 얘기해놨으니까. 法性이라고 얘기하고, 本來面目이라고 얘기하고, 性稟을

보라고 얘기하지만 그러나 깨달아야할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世上 모든 것 100%가 全部 다 法性이라고 하면 거기 그것들 중에서 뭘 하나 붙잡아놓고 이것만이 法性이다라고 할 뭔가가 있겠습니까? 깨닫고 보면 法의 性稟을 딱 얻은 것이 아니고 얻을 바가 없다고 金剛經에도 나오잖아요?

本來 얻을 法이 없다! 한 法도 얻을 바가 없다! 선사스님들도 ‘本來無一物’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 뭔가가 있어서 그것을 내가 붙잡아야 되는 뭐라면 그건 對相일 뿐 境界일 뿐입니다. 알음알이로 認識되고,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뭔가라면 그것은 참眞理라고 할 수가 없다. 그건 法性偈라는 뭔가가 方便으로 法性이니, 本來面目이니, 참나니 하고 얘긴 했지만, 거기에 무언가 實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실체가 있다고 이해하면 그건 그냥 알음알이 分別 妄想일 뿐입니다. 깨닫고 보면 본래 아무 것도 없단 말이죠! 아무것도 없다! (本來無一物)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나 있다! 生覺을 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우리는 生覺을 하면 그 生覺에 끄달려가지 않습니까? 事物을 보면, 對相을 보면 對相에 끄달려 가잖아요?

좋으면 좋다고 해서 그 좋은 것에 사로잡혀서 집착하고, 싫으면 싫다고 해서 거부하고 싶고, 밀쳐내고 싶고,

미워하고  이렇게 對相에 마음이 끄달려 가지만, 탁! 法의 性稟, 참性稟을 보게되 면, 法을 分明히 알지만 必要할 때 生覺을 일으켜서 써먹지만 그 어떤 生覺 어떤 對相에도 어디에도 마음이 끌려다니지 않는단 말이죠. 탁! 보면 보는

사람을 본단 말이죠. 좋은지 나쁜지 물어보면, 좋다, 나쁘다 말도 한단 말이죠. 그렇지만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法의 性稟, 法性은 알음알이 生覺 妄想 分別心으로 理解할 수 있는 對相 境界가 아니다. 生覺으로 이해할 수 없다. 槪念으로는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觀念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 對相이 아니니까.

7. 그래서 여기 法性偈에서는 法性을 뭐라고 했냐하면 法性은 圓融해서 無二相이다. 원융하고, 아주 둥글고 圓滿해서 아주 융합 融通自在해서 ‘두 개의 相으로 나눌 수가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圓’, ‘둥글다’, ‘融’은 ‘화합하다’ 이러는데, 自己 屬性을 잃지 않으면서도 걸림 없이 아주 통합되고, 둥글고, 융합하고 이런다는 어떤 표현인데요. ‘圓’ 하면 ‘가득하고, 크고, 원만하다, 모나지 않고 평등하고 모순이 없다’ 그런 뜻이라고 하고, ‘融’은 ‘융합하다, 화합하다, 통하다, 걸림 없고, 장애 없이 화합하여 통한다’ 이런 意味라고 그래요. 원융하다, 융통자재하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단 말이에요. 어디 하나 모난 데 없고, 平等하지 않은 것이 없고, 융섭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그 원융한 모습이 어떤 것이냐 하면 無二相이다. 두 가지 相이 아니다. 이게 아주 重要한 얘기입니다. 이 法性偈를 보고 선사스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의상스님이 이렇게 210字로 탁! 액기스만을 뽑아놓았지만, 이것도 煩雜하다고.

 

그냥 法性圓融無二相하면 딱! 끝나는데 뭐 이렇게까지 풀어놓아 설명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 할 정도로,

한 마디法性圓融無二相에 모든 眞理가 딱! 含縮되어있다고 얘기합니다. 왜 그런가? 法의 性稟은 원융해서

두 가지 모양이 아니다. 이 말은 뭐냐하면 중생과 깨달은 자인 부처가 나뉘는 길목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중생들이 世上을 볼 때는 對相을 보고서 언제나 二相으로 봅니다. 두 가지 相으로 본단 말이죠.

이게 이제 二法이라 그래요. 둘로 나누는 法이다, 이랬단 말이죠.

근데 깨닫고 나면 두 가지 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圓融하게 본다는 말이죠.

 

 

우리 중생들은 世上을 두 가지로 봅니다. 긴 게 있으면 그걸 因緣으로 해서 짧은 게 있단 말이에요.

이 죽비를 딱! 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걸 길다! 혹은 짧다! 아니면 죽비다!라고 얘길 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봐도

우린 그걸 딱! 보고 뭔지 딱! 대번에 알잖아요. 대번에 안다는 말, 마음 自體가 二相입니다. 둘로 나누는 相이란

말이에요. 이것이 깁니까? 짧습니까? 하고 물으면 깁니다라고 대답한단 말이죠. 이것은 길다라는 말 自體는 벌써

二法이예요. 왜냐하면 짧은 거가 있어야 긴 게 있지 않습니까? 죽비가 전봇대 옆에 가면 짧고 이쑤시개 옆에 가면

긴데, 이걸 가지고 길다라고도 할 수 없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데 길다고 말했다라는 그 自體가 벌써 둘로 나뉘는

判斷 分別 妄想에 속아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 뿐이라는 말이죠.

 

절에 오니까 좋고, 교회 가니까 좀 그렇다. 그것도 둘로 나누는 마음입니다. 뭔가 槪念 지어졌다 하면은 이미 둘로

나뉜 마음입니다. 마음이 둘로, 셋으로, 넷으로, 다 쪼개진단 말이죠. 이걸 보고 컵이다! 이 안에 물이 담겼다!

