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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五蘊) - 十八界와 觸 –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실체

장백산-1 2015. 2. 6. 16:17

 

 

 

 

'있다'고 하는 것들의 실체 - 오온(1)  |붓다수업 교리강좌

 

 

 

 

 

4장. 오온(五蘊)

 

      

1. 오온의 성립

 

(1) 十八界와 觸  –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실체

  

우리는 앞 장에서 十八界가 成立되는 過程을 살펴보았다. 6가지 主觀自我界와 6가지 客觀對相界 그리고

6가지 意識界가 서로 界域을 이루어 나뉘어 져 있는 意識狀態를 十八界라고 한다고 했다. 이렇게 各各

6가지 主觀界, 6가지 客觀界, 6가지 意識界가 界域을 이루며 나뉘어 져 있다가 主觀界 客觀界 意識界

이 세 가지 界域이 合쳐져 接觸을 하는 것을 ‘촉(觸)’이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의 界域은 언제나 함께 모여서 나타난다. 눈으로 色을 보게 되면 眼識이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主觀界인 눈과 客觀界인 色, 그리고 이 둘의 接觸 그에 따른 본다는 意識界인 眼識이 하나로

合쳐졌을 때 비로소 우리의 意識은 무언가를 存在하는 어떤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 界가

各各 나뉘어서 存在하고 있다가 세 가지가 하나로 合쳐지는 ‘觸’에 의해 비로소 우리의 意識은 무언가를

認知할 수 있고, 存在하는 어떤 것으로 認識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눈으로 무언가를 볼 때나, 귀로 소리를 들을 때나, 코로 냄새 맡을 때나, 혀로 맛볼 때나,

육체로 감촉을 느낄 때나, 마음으로 생각할 때나,  意識이 함께 接觸하면서 ‘무언가가 있다는 意識’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에 눈은 있지만 무언가를 보고 認識하지 않으면 무언가 ‘보여지는 것이 있다’는

意識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귀는 있지만 소리가 없어도 ‘들리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卽 ‘觸’이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을 함으로써, 비로소

‘무언가가 있다’는,  ‘무언가가 存在한다’는 意識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이란 單純하게 六根과 六境과 六識의 接觸이 아니라, 우리가 ‘存在한다’고 여기는 意識,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意識을 말한다. 이 單純한 接觸이 아니라,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意識’이기

때문에, 經典에서는 觸을 ‘觸入處’라고 부르기도 한다. 入處란 十二入處에서처럼 結局에는 消滅시켜야 할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狀態를 의미한다.

 

그래서 十二緣起에서도 열두가지 괴로움의 原因이 되는 支分 중에 하나로 ‘觸’이 나오는 것이다.

卽, 觸을 消滅함으로써 結局 괴로움이 消滅되는 構造를 의미한다. 만약에 觸이 斷純하게

六根과 六境과 六識의 接觸이라면 觸을 消滅해야 괴로움이 消滅된다는 12緣起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觸이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는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이기 때문에 結局 消滅되어야  하는 것이다.

 

事實 이 世上은 空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實體的으로 存在한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있고,

내가 만나는 世上이 있으며, 내 마음도 있고, 바깥의 物質的 對相도 있다고 判斷하고 있지만,

事實은 그것들이 정말로 ‘있는’ 것이 아닌, 因緣假合으로 緣起되어 잠시 생겨난 空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意識은 나도 있다고 여기고, 對相도 있다고 여긴다. 왜 그렇게 여기는 것일까?

왜? 實在로는 텅~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空한 世上을 우리의 意識은 ‘있다’고, ‘存在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觸’이라는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 때문이다.

 

눈이 있고 눈에 보이는 對相이 있으며 눈으로 그 對相을 볼 때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意識이 생겨남으로써 主觀界 客觀界 意識界 이 세 가지 界가 和合할 때 비로소 ‘무언가가 存在한다’,

‘무언가가 있다’는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이 緣起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을 감고 冥想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볼펜을 던졌다. 귀로 소리를 듣고, 눈으로 볼펜임을 確認해 보고, 몸으로 볼펜의

感觸을 느끼게 된다. 눈으로 보고서 볼펜이라고 分別해서 아는 意識이 생겼기 때문에 ‘볼펜’이라는

무언가가 存在한다는 意識界 생겨난다. 마찬가지로 귀로 볼펜 던지는 소리를 듣고 이 소리를 感知해

볼펜 던지는 소리라고 認識해서 아는 耳識界가 함께 和合하면서 비로소 ‘어떤 소리가 들렸다’는

‘어떤 소리가 있다’고 하는 虛妄하게 錯覺하는 觸의 意識이 생겨나는 것이다. 몸으로 볼펜의 感觸을

느끼고 認識함으로써 ‘무언가가 있다’는 ‘存在’의 느낌인 虛妄한 錯覺하는 意識인 觸이 생겨나는 것이다.

