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라는 착각, 인식주체라는 착각 - 십팔계(1) 붓다수업 교리강좌
3. 십팔계(十八界)
十二入處와 六識의 發生
위에서 六內入處는 外部에 있는 對相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自我意識을 介入시킨다고 했다. 내 안에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며 생각하는 固定된 實體의 내가 있다고 錯覺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卽, 十二入處에서 我相과 法相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이렇게 六內入處에서 內部의 感覺 및 知覺하는 機能과 活動하는 것을 보고 그 기능과 활동을 ‘나’라고 錯覺하는 我相이 생겨나고, 外部의 對相을 보고 그것을 ‘世界’라고 錯覺하는 法相이 생겨난다. 이런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이 생겨나고 보니까 自然스럽게 六內入處는 六外入處를 접촉해 보면서 육내입처라는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은 自己에게 도움이 되거나 이익이 되는 쪽으로 欲望心과 執着心을 일으킨다. 이것이 我相이 活動하는 것이다.
이처럼 十二入處는 ‘自我’와 ‘世界’를 固定 不變하는 나와 세상이라고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이다. 그런데 自我와 世上을 나누고, 나와 너를 나누는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인 이 十二入處에서 나와 세상을 나누고 分別하여 認識해서 아는 마음인 六識이 생겨난다. 十二入處를 因緣해서 六識이 생겨나는 것이다.
十二入處라는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에서는 自我意識이 생기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보고 싶고, 좋아하는 소리만 듣고 싶고, 좋아하는 향기와 음식을 맛보기를 願하게 된다. 反對로 싫어하는 것은 멀리하고 싶고, 싫은 소리는 듣기 싫어진다. 六內入處가 六外入處를 접촉하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分別心이 생겨나고, 六內入處 나에게 得이 되는지 失이 되는지를 計算하고 따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六識의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작용, 識別해서 아는 작용이다.
우리 意識이 무언가를 볼 때 보이는 對相에 대해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이 생기고, 들을 때 들리는 것에 대해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이 생기며,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 對相에 대해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對相을 識別하고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을 식(識)이라고 이름한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면서 分別하고 인식해서 아는 마음을 안식(眼識), 귀로 들리는 것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을 이식(耳識), 코에 냄새 맡아지는 것을 분별하고 인식해서 아는 마음을 비식(鼻識), 혀로 맛보아 지는 것을 分別해 認識해서 아는 마음을 설식(舌識), 몸으로 感觸되어지는 것을 分別해 認識해서 아는 마음을 신식(身識)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며, 이와 같은 다섯 가지 五識에서 들어오는 分別心들을 바탕으로해서 對相을 綜合的으로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을 의식(意識)이라고 이름지어 부른다.
이처럼 十二入處라는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이 생겨나면 十二入處라는 因緣 따라 六識이 緣起한다. 六識은 쉽게 말해 어떤 對相을 分別 識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이고, 對相을 認識하는 意識이며, 우리가 普通 ‘마음’이라고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初期佛敎에서는 심의식(心意識)을 이름은 다르지만 同意語로 보고 있으므로, 쉽게 생각하면 意와 識을 모두 ‘마음(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十二入處라는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에서 六識이 생겨나면, 이 十二入處와 六識을 因緣해서 十八界라는 새로운 계(界)가 발생한다. 여기서 界란 ‘境界를 나눈다’는 의미로, 같은 種類로 묶어 境界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卽, 十八界는 自我界 내지 主觀界로써의 眼界, 耳界, 鼻界, 舌界, 身界, 意界의 6가지와 對相界로써 色界, 聲界, 香界, 味界, 觸界, 法界의 6가지, 그리고 意識界로써 眼識界, 耳識界, 鼻識界, 舌識界, 身識界, 意識界의 6가지를 합친 18가지의 界를 말한다. 六根 또는 六內入處가 十八界에서는 內六界가 되고, 六境 또는 六外入處가 外六界가 되며, 새롭게 意識界인 6가지 意識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般若心經에서 無眼界 내지 無意識界는 바로 이 十八界의 첫 번째인 眼界도 없고, 나아가 十八界의 마지막인 意識界도 없다는 의미이다. 十八界가 모두 탕~비어서 空하다는 뜻이다. 卽, 十八界는 다만 宇宙法界의 因緣 따라서 일어났다가 宇宙法界의 因緣 따라서 흩어지는 것일 뿐, 固定된 實體로써 存在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分別해서 아는 認識의 主體라는 錯覺, 六識
이처럼 우리는 보통 六識을 ‘마음’이라고 理解하며, 이 六識은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意識을 말한다. 다시말해, 나라고 錯覺하는 六內入處라는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에서 六外入處라는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意識을 六識이라고 부른다. 나라고 錯覺하는 六內入處라는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이 六外入處라는 對相, 世上을 接觸하고 받아들여 認識하다 보니 내 안에 ‘마음’ 혹은 ‘의식’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錯覺하는 것이다.