그렇게 하면 여기 물이 담겼다라고 알려면, 알음알이, 分別心, 認識으로, 意識으로 알려면, 물과 물 아닌 것을 보고

分別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잖아요. 分別이라는 게 뭡니까? 나눌 ‘分’자, ‘나누어서 區別한다’ 이게 분별 아니겠어요? 둘로 나누는 마음, 이렇게 둘로 나누는 마음이 바로 分別心이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 마음에는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어요. 옳고 그른 게 있고, 善惡이 있고, 大小가 있고, 길고 짧은 게 있고, 잘난 거  못난 게 있고, 모든 對相을 볼 때,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對相을 본다 解釋해서 본다는 말입니다. 둘로 나누어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깨달음을 막는 唯一한 하나의 障壁이다. 유일한 分別 妄想이다.

 

8. 이 分別 妄想만 없으면 우린 그 자리에서 부처를 볼 수 있단 말입니다. 뭘 보든 그것을 부처로 보고, 무슨 소릴

듣던 그 소리를 부처로 들을 수 있고, 언제나 부처로  보고 들을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理由는 아주 오랜 세월,

오랜 億劫을 이어오면서 가져왔던 그 둘로 나누는 마음, 分別心 때문입니다. 그러니 둘로 나누기만하면 벌써 眞理와는 어긋날 수밖에 없다. 둘로 나눴을 때 어떤 問題가 생기느냐? 둘로 나누면 좋다, 나쁘다가 있다. 그러면 좋다 나쁘다가 있으니까 좋은 것에 집착해서 내껄로 만들려고 하고, 싫은 것은 미워하고 밀쳐내려고 하고, 거부할려고 하고, 싫은 것이 자꾸 가까이 오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貪心을 일으키고 좋아하는 것을 내껄로 더 가질려고 貪心을 일으키고, 싫어하는 것을 밀쳐내려고 瞋心을

일으킨단 말이죠. 근데 이렇게 좋다, 나쁘다라는 둘로 나누는, 쪼개는 마음 자체가 벌써 癡心이라는 말이예요. 

어리석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妄想 分別心이란 말이죠. 이게 貪瞋癡, 三毒心입니다. 그니까 貪心은 癡心에서,

둘로 나누는 癡心에서 좋은 걸 집착할려고 하는 貪心이 나오고,  싫은 걸 밀쳐낼려고하는 데서 瞋心이 나온다.

이거 하나가 뭐이겠습니다? 둘로 나누는 이거 하나에서 貪瞋癡, 三毒心이 나온단 말이에요. 부처님께서는

초기불교에서 열반이 뭐냐? 해탈이 뭐냐? 했을 때 貪瞋痴, 三毒心이 消滅된 마음의 狀態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탐진치, 삼독심이 나온 것이 바로 둘로 나누는 二法으로, 二分法으로 나누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좋은 걸로,

나쁜 걸로 나누니까 좋은 것에 집착해서 더 가지려고 집착해서 貪心을 내고, 더 가지려고 집착하는데 더 가져지지

않으니까 괴롭고, 내 껄로 만들고 싶은데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내껄로 만들고 싶고 내사람으로 만들고 싶은데, 내께 되지 않으니까 괴롭고 화가 나고 고통이 생긴단 말이죠. 괴로움이 생긴다. 싫은 거랑 함께 있기 싫은데 자꾸 그 싫은 것과 함께해야 되고, 싫은 사람과 함께 있어야 되고, 싫은 게 밀쳐내지지가 않고 자꾸 내 인생에 온단 말이에요.

 

병도 오고, 괴로운 일도 생기고, 나한테 욕하는 사람도 생기고, 자식들도 말도 안듣고, 성적도 안좋은 성적 가져오고, 남편도 뭐 별로 돈도 안벌어다 주고, 나한테 잘 해주지도 않고, 그런 좋아하지 않는 일이 자꾸 나에게 온단 말이에요. 거부하고 싶은데 자꾸 온단 말이죠. 그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이 둘로 나누는 마음 때문이고, 둘로 나누는 데서 오는, 좋은데 더 잡고 싶은데 잡지 못하는 마음, 밀쳐내고 싶은데 밀쳐내지지 않으니까 괴로운 마음, 이 두 가지가 괴로움의 實體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더 붙잡고 더 애착하고 더 가지려고 하는 마음, 이 마음이 實體면 가져도 되는데 固定된 實體가 아닌데도 固定된 實體인 줄 錯覺하고 더 가지려고 애쓴단 말이에요. 여기서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9. 그러면 이제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이 둘로 나누지 마라는 여기에 벌써 法이 다 나와 있다고 했는데, 이렇게 둘로

나누는 마음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잖아요. 그러니까 별로 맘에 안드는 사람이 와서 뭐라고, 뭐라고 말하면은 별로 귀담아 듣지 않고 좀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와서 얘기하면 더 귀담아 듣고 그런단 말이죠. 꼬마아이가 하는 말도 그 안에 진리가 담길 수 있는데 귀담아 듣지 않는단 말이죠. 그러니까 언제나 들어있는 眞理를 우리式대로 해석해서 듣기 때문에 眞理를 언제나 보지 못하는 겁니다. 내안에 있는 解釋 속에서만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머릿속에서 生覺 속에서 이 삶을 사는 거지 진짜 생생한 이 눈앞에 드러나 있는 이 생생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말이죠. 生覺 속의 世上만을 살아 왔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그러니까 A라는 사람을 보더라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을 내 生覺으로 解釋해서 分別한