 

卽, 우리의 意識이 一般的으로 ‘存在한다’고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다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인 이 ‘觸’의 作用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그렇고, 現代 物理學에서도 이 世上은 實體的으로 存在하는

것이 아닌 텅~비어 空한 것임을 끊임없이 설하고 있다. 이렇듯 텅~비어 아무것도 어 空한 이 世上에서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은 ‘있다’라고 錯覺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무언가가 있다’라고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이

바로 ‘’이다.

 

이 말은 이 世上에서 우리가 ‘있다’, ‘존재한다’라고 生覺하는 모든 것은, 事實은 實際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主觀界 客觀界 意識界라는 十八界가 因緣 따라 모여서 ‘觸’함으로써 ‘무언가가 있다’라고 錯覺하는 것일 뿐이다.

 

지난 밤 천둥 번개가 치고, 요란하게 폭풍우가 내렸지만, 한 사람은 그로 인해 벌벌 떨며 걱정을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전혀 意識하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났다고 치자. 後者의 사람에게 폭풍우와

천둥번개는 認識되지 않았다. 十八界가 이 사람에게는 전혀 ‘觸’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폭풍우와

천둥번개가 있었다’는 意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 사람에게는 천둥번개도 폭풍우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緣起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前者의 사람에게는 눈으로 폭풍우를 보고, 귀로 번개 소리를 듣고,

마음으로 온갖 두려운 生覺을 품으면서 認識을 했기 때문에 十八界라는 三事가 和合하여

 ‘폭풍우와 천둥번개가 있었다’라는 虛妄하게 錯覺하는 意識인 ‘觸’이 생겨난 것이다. 前者의 사람에게는

觸이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가 存在’했지만, 後者에게는 觸이 없었기 때문에 그 무엇도 存在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事實 이 世上의 모든 것들은 十八界가 三事和合하여 ‘觸’함에 따라 생겨나는 것처럼 착가하는 것이지,

實際로 내 바깥에 무언가가 實在로 ‘存在’하기 때문에 그것을 認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虛妄한 衆生心에

빠져 있기 때문에 一般的으로 내 바깥 世上에 천둥번개가 實體的으로 存在했다고 여기고, 그것을 認知하고

感紙하는 내가 實體的으로 存在했다고 여기며, 그 천둥번개를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意識이라는 내가

實體的으로 存在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十八界와 觸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둥번개가 實體的으로 存在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을 感知하는 내가 實體的으로 存在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意識이

實體的으로 存在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主觀界  客觀界 意識界가 和合함으로써 그 因緣 따라 觸이라는

 ‘實在로 있다’라고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인 妄想이 생겨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一切 모든 것은 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 그것은 實際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因緣 따라 잠시 잠깐 생겨났다가 因緣이 다하면 사라지는 因緣假合의 存在일 뿐인 것이다. 因緣假合이란,

因緣 따라 거짓으로 合쳐져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事實은 이 世上 그 무엇도 固定된 實體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十八界라는 因緣이 和合하면 ‘있다’라는 觸入處라는 錯覺하는 虛妄한 意識이 생겨나고, 그로 因해

진짜 있는 것으로 錯覺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十八界와 觸의 敎理는 佛敎의 무아(無我), 공(空), 연기(緣起), 무자성(無自性), 삼법인(三法印) 등의

가르침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왜 불교에서는 無我라고 하고, 空이라고 하는가? 왜 이렇게 實在的으로

存在하는 이 世上의 모든 것들에 대해 實際로는 空하다, 無我다라고 하는가에 대한 答辨이 바로

十八界와 觸의 敎理인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佛敎의 存在論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觸入處의 교리야말로 불교의 존재론을 대변해 주고 있다.

因緣 따라 ‘存在한다’고 錯覺하는 것일 뿐, 實在로 存在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설해 주고 있는 것이다.

本來 空하지만, 因緣 따라 緣紀되어져서 나타나는 因緣假合 일 뿐이므로, 그것은 實體가 아니고, 固定된 自我가

없으며, 實體가 아니므로 그 어떤 存在에도 執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本來 없지만 없다는데 執着하면 因緣 따라 있는 것을 無視하는 것이 되고, 이렇게 現實的으로 있기

때문에 있다는데 執着하게 되면 因緣 따라 생겨난 虛妄한 것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中道的인 眼目, 中道的인 實踐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붓다 수업(법상 스님의 불교 교리 콘서트)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도)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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