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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도 佛性도 輪廻도 없다 -- 十二處

장백산-1 2015. 1. 25. 20:09

 

 

 

 

神도 佛性도 輪廻도 없다 -- 十二處(3)|붓다수업 교리강좌

법상 || 2015.01.25.                                                       http://cafe.daum.net/truenature/KKTo/36 

  

 

 

 

마음(意入處)가 만들어낸 世上

      

淸淨한 六根으로 認識되는 世上은 괴로울 일이 없지만, 六根이 汚染되고 거기에 ‘나’라는 觀念이 介入되게 되면

六根에 對한 意識이 六內入處라는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으로 바뀌면서 괴로움이 생겨난다. 이것이 苦의 原因

이라고 했다. 緣起에서는 12緣起의 支分 중 하나인 六入(六內入處)가 왜 괴로움의 原因인지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면 六根이 汚染되면서 어떻게 六內入處의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으로 歪曲되는지를 살펴보자. 앞에서

眼耳鼻舌身 五根이 各各 自身의 對相인 色聲香味觸을 認識한 것을 가지고 意根(마음)은 綜合하여 사람, 동물,

과일, 산과 들 等의 森羅萬象으로 認識하여 알게되며, 나아가 행복, 질투, 고요, 기쁨 등의 精神的인 現象들 또한

 認識해서 알게된다고 했다. 意根의 認識은 物質的 精神的, 存在와 非存在 모든 것을 對相으로 知覺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意根의 活動을 살펴보면, 意根은 外部에 있는 것 그 自體를 있는 그대로 認識하는 것이 아니라,

外部에 있는 對相들을 五根의 도움을 받아 意根 自己 方式대로 認識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意根은 보는 意識 듣는 意識 냄새 맡는 意識 맛보는 意識 감촉을 느끼는 意識을 ‘나’라는 存在라고 錯覺함으로써

‘내가 實際로 있다’는 我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卽, 意根에 我相이 介入되어 意入處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場所에서 똑같은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사람마다 各者 그 場所에서 認識한 것이 다르고,

느낀 감정도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外部의 事物 그 自體를 認識한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의 意根 自己 方式대로

組合되고 綜合된 ‘意入處가 만들어 낸 虛構的 非實體的인 對相’을 認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意入處는 意入處 自己 方式대로 非實體的인 世上을 만들어 놓고, 自己가 만들어 낸 그 對相을 認識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의 意識이 認識하는 모든 對相은 外部에 獨立的으로 存在하는 對相 自體가 아니라, 우리 마음(意入處)가

만들어 낸 幻影에 불과함을 의미한다. 外部의 六境 또한 이처럼 내 바깥에 獨者的으로 存在하는 對相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幻想이며, 外部라고 여겨지고 있는 또 다른 內面의 意識 世界인 것이다. 이와 같이 實際

存在하는 것이 아닌,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幻影의 가짜 存在, 因緣假合의 存在를 存在라는 말 대신에 ‘法’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外部의 世界가 어떻게 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인가 하고 疑問을 가질 것이다.

外部에는 獨者的인 外部의 世界가 있고, 그 獨者的인 外部 世界를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認識할 뿐이라고

生覺할 것이다. 그러나 外部 世界가 진짜로 實體的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量子役學에서도 이 世上 萬物은

振動하는 에너지의 波動일 뿐이고, 固定되어 實體的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證明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모든

外部的인 對相들은 그것 自體의 固有한 性質을 가지지 않으며, 그것을 보는 이의 마음狀態에 따라서, 因緣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들일 뿐이다. 實在로 世上 萬物이 그런 狀態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그런 것을 보고자 意圖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이다. 어떤 마음에서 어떤 意圖로 보느냐에

따라서 無限한 可能性의 에너지 波動으로 이루어진 世上 萬物은 내가 意圖했던 그 마음대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事實은 나라고 錯覺하는 六根도 이 世上이라고 錯覺하는 六境도 다 내 마음이 內面의 마음에서

因緣假合으로 造作하여 만든 꿈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같은 것일 뿐이다.