눈으로 對相을 볼 때, 우리는 單純히 눈이 對相을 보는 것이라고 生覺하지 않고, 눈이라는 視覺器管을 通해서 우리의 마음이 보는 것이라고 生覺하는 것이다. 눈을 통해서 내 안에 實在하고 있는 ‘意識(마음)’이 世上, 對相을 보는 것이라고 錯覺하는 것이다. 눈이 對相을 볼 때, 눈으로 봐서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놈’이 있다고 여기게 되고, 바로 그 認識해서 아는 마음을 ‘식(識)’이라고 이름지어서 부른다.
눈이 對相을 볼 때 보는데 따른 分別과 認識이 생김으로써 내 안에 별개의 보는 主體인 ‘보는 놈(眼識)’이 있다고 여기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는 듣는 주체인 ‘듣는 놈(이식)’이 있다고 여기며, 맛보고 냄새 맡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할 때도 각각 그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識’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識을 나의 主體라고 錯覺하게 되는 것이다. 經典에서도 “어리석은 衆生들은 識을 ‘나 自身’이라고 錯覺하게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쉽게 말해, 意識하는 어떤 主體가 내 안에 存在하고 있으면서 눈이 對相을 볼 때는 보는 意識으로 나타나고, 귀로 들을 때는 듣는 意識이 되는 등, 眼耳鼻舌身意가 各各의 對相을 接觸할 때마다 그 ‘意識하는 놈’인 ‘識’이 눈으로도 귀로도 코로도 혀로도 몸으로도 뜻으로도 나타나면서 바깥 世上을 認識하는 主體가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내 안에 認識하는 主體인 ‘識’이 있다는 錯覺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 그 錯覺하는 意識의 認識活動을 眼界, 耳界, 鼻界, 舌界, 身界, 意界라고 이름하고, 認識의 對相을 色界, 聲界, 香界, 味界, 觸界, 法界라고 말하며, 바로 그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하는 意識의 主體를 眼識界, 耳識界, 鼻識界, 舌識界, 身識界, 意識界라고 이름함으로써 十八界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事實 六識이 일어나는 것은, 意識의 主體가 내 안에 진짜로 있어서 눈으로 볼 때 眼識界 등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十二入處라는 虛忘한 錯覺하는 意識으로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할 때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虛妄하게 생겼다가 사라지는 텅~빈 空한 것일 뿐인데도, 중생들은 어리석은 錯覺으로 因해 그것이 내 안에 있는 ‘識’이라는 實體로 여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識을 내 안에 靈魂처럼 生覺하면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持續되는 實體로 여기고, 나아가 죽고 난 다음에도 다음 生을 받는 永圓한 存在라는 주장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뒤에 있을 唯識思想은 이 識에 대한 연구를 통해 第7말나識과 第8아뢰야識까지 識을 說한 思想을 擴大시키고 있다.
이렇게 내 안에 對相을 分別하고 意識해서 아는 마음인 識이 있다는 六識이라는 分別心이 생기면, 내 바깥에는 여섯가지 意識의 對相인 이름(名)과 形態(色)를 가진 卽, 명색(名色)이 있다는 生覺이 만들어진다. 六識이라는 分別心이 對相을 이름을 지어 붙여 認識하고 形態로써 認識하게 되는 것이다. 六識의 이러한 對相을 經典에서는 名色이라고 부른다. 六根의 對相은 六境이지만, 六識의 對相은 名色인 것이다. 卽, 六根이라는 感覺機能, 感覺活動은 六境이라는 感覺 對相을 相應하지만, 六識이라는 分別하고 認識해서 對相을 아는 마음은 對相을 이름과 형태를 가진 것들로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것이다.
이 過程을 살펴보면, 뒤에서 살펴 볼 12緣起의 構造와도 連結되어 있다. 無明, 行, 識, 名色, 六入 등으로 이루어지는 12緣起의 過程이 바로 그것이다. 어리석음 卽, 無明으로 因해 六內入處를 나라고 여기고, 六外入處를 世上라고 여기는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이 생겨났고, 그러한 十二入處라는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이 생기는 過程에서 我相과 欲望, 貪欲이 생겨나게 됨으로써 我相에 基礎한, 利己心에 基礎한, 貪欲을 채우기 위한 행(行)이 시작된 것이다. 눈귀코혀몸뜻으로 各各의 對相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헤아리는 것 自體가 行이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行, 귀로 소리를 듣는 行,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접촉하며, 뜻으로 헤아리는 行을 하게 되면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눈으로 보는 意識, 귀로 소리를 듣는 意識 등의 六識이 있다는 錯覺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無明-行-識이 일어난 과정이다.
그렇게 내 안에 보고 듣고 맡보는 등 世上을 認識하는 ‘意識’이 있다는 錯覺이 생겨나다 보니 自然스럽게 내 안에는 ‘識’이 있고, 내 바깥에는 그 對相인 ‘名色’이 있다는 錯覺하는 虛妄한 生覺이 드는 것이다. 이처럼 無明-行-識-名色의 過程에 이어 循環過程으로써 六入이라는 錯覺, 觸이라는 錯覺, 受-愛-取-有-生-老死라는 12緣起의 循環構造가 이어지는 것이다. 나머지 대해서는 12緣起를 살펴볼 때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붓다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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