生覺 속에서만의 그 사람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보고 있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실체가 아니에요. 法性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사람의 法性은 그 어떤 둘로 나뉘어질 수가 없어요. 좋다라고도 할 수 없고, 싫다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어떤 일도, 내 사업이 부도가 났든 뭔 일이 생겼든,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서울대를 못 갔든, 좋은 대학을 못 갔든, 내가 심지어는 교통사고가 났든,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나에게 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塞翁之馬라는 말처럼. 근데 우린 둘로 나누니깐 이건 좋은 일이다, 싫은 일이다라고 해석하니깐 괴로움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초기암 진단을 받았어요.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말기가 아니고 초기 때 딱! 봤으니까 하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재수가 없을려니까 하필이면 왜 암이 나에게 왔느냐 괴로워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니까 암이라는 그 자체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우린 모릅니다. 예전에 보면은 2기 암을 발견했던 분이 그 치료하고 나서, 한 십년 전에 2기암을 치료하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시는데, 더 먹는 것 조심하고 술, 담배 안하고, 더 아주 행복하게 사신단 말이죠.

 

그러다 보니까 술 먹는 재미가 없으니까 이 분이 할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마음工夫에 재미를 들이신거예요. 뭘 해도 재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니까 뭔가 재밌는 게 없나? 술 먹는 것 말고. 재밌는 거 없나 하다가 찾은 게 맘공부 하는 걸 찾은 거죠. 그러니까 癌 걸렸다는 사실 그 자체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우린 알 수 없습니다. 癌은 사실은 諸法實相으로 왔다. 立處皆眞으로 왔다. 그것 自體가 眞理의 모습으로써 우리에게 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分別 妄想이 억울하다, 괴롭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그게 眞理로써 온 건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는데도 우린 마땅히 分別한단 말이에요. 나쁘다하고. 그러니까 괴로운 거죠. 괴롭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죠. 나중에 가면 진실이 드러날텐데. 그것 때문에 나는 더 건강하게 오래살 수도 있는데. 더 지혜로운 부처님법을 공부하게 될 수도 있는데.

 

10. 불교로 들어온 많은 사람들이, 멀쩡한 사람들이 불교에 잘 안 옵니다. 뭐 이렇게 얘기하면 좀, 좀 어패가 있는데, 쉽게 말해서 처음에 불교를 딱 접한 사람은 둘 중에 하납니다. 공부인연이 있는 사람들, 전생에 좀 닦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 그야말로 지혜의 씨앗들이 있는 분들은, 그런 여러분들은 20대, 10대 밖에 안 된 애들 중에 불교에 폭 빠져있는 친구들이 있어요. 폭 빠져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제가 진짜 웃기지도 않는데, 대학 1학년 때 일기장을 펼쳐봤더니, 진짜 유치해서 못봐주겠더라구요. 지금 봐도 제가 야! 뭔 제정신으로 이렇게 썼나 싶은데, 거기에 보면 제가 거의 성철스님 이상입니다. 제 일기장에 내 인생에 오직

수행밖에 없다. 이 수행 아니면 나는 안 된다. 오직 수행만이 이랬고, 그날 하루 기도를 빼먹고 수행을 못하잖아요?

그럼 그날 막 자책하는 글이 써 있고. 그 오토바이를 타고 제가 다녔었는데, 한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제가 가서 기도하는 절이 있었습니다. 그 추운 날, 막 벌, 벌, 벌 떨면서 가서 기도하고. 그러면서 진짜 이게 재미난 얘기하다 어쩌다 그런 얘기 한 번 쓸 수 있잖아요? 근데 일기장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그런 얘깁니다. 그걸 보고서 제가 야! 진짜 지가 뭘 안다고, 그 조그만 애가 뭘 안다고. 이런! 진짜! 어찌보면, 그 때, 지금 이 글을 보면서 뭔 생각이 드냐면, 완전히,

누가 남들이 나를, 그 때의 나를 봤으면 완전히 정말 꽉 막힌 놈으로 봤겠구나! 제가 봐도 융통성이 없는 겁니다.

그냥 꽉 막혀있는 거라. 이것만이, 이렇게 하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꽉 막혀있었다 그렇게.

 

그런데 사실은 20대에, 10대인 친구들도, 탁! 부처님 법문을 듣고 솔깃한 친구들이 있단 말이에요. 야! 이게 바로

眞理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佛法을 공부하구요, 또 한 가지는 逆境이나, 괴로움이나

정말 비참한 괴로움을 당했을 때,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心情으로 이제 절에 오는 사람들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주로 수능시험보기 직전에 많이 절에 오십니다.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49제 하려고도 오고. 그래가지고 인연맺는

분들도 많고. 또는 망했거나, 쫄딱 망했거나. 이래가지고 정말, 막 죽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 혹은 정신적으로 너무

괴로워서 찾아오시는 분들. 그런 분들도 계신단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괴로워서 오셨던 분들이 시간이 지나고나서 불법을 공부하고 나서, 탁! 털어내버렸어요. 그 분들이

대부분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그 때 그 괴로운 일이 없었다면 나는 이 좋은 法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일이 참된 眞理로써 나에게 온 건데, 부처님께서 계속 힌트를 줬단 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젊은 친구들한테도, 군에 있는 장병들이 법당에 한 번씩 초코파이 먹으로 왔다가 法門들을 機會를 줬는데, 그걸 듣고 솔깃해야 되는데 솔깃 안했단 말이죠. 어디 저 산에 산행을 갔는데 거기 절이 있었고, 마침 스님 법문하는 걸 들었는데, 그걸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획! 지나갔단 말이죠. 친구들이랑 절에 한 번 가볼까 했는데, 안갔단 말이에요. 이렇게 부처님, 眞理는 계속해서 힌트를 던져주고 있는데 本人이 無視하고 살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眞理는 어떻게든 이 친구를 돕고 싶은 거예요. 어떻게든 佛法을 가르쳐주고 싶은 거죠. 근데 그냥