 

만약에 내 마음 바깥에 固定 不變하는 實體로써의 世上이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본다면, 누가 보든간에 보이는

世上은 똑같아야 한다. 그러나 可視光線만을 볼 수 있는 人間의 眼根으로 보는 世上과 紫外線까지 볼 수 있는

물고기나 꿀벌이 보는 世上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우리 人間의 눈에는 똑같이 생긴 물고기들로 보이지만

물고기들은 紫外線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물고기마다의 紫外線의 얼룩무늬로 서로를 區分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뱀은 눈 아래 있는 골레이細胞라는 特殊한 神經細胞를 通해 赤外線을 感知한다고 하니, 赤外線을 感知하는

뱀이 보는 世上과 人間이 보는 世上이 같을 수가 없다. 또한 天眼이 열린 수행자라면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상신들의 세계나, 화엄성중의 세계, 영가들의 세계까지를 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에 世上이 定해진 하나의 모습으로 固定的 實體的으로 存在한다면, 이렇게 世上을 보는 者들에 따라서

世上이 각각 다르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世上이라는 것 自體가 定해진 實體가 아니며, 보는 者에

따라서 다르게 보여지는 것일 뿐이기에, 卽 보는 者의 마음에서 緣起한 世上일 뿐이기에 각각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 世上은 하나의 巨大한 에너지 波動이며 無限한 可能性의 에너지정보場일 뿐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具足되어 있고, 모든 可能性이 다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無限 可能性의 世上을 自己 意識 水準에서만, 自己라는 內的인 필터를 通해 걸러서 보고 있을

뿐이다. 卽, 마음(意入處)라는 制限되고 限定된,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을 通해서 六境이라는 世上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 世上은 보는 者의 마음에 따라서 無限히 다르게 보여질 수 있는 無限 可能性으로

存在하는 波動하는 에너지場이다. 그래서 六內入處라는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이 消滅되어 六根이 淸淨해지면,

깨달은 意識이 世上을 보는 것 처럼 肉眼만이 아닌 天眼, 慧眼, 法眼, 佛眼을 모두 具足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눈, 불안(佛眼)은 眼入處라는 虛妄한 分別하는 意識에 갇힌 意識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無限 可能性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깨달은 意識이다.

 

結論的으로 깨닫지 못한 우리의 意識으로 보는 世界는 있는 그대로의 世上이 아니다. 따라서 世上에 對해서

世上을 알았다고 말하는 그 瞬間, 事實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안 것이 아니라,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에게

理解된 世上, 나라고 錯覺하는 波動하는 에너지情報體인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에게 把握되어진 制限된 世上을

안 것에 불과하다. 量子役學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電子를 있는 그대로 觀察할 수는 없으며, 언제나 電子를

測定하는 觀察者나 觀察道具 等 觀察되어지는 條件과 상황에 依해서 影響을 받는다는 事實을 밝혀냈다.

이 事實은 모든 科學的 硏究 結果도 또한 아무리 客觀的이고 科學的인 硏究 結果라 할지라도, 事實은 特定된

條件과 狀況 속에서만의 眞實일 뿐이지 있는 그대로의 眞實은 아니라는 것이다.

 

結論的으로 ‘一切’란 六內入處와 六外入處를 합한 十二入處를 말할 뿐이다. 즉, 내 마음 意識에 感知되고,

認識되어진 것만을 一切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一切란 12入處이니 眼과 色, 耳와 聲, 鼻와 香, 舌과 味, 身과 觸, 意와 法이다. 만약 누군가가 고타마가 說한

이 一切 以外에 다른 一切를 說하겠다고 한다면, 그 말은 다만 말일 뿐, 물어봐도 알지 못하며 疑惑만 增加할

뿐이다. 왜냐하면 十二入處 以外의 다른 것은 認識의 對相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六內入處로써 直接 認識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槪念的으로만 있는 存在일 뿐 實在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말일 뿐이며, 끊임없는 논쟁만 만들어 낼 뿐이고, 의혹만 증가시킬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소득도 없다. 그것은 六內入處의 認識 對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도 불성도 윤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十二入處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바라문敎에서 말하고 있는 아트만이나 唯一神敎에서 말하는 하느님, 심지어 佛敎에서 말하는 佛性, 如來藏이라는 것 또한 사실은 十二入處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에, 다만 말뿐인 槪念的 對相일 뿐 ‘一切’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大乘佛敎에서는 方便으로 여래장, 불성, 주인공, 참나, 진아, 대아, 본래면목 등을 設定해 두고 있지만 事實 이 모든 말들은 어떤 말로 表現을 하든 十二入處, 一切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 이름들이 眼耳鼻舌身意에서 認識되지 못한 범부 중생들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없는 것이다.

實在的으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初期佛敎의 無我 思想은 그 어떤 것도 實在的으로 ‘있다’라고 規定하지 않는다. 이 無我, 緣起, 空 思想을

뒷받침하기 위한 敎理가 바로 初期佛敎의 모든 敎理들이고 이 十二入處의 敎理 또한 無我를 뒷받침하고 있다.

十二入處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불성, 본래면목, 여래장등 그 모든 말들은 다만 말이고 槪念일 뿐이지

實體的인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輪廻의 가르침 또한 十二入處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범부중생들에게는

實在로 있는 것이 아니다. 前生이나 來生이 있는가? 地獄이나 天上이 있을까? 알 수 없다.

