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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別心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라 - 십팔계(2)

장백산-1 2015. 2. 1. 17:50

 

 

 

 

分別心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라 - 십팔계(2)  |붓다수업 교리강좌

법상 | 2015.02.01.  http://cafe.daum.net/truenature/KKTo/38       

 

 

 

 

 

 

 

분별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라

    

 

여러 사람이 똑같은 길을 걸어갔었을지라도 사람마다 그 거리에서 본 것은 諸各各 다를 수밖에 없다.

똑같은 소리를 듣고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며, 같은 음식의 香氣를 맡으면서도

냄새가 좋다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맛을 보면서도 그 맛은 서로가 다르기 마련이다.

 

이처럼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인 六內入處는 外部의 六境이라는 對相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認識하는

것이 아니라 自己式대로 걸러서 認識한다. 六內入處 自己 마음에 끌리는 것만을 認識하는 것이다. 六根이

六境을 認識할 때 六根을 ‘나’라고 生覺하는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인 六內入處가 생겨나기 때문에 그렇다.

六根을 ‘나’라고 生覺하기 때문에, 六境을 認識할 때 있는 그대로의 世上 對相을 認識하지 못하고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인六內入處 自身이 願하고 欲望하는 方式대로 六境을 解釋하고 認識해서 아는 것이다.

 

이와같이 ‘나’라고 生覺하는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 卽 我相이 새롭게 생겨나면 무엇을 認識하든지

이 ‘나’라고 하는 것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는 쪽으로 解釋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我執이고,

欲望이며 貪慾이다. 六內入處라는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에서 이처럼 我相과 我執, 欲望과 貪慾이 생겨난다.

그래서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六內入處 自己 方式대로, 自己 慾心대로 바깥 對相을 選別해서

差別하고 分別하고  認識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六境 對相 世上을 綜合的으로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意識을 六識이라 이름한다고 했다.

六識(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卽 마음은 언제나 六境 對相 世上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안다.

六識은 自身이 좋아하는 것들과 싫어하는 것들, 관심 가지는 것들과 관심 없는 것들, 六識에게 도움 되는

것과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알기 때문에, 똑같은 對相을 보더라도 우리의 識/意識은 

諸各各  六識 自己의 貪慾에 一致하는 것들만 分別하고 받아들여 認識해서 아는 것이다.

 

예를 들면, 똑같이 山行을 했는데, 建築業者는 나무의 쓰임새만 보며 산길을 걸을 것이고, 寫眞作家는

아름다운 風境을 寫眞에 담으려는 마음으로 산길을 볼 것이며, 꽃 연구가는 꽃에만 눈길이 갈 것이다.

또한 마음이 괴롭고 우울한 사람은 숲길 또한 음침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마음이 기쁨에 넘쳐 있는 사람은

생기로운 숲과 달콤한 공기, 맑은 자연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山行 以後에 各者가 본 것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各各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처럼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인 識이라는 分別心으로써 世上을 認識하게 되면, 六識 저마다 自己의

慾心과 貪慾이 願하는 것들을 基盤으로해서 對相인 名色을 認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生覺 마음

意識은 六境 對相 名色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認識하지 못하고 生覺 마음 意識 自己 式대로, 意識 自己가

意識 속에 만들어 놓은 對相 六外入處을 認識할 뿐인 것이다. 結局, 六識의 認識 作用 또한 幻影에 불과할

뿐이며, 또한 온전한 意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經典이나 法門들에서는 ‘分別心을 버려라’는

無分別의 가르침을 설파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認識으로 因해 世上을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歪曲해서 보는 것이다. 世上을 歪曲해서 볼 때, 十八界라는 歪曲된 自我觀(眼界 耳界 鼻界 舌界 身界 意界),  

世界觀(色界 聲界 香界 味界 觸界 法界), 認識觀(眼識界 耳識界 鼻識界 舌識界 身識界 意識界)에 빠지게 되고,

그로 因해서 온갖 分別, 判斷, 比較, 評價 등이 생겨나며, 그 結果  삶이 複雜해지고 괴롭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方式으로 우리 삶의 모든 고통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事實이 그렇다면 우리가 生覺하는 모든

괴로움은 事實 진짜 괴로움이 아니라 意識 自身이 괴로움이라고 分別, 歪曲 錯覺하여 認識한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일 뿐이다. 卽, 意識 自身 스스로 外部 對相 六境을 歪曲 分別 錯覺하고 認識해서 알고난 뒤 意識 自身 스스로 

意識 속에 만들어 놓은 그 歪曲 分別 錯覺한 認識을 對相으로해서 괴로움이라는 幻想을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意識 自身 內面에서 생겨난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의 장난인 幻影일 뿐인 것이다. 진짜 괴로울 일이