고스란히 불법을 전해주니까 안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안되겠구나!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 이 친구를 도와야겠다 해서 1기암을 보내주거나, 사업의 부도를 보내주거나, 안좋은 일을 보내줄 수도 있단 말이죠. 이를테면. 그걸 契期로 딱! 내가 공부해야 되겠구나! 이런 맘을 내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 같은 경우, 그래서 그런 인연이 됐을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럼 그게 좋은 건지 안좋은 건지 어떻게 우리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언제나 우릴

돕기 위한 眞理의 目的으로 온 것인데 내가 그렇지 않다라고 알음알이 分別心으로 나쁘게 解釋했을 뿐인 것이지

그냥 眞理로 왔단 말이죠.

 

11. 그러면 無二相, 둘로 나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

眞理를 깨닫는 것은 사실은 苦行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벌써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아니라고

폐기처분한 거예요. 근데 지금까지 고행을 통해서 깨달을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스님은 무조건 열 시간, 스무 시간, 하루, 이틀씩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있어야지만 깨닫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셔요. 야! 고작 한 두 시간 앉아가지고 되겠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삼천 배, 만 배를 해야만 된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치열하게 뭔가 수행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탁! 호궤합장으로 금강경을 7독을 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아야지만 된다. 이래 생각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죠. 2500년 전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벌써 그건 아니다. 苦行主義는 아니다. 참된 法이 아니다. 이미 벌써 끝난 얘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씀을 여러분들은 이제 ‘衆生隨器得利益’ 할 겁니다. 자신들의 그릇대로 받아 간단 말이에요. 하늘에선 법비가 내리고 있는데, ‘雨寶益生滿虛空’, 이 虛空에 법비가 내리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깜량만큼만 받아갑니다. 내가 마음을 연 만큼만 받아갑니다. 내가 부처님가르침에 마음을 활짝 열고 있었느냐, 아니면 내 알음알이로 아직까지도 分別하고 있느냐, 내 알음알이로 分別하는 사람은 내가 이해한만큼만

消化됩니다. 이해한 만큼만 가져가요.

 

여러분! 제가 주구장창 계속 지속적으로 작년부터 계속하는 얘긴데, 그 얘기를 여러분들이, 아! 또 그 얘기를 시작했구나! 하고 귀를 딱! 막아요. 맨날 똑같은 얘기 또 시작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그건 뭐냐 하면 알음알이 分別心으로, 理解로 지금 하고자하는 이 말을 理解했기 때문에 그건 알음알이 分別心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알음알이로만

이해가 되요. 그러니까 그것은 참된 이해가 결코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 말은 眞理를 깨달을 수 있는 秘法이

담겨있는 말입니다. 비법이라해서 뭐 그렇긴 한데, 즉 이것은 바로 수행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마음상태가 탁!

變하는. 여러분! 性稟 보는 게 뭐예요? 수많은 스님들이 깨달았을  때, 뭡니까? 부처님도 새벽별 반짝하는 걸 보고, 탁! 깨달았고, ‘누구야?’ 하고 이름 부를 때, ‘예!’ 하다가 탁! 깨닫고, 벽돌을 닦다가 깨닫고, ‘뜰 앞에 잣나무다’

했는데 깨달았지, 누가 수행하다 깨달았다는 사람 봤습니까? 자살하고 있다가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 있습니까?

12. 어떤 境界, 境界에서 딱! 깨닫는단 말이죠.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깨달음은, 意識이 갑자기 그 瞬間 탁! 뒤바뀌는 거예요. 알음알이가, 딱! 멈춰지면서. 알음알이로 해석하면서 들으면 안 된단 말이죠. 즉 내가 이 얘기를, 아! 그 얘기? 나 다 아는 거야! 이렇게 들으면 벌써 공부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숭산스님께서는 ‘오직 모를 뿐’ 하고 들으라.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다 아는 얘긴데, 제가 또 해야 되는데, 이걸 오늘은 안다고 生覺하지 말고 들어보란 말이죠. 아까 말씀드렸어요. 二相으로 나눈단 말입니다. 法性圓融無二相인데도 불구하고, 둘로 나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둘로 나눈단 말이에요. 좋은 것 싫은 것 나눈단 말이에요. 좋은 건 더 집착해서 내껄로 만들려고 하니까

괴로운 마음이 생겨요. 싫은 건 거부하고, 밀쳐내고 싶은데 안 밀쳐내지니까 화가 난단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간단합니다. 無二相, 둘로 나누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둘로 나누지 않음을 실천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실천되겠어요?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고 解釋 分別하지 않고, 좋은 거라고 해서 더

집착해서 사로잡히지 않고, 빠져있지 않고, 그걸 붙잡으려 애쓰지 않고, 애착하고 집착해서 내껄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으면 되지않습니까? 싫은 것이 왔더라도 그것이 싫은지 안 싫은지 우린 알 수가 없잖아요. 모를 뿐이지 않습니까?

그게 진짜 나를 도우려고 왔는지 안도우려고 왔는지 우린 알 수 없단 말이죠. 그 ‘모른다’ 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됩니다. 교만하게 내가 다 알아. 나는 法을 알아, 나는 삶을 알아. 안다는 생각을 가지는 건 교만한 겁니다.