十二入處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認識 主觀인 六內入處로 認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성, 여래장, 전생 내생, 지옥 천상 모두가 없는 것일까? 없다면 왜 經典에 등장하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서 中道의 實踐이 必要한 것이다. 그것들이 없다고 固執할 것도 없고, 있다고 固執할 것도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없다고 하지만 있고, 있다고 하지만 없다.

 

예를 들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주머니 속에 귀한 寶石(佛性)을 넣고 다녔지만 그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을 거지처럼 살다가 죽었다고 치자. 이 사람에게 寶石은 있었는가? 없었는가? 十二入處의 가르침에 의한다면

寶石이 있었다고 할 수 없다. 認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事實은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正答일까?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있다고 해도 틀렸고, 없다고 해도 틀렸다. 있다는 사실에만 집착해도 잘못이고,

없다는 사실에만 집착해도 잘못이다. 어떤 한 가지 生覺을 고집하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現實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니다. 있다는 말로도 없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言語道斷이며, 우리는 沈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觀點으로 보는 것이 바로 中道的 見解다. 당신에게 불성은 있는가 없는가? 沈默할 수 있을 뿐이다.

 

輪廻는 어떨까? 前生과 다음生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十二入處에서 본다면 輪廻는 없다. 내 意識에서

認識되고 感知되지 않기 때문이다. 思惟에 의해서 槪念的으로 알려진 말일 뿐이다. 卽 우리의 意識에서 輪廻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輪廻는 構體的인 現實이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輪廻에 대한 法은 설할 지언정 우리에게

輪廻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중생들에게 輪廻는 虛妄한 말 뿐인 것임을 알기 때문이며, 논쟁만 일어날 뿐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輪廻라는 槪念 또한 깨닫고 보면 한낱 꿈속의 일처럼 虛妄한

의식의 장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輪廻를 무수히 했을지라도 그 輪廻의 삶 자체도 非實體的인 꿈 신기루 같은,

因緣 따라 만들어졌다가 因緣 따라 消滅하는 아지랑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

 

 

 

     

 

一切 (十二入處)는 一切가 아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밤중에 길을 걷다가 나무 그림자를 鬼神으로 錯覺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 길이 지름길인줄 알지만 鬼神이 두려워 한동안 그 길로 다니지 못하였다. 실제 있지도

않은 鬼神을 있다고 生覺한 어리석은 錯覺하는 意識 때문에 힘들게 먼 길을 돌아 다니다가 어느날 實際 鬼神이

아니었으며 자신이 錯覺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 鬼神은 실제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물론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意識 속에서는 分明 있었고, 삶에 막대한 影響을 끼쳤다. 實在는 없는 것이지만 六內入處에는

分明 거짓으로 鬼神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어리석은 無明 역시 이와 같다.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生覺하면서, 無明이라는

實體的인 어떤 것이 내 안에 있어서 나의 깨달음을 防害한다고 生覺하겠지만, 事實 無明이라는 것은 實體的인

어떤 것이 아니라 單純한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일 뿐이다. 卽, 이 錯覺은 十二入處에서는 分明 있는 것이기에

‘一切’라고 할 수 있지만, 그 十二入處라는 意識 自體가 虛妄한 妄想이기 때문에 幻覺 속의 ‘一切’인 것이다.

 

이처럼 十二入處에 包攝되지 않는 것은 一切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十二入處 또한 虛妄한 意識일 뿐이다.

어차피 내 몸도 내 바깥의 世界도 내 生覺 마음 意識도 모두가 다 幻影에 불과하다. 非實體的이고 텅~비어

空한 幻影인 世上를 우리는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 속에서 把握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十二入處에서

볼 수 있고, 經驗할 수 있으며, 認識할 수 있는 만큼의 自我와 世界만이 내게 알려진 存在界인 것이다. 그러나

그 一切, 十二入處라는 存在界 또한 固定되어 不變하는 實體가 아니다. 진짜가 아니다. 그것이 全部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瞬間 나의 意識 水準에 있어서는 十二入處 그것이 全部(一切)인 것이다.

 

이와 같이 十二入處를 一切라고 말하는 것은, 十二入處만이 實體的인 全部이기 때문에 一切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十二入處가 우리의 意識 속에서 把握할 수 있는 ‘全部(一切)’인 것이기 때문에 十二入處를 一切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反語的으로 우리가 一切라고 生覺하는 모든 것, 十二入處가 정말 實體的인 ‘一切’ 모든 것인 줄로

錯覺해서는 안 된다. 나의 意識 水準에서 感知된 ‘制限된 一切, 十二入處’임을 알아야 한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