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나이가 들면 無條件 老化가 進行된다라고 느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 科學的으로 證明이 됐습니다.
腦細胞도 끊임없이 再生이 可能하다는 말이지요. 과거엔 腦는 어느 瞬間부터 老衰가 된다고 여겼지만 現代의
腦科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腦가 늙는 것 또한 自身이 決定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印度에서는 ‘우리가 죽는 唯一한 理由는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라는 말이 있는데요,
우리가 죽음이나 老化에 對해서도 無條件 過去의 낡은 思考方式을 곧이 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반드시 한 100살쯤만 살다가 죽지 않고 더 이상 살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내 意識이 이 程度 나이 들면 늙어야 돼, 이 程度 나이 들면 죽어가야 돼 라고 굳게 믿고 있고,
그런데 이러한 個個人의 意識들이, 이 地球라는 全 人類의 集團意識으로서 굳어졌기 때문에
集團的인 共業으로써 地球生命 全切가 同意했기에 그런 結果가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런 결과도
절대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석가부처님께서도 열반하시기 직전에 아난에게
“내가 한 1劫 정도 더 살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 물어 보셨다고 합니다.
不治病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어떻게 불치병이 있을 수 있겠어요?
그 어떤 病도 나을 수 있는 可能性은 分明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아마도 意識이 바뀌면 可能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 意識을 못 바꾸는 겁니다.
過去의 生覺의 틀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던 意識을 결코 못 바꾸는 겁니다.
이 世上 모든 것을 意識이 마음이 짓고 마음 意識이 무너뜨리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不可能하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은 事實은 不可能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不可能하다고 스스로
規定한 것이거나, 이 世上과 함께 同調해서 規定한 것들일 뿐입니다. 우리의 能力은 나 自身이 制限하고
限定하는 만큼 그대로 制限되고 限定되는 것일 뿐입니다. 스스로 그 制限을 풀어내는 첫 번째 과제가 지난
過去의 記憶을 完全히 텅~비우는 겁니다. 容恕해주고, 懺悔함으로서 마음을 텅~비우는 겁니다. 그랬을 때,
過去가 나를 발목잡지 않고, 어떤 制限된 意識이 나를 발목잡지 않기 때문에 이 때 비로소 새롭게 始作할 수
있는 可能性이 열리는 겁니다. 새 삶이 열리는 겁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루와
아침 햇살을 맞을 수 있고, 반복되는 직장생활을 아주 새로운 마음으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 때는 그럴 수도 있었어. 네가 나빠서 그랬던 게 아니라 我相에서는, 또 그 때의 意識水準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어.” 하고 過去를 容恕하고 理解해 주는 것입니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나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나라는 게 없으니까 宇宙萬物이 無我 無我性이니까. 그냥 어떠한 現象이 거기서
그냥 펼쳐지고 벌어졌던 겁니다. 나라는 것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時空 속에서
어떤 한 因緣이 펼쳐지고 있었던 겁니다. 어떤 現象 일 그것을 나와 同一視 할 아무런 理由도 없는 것이죠.
이런 式으로 世上을 바라봄으로써, 차차, 意識이 깨어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意識이 깨어난다는 말이
뭘 意味하냐하면, 그동안 堅固하다고 느꼈던 것들, 確實하다고 느꼈던 것들, 진짜라고 느꼈던 것들이, 더
이상 견고하지도 확실하지도 않고, 진짜도 아니고, 텅~빈 空한 것으로 固定되고 不變하는 實體가 없구나
하는 事實을 깨닫는 瞬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過去를 定해진 무엇이라고 判斷하고 生覺하던 習性을
完全히 텅~비워서 내려놓는 겁니다. 이 世上에는 그 어떤 것도 미리 固定되어 定해진 것은 없기 때문이지요.
오직 어떤 것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인 波動하는 에너지정보場만이 있을 뿐입니다.
過去나 固定된 實體적 觀念에서 놓여나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면, 놀랍도록
전혀 새롭고도 눈부신 無限 可能性의 에너지波動이 우리 앞에서 춤추고 파도치기 시작할 것입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