 

‘모른다’ 라는 마음으로 싫은 경계가 왔더라도 싫다고 해석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고, 밀쳐내려고 하지 않고, 버리려고 하지 않고, 화내지 않는단 말이죠. 그건 뭐겠습니까? 어떤 境界가 오더라도 처음에 일어나는 마음, 둘로 나누는

마음, 좋다고 집착하려고 하는 마음, 싫다고 거부하려고하는 마음, 이 두 가지를 탁! 멈춰버리는 겁니다. 둘로 나누는 애초의 그 마음의 싹을 딱!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좋다 나쁘다 분별자체를 하지 않고 보는 겁니다. 그건 뭐겠습니까? 일어나는 모든 것을 許容한다는 말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얘깁니다.

受容한다는 얘기예요. 受容하고 받아들이고 許容한다라는 말은 解釋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요.

 

제가 그래서 요즘에 수용해라 받아들여라하니까 어떤 분들이, 아! 이걸 내가 이렇게 받아들여야 되겠구나. 보통

받아들일 때는 뭐 이렇게 막 손을 내밀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행동을 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허용하는 건 어때요? 허용하는 건 뭐 손을 내밀어서 받는 게 아니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그냥 가만있으면 그게 許容입니다. 수용하라니까 허용하려고 막 애쓴단 말이에요. 수용하려고 애쓴단 말이에요. 애쓰는 건 工夫가 아닙니다. 이 공부가 아니에요. 애써서 하는 건 工夫가 아닙니다. 無爲法이라 그러잖아요 眞理는 無爲法이다. 물론 애쓰는 方便도 필요합니다.

처음에 공부할 때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애쓰는 方便도 필요한데, 진짜 공부는 애쓰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좋다고 生覺해서 좋은 것 붙잡으려는 마음은 애쓰는 거죠. 有爲法입니다 作意的인 거예요. 싫다고 해서

싫다고 解釋하고 밀쳐내려고 하는 마음도 애쓰는 겁니다. 힘이 들어요. 힘을 들이는 일입니다. 근데 이 無爲法,

있는 그대로 許容하는 것은 좋다고 할 것도 없고 싫다고 解釋할 것도 없어요. 일단 解釋 안 해도 되니까 좋습니다.

여러분! 제 法門을 들을 때 한마디도 놓치지 말아야지 귀를 쫑긋해서 막 온 신경을 기울여 들으면 오히려 잘 안

들려요. 그냥 生覺 않고, 解釋하지 않고 그냥 마음을 탁! 놓고 듣는 겁니다.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法門을 들을 때 自動的으로 머릿속으로 解釋하는 게 作動을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아! 그 얘기가 그 얘기구나!

아 그 얘기가 華嚴經에 나오는 무슨 얘기겠구나! 아! 그 얘기가 지분에 나오는 무슨 얘기겠구나! 이렇게 解釋을

한단 말이에요. 그렇게 解釋을 하면 그 얘기가 그 얘기로밖에 안들립니다. 근데 그 얘기는 그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그 이해는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13. 예를 들어, 양자물리학이나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요 空이라는 것을 細胞를 쪼개고 쪼개면 여기 안에 더 이상

어떤 알갱이라는 粒子같은 건 없다. 그런 식으로만 딱! 解釋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解釋을 하냐면, 아!

그것이 空이구나. 아하! 실제 알갱이가 없는 그것이 空이구나. 이렇게 이해를 制限한단 말이에요. 空이란 이해는

그것에 限定된 게 아닙니다. 굳이 이해를 시키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方便도 쓴 거지 그게 空의 진짜 이름이라고, 진짜  해석이라고 錯覺하면 안 된단 말이죠. 그게 진짜 空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해로써 아! 이건 이것이구나 解釋하면 그걸 뛰어넘는 이해를 하는데 오랜 歲月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걸 내 알음알이로 이해하면

안된다. 그래서 어떤 境界가 왔을 때 이걸 해보는 겁니다. 여러분이 수행자라면, 수행자이려고 한다면,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이 佛法은 둘로 나누지 않는 法입니다. 無分別. 分別 差別하지마라. 分別하지 말라는 것 아니겠어요?

왜 分別하지 말아야 합니까? 空이니까, 텅~빈 虛空, 空한 거니까, 分別할 게 없으니까 以無所得故다.

 

本來 얻을 바가 없으니까. 한 法도 얻을 바가 없는데 거기서 뭘 붙잡으려고 둘로 나누겠습니까? 붙잡겠다하면 붙잡는 내가 있고 붙잡을 對相이 있잖아요? 對相이 있고 내가 있으니까 둘로 나누는 겁니다. 내가 뭘 봤다 이래도 보는 내가 있고 보여지는 對相이 있구나! 둘로 나누는 겁니다. 生覺을 움직였다하면 둘로 나누는 거예요. 過去를 떠올린다! 이것 둘로 나누는 겁니다. 過去가 있고 現在가 있다는 것, 둘로 나누는 거잖습니까? 過去는 없습니다. 生覺 속에서만 過去가 있어요. 生覺 속에서만 時間이라는 것이 있을 뿐이지 本來 時間은 없습니다. 妄想을 일으켰을 때만 虛妄한 時間이라는 觀念, 幻想을 우리가 創造해내는 것 일뿐이지. 그냥 지금 이 자리밖에 없어요. 지금 이 자리 이것밖에 없단 말이죠. 그래서 현각스님같은 분은 그냥 오직 이 하나밖에 없다. 이 한 개의 법밖에 없다, 이랬단 말이죠. 이 하나밖에 없다. 佛性, 法性, 自性佛, 本來面目등의 말을 쓰니까 그 말 거기에 뭔가가 있나보다 하고 그걸 잡으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表現을 안하고, ‘이거다!’ 이랬단 말이에요. 이거다! 이 하나밖에 없다, 이랬단 말이에요.