있어서 마음이 괴로웠던 것이 아니라, 虛妄하게 公然히 마음속에서 意識의 장난으로 造作해 낸 幻想 속의 가짜

괴로움을 가지고 그동안 감쪽같이 속아서 우리의 마음 意識은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眼界 耳界 鼻界 舌界 身界 意界)가 있고, 世上(色界 聲界 香界 味界 觸界 法界)이 있으며,

내가 世上의 일로 因해서 괴로웠다고 生覺(眼識界 耳識界 鼻識界 舌識界 身識界 意識界) 하며

世上을 怨望하거나 못난 나를 怨望하고 살았지만(苦), 사실 알고 보니 이 모든 일들이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의 장난에 지나지 않은 꿈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같은 것이다. 이 世上에 진짜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괴로워 할 ‘나’도 없고, 괴로움을 주는 ‘대상/세상/육경’도 없고, 괴롭다는 ‘生覺 意識’도 없고 단지 이 모두가

識의 장난일 뿐이었다! 意識 마음 生覺의 演劇놀음일 뿐이었다. 이 世上 모든 것이 事實은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일 뿐이다. 그래서 大乘佛敎의 唯識思想에서는 ‘오직 識일 뿐(萬法唯識)’이라고 역설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確實하게 해야 할 일은 있는 그대로의 現實을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인 六識이라는

我相에 基礎한 慾心 貪慾 어리석은 意識으로 造作 分別 歪曲 錯覺하고 認識해서 보던 方式에서 그저 單純히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變化시키는 것에 있다. 分別心으로 世上을 보지 않고

無分別心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말해,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인 六識이 ‘나’라고

生覺하는 錯覺에서 벗어나, 다만 그 어떤 것도 나라고 同一視하지 않는 純粹意識으로써 바라보면 것이다.

 

六識이 ‘나’라는 自己同一視가 없을 때, 我相과 我執과 貪慾이 사라지며, 그로 因해 나와 世界를 區分 짓는

分別心이 사라지면, 그런 方式으로 分別하고 認識해서 알던 錯覺하는 虛妄한 分別識 또한 사라지게 되고,

비로소 그 때 있는 그대로 如如하게 存在하고 있던 世上에 對해 아무런 是非 分別 比較 判斷 解釋도

介入시키지 않은 채로 그저 있는 그대로의 如如한 世上을 있는 그대로 透明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런 바라봄을

智慧라고 말하며, 唯識에서는 轉識得智라고, 錯覺하는 虛妄한 識을 智慧로 轉換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뒤에 八正道에서 언급하겠지만 이와 같이 世上을 分別心으로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으로 認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對相을 있는 그대로 認識하고 바라보는 意識을 정견(正見)이라고 말한다.

  

    

    

  

 

 

 

十八界를 觀하는 修行, 界分別觀(五蘊, 十二處, 十八界를 觀함)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선정 수행으로는 四念處가 있는데, 이 사념처 수행의 豫備的 수행으로 五停心觀이 있다.

오정심관은 貪欲, 忿怒, 어리석음, 我執, 分別이라는 다섯 가지 煩惱를 다스려 가라앉히는 수행법으로 부정관,

자비관, 인연관, 계분별관, 수식관을 말한다.

 

이 가운데 界分別觀은 我執 我慢이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수행법으로 十八界의 18가지를 觀함으로써 이 모든

것에 固定된 自我가 있는 것이 아니며(無我) 十八界는 끊임없이 變化하고 흐르는 것(無常)일 뿐임을 알아차리는

修行法이다. 이 十八界의 作用을  ‘나’라고 生覺하는 我慢과 無知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수행법인 것이다.

 

눈으로 對相을 볼 때 眼識이 일어난다. 이 때 十八界 중에 眼界, 色界, 眼識界, 意界, 法界, 意識界가 함께

作用을 일으키게 된다. 이 때 이 모든 界를 있는 그대로 觀察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눈으로 對相을 볼 때, 갑자기 눈동자가 커진다거나, 초점이 흐려진다거나, 게슴츠레 해 진다거나

하는 등등으로 對相에 따라 우리의 눈동자의 모습도 變化하는데 이것을 觀察하는 것이 眼界에 대한 觀察이다.

눈을 통해 보여지는 對相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 色界에 대한 觀察이며, 눈으로 對相을 볼 때 좋거나

나쁘다고 認識해서 보는 눈의 分別을 觀察하는 것이 眼識界에 대한 觀察이고, 그러면서 意界와 意識界는

들리고 냄새 맡아지고 맛보아지고 감촉이 느껴지는 등의 나머지 感覺活動의 도움을 받거나, 과거의 경험등을

떠올리면서 對相을 綜合的으로 比較 分別 判斷하면서 認識해서 아는 作用을 하는데 對한 觀察을 하는 것이다.

 

이런 方式으로 귀코혀몸뜻에서도 나와 對相, 그리고 認識作用 모두를 있는 그대로 觀察하는 것이

界分別觀의 修行法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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