 

이 한 法뿐이다. 이 하나의 마음밖에 없다, 이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원효스님은 ‘一心’이라고 ‘한 마음'이라고 했고, 한마음 선원에서는 또 ‘한 마음'이다 하던데, 그냥 ‘한마음'이다 이러면 아! 마음에 뭔가가 아! 이 안에 하나의 마음이 있구나! 또 이렇게 生覺하니까 第一 좋은 게, 제가 생각하기에 第一 좋은 게 禪師스님들이 했던 方便입니다. 그냥

‘이거다’ 하는 거예요. 이거다!  이 하나다! 온 宇宙가 그야말로 둘이 아닌 이거 하나란 말이에요.

 

꿈속에서 보면 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이나, 먹는 거나, 말하는 거나, 다 다른 겁니까? 다 똑같은 꿈이지. 꿈속에서

말한 들, 듣는 들, 먹는 들, 바깥에 나무가 있든, 비행기를 타고 어딜 가든, 그것이 둘입니까? 그냥 꿈속에서 일어난

하나이지 한 마음, 一心이지. 그 하나밖에 없는 거지 둘로 나뉘는 게 뭐가 있겠어요? 다 똑같은 하나지.

그러니까 불교에서도 보는 것도 이거고, 듣는 것도 이거고, 말하는 것도 이거고, 뭐든지 이것밖에 없다.

이 法밖에 없다. 이 眞理밖에 없다. 우리는 둘로 쪼갤래야 쪼갤 수가 없다. 그렇게 표현을 했단 말이죠.

 

둘로 나눈 마음은 이것은 이미 벌써 우리가 마음 속에서 중생을 演習하고 있는 겁니다. 마음속에 중생을 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수행은 치열한, 뭐 수행, 참선 뭐 이것도 나쁘진 않습니다만. 왜냐하면 그걸

한다는 자체는 내가 벌써 그 法을 向해 간절히 마음을 내고 있고 그것을 보려고 하는 거니까. 좌선하고 마음을 觀察할 때 어떻게 하면 이게 공부가 되느냐. 마음을 觀察할 때 어떻게 하면 되느냐? 分別하지 않고 어떤 것도 붙잡지 않고, 無念이라 그랬단 말이죠. 無念. 無住, 無相 이랬단 말이에요. 無念 生覺을 일으키지도 않고, 無住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야아! 불성을 찾아야 되니까 불성만 찾으면 되겠다하고 마음을 내면 벌써 그건 佛性에 머무는 겁니다.

無住 어디에도 머물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無相, 어떤 相도 일으킬게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아무런 分別도

일으키지 않고,아무런 相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비춰보는, 그렇게 했을 때 工夫가 된단 말이죠.

14. 근데 그것만이 工夫다 生覺하면 그 生覺도 벌써 둘로 나누는 마음입니다. 그것만이 공부가 아닙니다. 삶 속에서 언제나 參禪입니다. 삶 그 自體가 參禪입니다. 누가 나한테 辱했어요. 그 瞬間이 참선하는 순간입니다. 이 辱한 것을 갖고 저놈이 나를 무시했구나, 욕했구나. 니가 나이가 몇인데 나한테 욕을 했지? 쟤가 나를 뭘로 봤기에 저러지? 이건 벌써 둘 셋으로 나누는 마음들을 계속 造作하는 겁니다. 그냥 소리가 났을 뿐인데 거기에 내가 화를 내도 되고 안내도 되고 그건 中立的인 하나의 狀況인데, 거기다 대고 내 意識 마음이 解釋하고 分別함으로써 내 마음이 끄달려 가서

괴로워했을 뿐이지 않습니까? 누가 나한테 辱하는 그 瞬間이 마음工夫의 瞬間이란 말이에요. 그냥 許容하는 겁니다. 내버려두는 거예요, 그냥. 그건 그 사람 사정이지. 이 세상에 있는 60억 인구가운데 한 명이 나를 욕한다는 게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러면 안됩니까? 그래도 되죠.

 

相對方이 나를 辱하고 判斷하는 건 그 사람 맘이지 내 맘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것까지 우리가 統制를 합니까? 내 맘도 내가 統制를 못하는데. 그 사람 맘을 어떻게 내가 統制를 하겠어요? 내 입도 내가 統制 못 하잖아요? 그래서 할 말, 안 할 말, 다 하지 않습니까? 할 生覺, 안 할 生覺, 다하고. 坐禪하려고 生覺을 統制 하려고 딱! 앉아있어도 안되잖아요. 그럼 남들이 나를 辱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統制를 하겠습니까? 거기에 是非 거는 내 마음을 問題 삼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是非 거는 내 마음이 問題인거지 나한테 是非 거는 그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이가 많든 적든 아무 상관없단 말이에요. 거기에 내가 反應하는 내 마음이 問題죠. 내 마음이.

 

내 마음이 反應을 하는 건 왜 反應하겠어요? 저 새파랗게, 머리 새까만 놈이 나한테 덤비는 구나! 이렇게 마음이

反應한단 말이에요. 分別한단 말이에요. 나이가 많다, 적다. 너다, 나다. 이게 辱이다, 稱讚이다. 이렇게 다 둘로

나누는 二相으로 나누는 마음입니다. 이 二相이라는 건 곧 千差萬別로 나뉘는 세 개,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로 끊임없이 쪼개지는 마음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辱을 듣고 나서 分別하는 그 마음 속에서는 벌써 얼마나 많은 마음이 쪼개집니까? 너다 나다, 욕이다 칭찬이다라는 分別에서부터, 너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적으니에서 부터 시작해서 온갖 둘로 쪼개는 마음들이 妄想으로 피오올라서  나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나의 마음을 아주 꼼짝달싹 못하게 한단 말이에요.

 

그 어떤 경우엔 그 辱 한 마디 얻어먹고선 몇 날 몇 일을 괴로워합니다. 몇 박 몇 일을 괴로워합니다. 괴로워하다가

몇 박 몇 일 후에 한 生覺 딱! 돌이켜보니까 쯧! 야아! 걔가 뭔데 그 말 한 마디에 내가 몇 날 몇 일을 괴로워했나하고 놓여난단 말이죠. 누군가가 나한테 辱했을 때 거기에 反應한다라는 것은, 뭘 意味하냐면, 相對方에게 내가 힘을 실어준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 너는 힘 있는 사람이야! 너는 나를 휘두를 만큼! 너는 나를 휘정거리게 할 만큼 힘 있는 사람이야 하고 딱 힘을 실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그 사람한테 反應해서 괴로워하잖아요.

 

근데 그 사람이 힘없는 사람이면 우리 마음이 反應합니까? 어디 바보천치나 뭐 꼬마애들이 하는 얘기에 우리 마음은 그리 反應 안 한단 말이에요. 저 사람은 원래가 그냥 맨날 하는 게 욕인 바보들이 있어요. 정신 반쯤 나가서 아무나보면 막 욕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나한테 욕했다고 해서 우리 마음은  화내지 않습니다. TV에서 욕이 나왔다고 해서 그 욕 듣고 TV에 있는 그 사람한테 가서 막 때리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辱 그 自體에

우리 마음은 反應하지 않습니다. 反應할 수도 있고 反應 안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럼, 내 마음이 反應한 게 問題지. 반응함으로써 그 상대방에게 내 힘의 旣得權을, 내 힘을 그 사람에게 줘버린 게, 그건 내가 준거예요. 그 사람이 원래 힘을 가졌던 게 아니고.

 

이 세상 그 누구도 나에 대한 主導權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순 없습니다. 내가 그 힘을 그 주도권을

그 사람에게 줬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의 말에 휘둘릴 뿐이지. 그럼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욕을 듣고 그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음식을 차려놨는데도 그 욕 비난 음식을 안 받으면 내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안 받을 뿐이다. 안 받으면 내 것이 아니다. 안 받는다는 말이 그게 바로 分別하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그냥 내버려두겠다는 겁니다. 내 마음이 反應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마음에서 둘로 나눠서 좋다 나쁘다 反應하고, 어느 것 選擇하고 그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5. 이와 같이 내 삶에 登場하는 모든 것들을 許容하기만하면, 解釋 分別하지 않고 許容하기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許容하기만하면 許容하는 瞬間 그 동안은 계속해서 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圓融自在해집니다. 누구와도 싸우고 是非 붙으려고 하지 않아요. 누구랑 싸우고 是非 붙으려하고 하겠습니까? 圓融해서 둘로 나누지 않는 마음이고 ‘諸法不動本來寂’ 이라고 했단 말이죠. 諸法, 一切 모든 法은 不動, 움직인 적이 없어요. 本來부터 寂寂하고 고요했단 말입니다. 本來부터 寂寂하고 고요했어요.  諸法은 本來가 남들이 나한테 辱을 할 때나 안 할 때나 언제나 고요합니다. 相對方이 나를 辱했지만, 그건 그 사람이 辱한 걸 내 마음이 反應하니까 妄想으로 反應하니까 妄想으로 괴로울 뿐인 겁니다. 幻想으로 反應하고 幻想으로 괴로울 뿐입니다. 幻想으로 괴로움이라고 解釋하고 幻想으로 괴로움

속에 빠져서 幻相으로 괴로워하는 것뿐입니다.

 

내 妄想 妄念, 내 分別心 속에서. 내 마음 意識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幻想속에 스스로 빠진거죠.

한데 諸法은 本來 不動합니다. 움직인 바가 없어요. 本來부터 寂寂하고 고요합니다. 상대가 나한테 욕을 했어도

사실은 욕한 게 아닙니다. 고요합니다. 내 마음이 辱에 反應했을 뿐이지. 그건 그 사람이 辱한 게 아니에요.

本來 寂寂한데 내 마음 의식이 辱에 反應하니까 그게 問題가 되었던 것일 뿐이지. 우리가 둘로 나누는 마음만 없으면 언제나 그 자리는 不動해서 本來寂입니다. 움직이는 바도 없는 그 자리는 이미 寂寂한, 고요한, 단 한 번도 고요속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不動한 本來寂 자리다.

 

그래서 무엇이 일어나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마음을 고요히 거기에 反應하지 않고, 解釋하지 않고, 分別하지 않고,

그것을 對應할 수 있다면,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면, 意味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뜻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分別心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 다 하면서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요, 그게 바로

고요한 冥想입니다. 이걸 한 번 許容해보세요. 내가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모든 걸 許容해보겠다. 일어나는 걸

許容해보는 거예요. 그럼 우린 한 시간 동안, 우린 깊은 冥想에 잠기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瞬間에 許容의 힘이 커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냐면, 일어나는 족족 다 허용하는 겁니다.

그냥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허용하는 겁니다. 완전히 가슴이 확 열리게 되요. 어느 것 하나 닫아놓지 않으니까.

닫아놓지 않으니까. 眞理는 언제나 노크하고 있는데, 노크하는데 내가 選擇 分別해가지고 요것만 받아들이고

저 건 밀쳐내는 習慣을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許容하는 瞬間 이 모든 게 다 들어오기 시작한단 말이에요.

해석하지 않고 다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瞬間 갑자기 닫혔던 마음의 門이 확 열리면서 眞理 그 自體가 그냥

確然하게  確認이 될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眞理 그건 이 許容하는 瞬間 일어나는 일이지 뭐 가부좌 틀고

앉아가지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란 말이죠. 내가 이 習慣的인 分別心을 어느 瞬間  本來 텅~빈 바탕 마음자리에

탁! 놓아서 온전히 許容이 되느냐? 許容한다는 말은 分別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했어요. 分別하지 않는 그 마음

意識에 딱! 一致가 되느냐? 거기에 따라 眞理는 瞬間이 드러나는 거지 다른 것이 아니다.

16. 그래서 이번 주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에서 우리가 工夫해야 될 것은, 諸法은 本來 圓融해서 둘로

나눌 수가 없는데 우리의 마음 의식은 지금까지 계속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자꾸 쪼개니까, 쪼개는 걸 하지마라. 너다, 나다해서 ‘이 만큼은 내편, 이 사람은 내편 아니야’ 이것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한테 도움 되는 사람, 도움 안 되는 사람, 이것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꾸 둘로 나누는 마음만 탁! 내려놓으면 本來 諸法은 不動해서 本來 寂이라는 本來 고요했음이 드러나서, 아! 밥을 먹어도 고요하고, 풀 한 포기 속에 지극한 고요와 평화가 있구나! 노을을 한 번 바라볼 때도 깊은 고요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냥 풀 한 포기가 日常的이지 않게 느껴진단 말이에요.

커피 한 잔을 마시더라도 커피가 이렇게 올라가는, 그 香 올라가는 그 煙氣 하나가 아주 깊은 本來寂이라는 게 이것이구나. 分別하지 않고 봤을 때, 妙한 어떤 깊은 고요한 마음 의식 狀態가 됩니다.

 

제가 어느 날 문득 도시에서 누굴 만나기로해서 커피숍에 앉아서 커피를 한잔 시켜놨어요. 햇살이 창문으로 좍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너무 늦게 오는 거라. 너무 늦게 오겠다고 전화가 왔어요. 한참 기다려야 되는 거라.

아무것도 없고. 이렇게 앉아가지고 커피 잔을 이렇게 보고 있으면서, 이렇게 無心하게 밖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 瞬間  그냥 갑자기 걷고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렇게 뭐랄까? 뭔가 모르게 이렇게 달라요. 이 커피에서 올라오는 香, 연기 하나조차 아주 聖스럽게 느껴지고, 그것이 뭔가? 아! 禪이, 禪이 피어오르고 있구나! 내가 이렇게 앉아서 坐禪하는 것이 禪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가 禪이구나! 지금 이 자리가 고요한 자리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이렇게 確然하게 보이고 들리고 다 하지만 거기에 아무런 分別이 없는 그냥 보기만 하는 이 자리가, 바로 이

자리가, 바로 그 고요한 그 자리구나(本來寂)! 히말라야서나 지리산에서 그냥 단풍이 막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데, 바람이 확 불어서 후두둑 떨어지고 있는데, 정말 瞬間! 그냥 그 旬間! 그 山中에 아무도 없는, 그 혼자 길을 걷고 있는데, 그 瞬間  落葉이 떨어지지만 쨍하는 뭔가가 그 瞬間 그냥 번쩍하는... 이런 말에 속으면 안됩니다.

 

이게 그렇다고 해서 저는 쨍하고 번쩍 안하던데요 하고 이렇게 얘기할 필요는 없단 말이죠. 이건 하나의 표현에 불과한 겁니다. 그니까 妄想을 피우지 않고 分別하지 않고 그냥 보게 됐을 때, 수행할 때, 뭔가가 이렇게 탁! 알아지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냥 언제나. 왜냐하면 언제나 眞理는 本來寂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의 깨달음의 可能性은 언제나 열려 있단 말이죠, 언제나. 妄想만 피우지 않으면, 둘로 나누지만 않으면. 그래서 無心하게 뭔가를 바라볼 때, 無心하게 산길을 걸을 때, 無心하게 뭔가 노을을 바라볼 때, 너무나도 아름다운 겁니다. 여러분! 평소에는 퇴근길에 평소에 이렇게 노을을 바라봐도 별로 안 아름답잖아요? 日常일 때는 더 안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旅行 갔을 때는 어때요? 旅行地에 갔을 때, 강원도 속초나 히말라야 여행지에 갔을 때, 떠오르는 해나,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 정말 숨막히게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여행지에서는 日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일상에서 하는 수많은 妄想들이 많이 걷혀져요. 그러고 그 자리에서는 여행자의 목적이 뭡니까? 보는 것 아니에요. 여행자가 왜 여행자예요? 여행지에 있는 새로운 걸 보는 게 여행자잖아요. 여행자의 목적은 그냥 보는 거거든요. 그리고 여행지는 언제나 새롭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새로운 걸 새로운 시선으로 보게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행자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게 선명하고 더욱더 몇 백배 더 아름다운 겁니다. 어렵게, 어렵게 차를 타고 속초에 가서 해 뜨는 걸 보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저는 속초에 살 때요, 새벽예불을 하면 새벽예불 때 항상 거기에 바닷가에서 해가 뜨는 거예요. 그 자리에. 항상 속초 바닷가에 해가 뜨는 겁니다. 그러니까 별로 한 동안 있다 보니까 뭐 어쩌다 한번 왔을 때에 비해서 뭐 감흥이 별로 적죠.

 

근데 마음이 고요해질 때는 또 그게 언제나 또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단 말이죠. 그래서 한 生覺 탁! 놓아버리면

그 자리가 이 禪의 자리이고 그 자리가 不動 本來寂인 그 자리가 드러나서 뭘 보더라도 거기서 禪을 볼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에서도 놀라운 고요를 만날 수 있고 삶이 언제나 여행지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언제나 禪을 하는, 禪을

실천하는 자가 될 수가 있고, 언제나 休暇가 될 수가 있고, 하루하루 살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휴가고 여행지가

될 수가 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