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잘못이 없다
부처님 가르침을 工夫할 때 무엇보다 첫 번째로 해야 될 工夫는, 過去서부터 지녀온 罪意識이
모두 實體가 없는 幻想일 뿐이라는 事實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眞正한 懺悔, 理懺悔입니다.
理懺悔, 眞正한 懺悔 즉, 眞懺悔는 어디서 始作이 되냐 하면, 罪라는 것이 本來 없다라는 事實을
自覺하는 데서 始作됩니다. 스스로 罪意識을 느끼는 사람의 意識에게만 罪意識은 作動을 한다는
事實을 깨닫는 것이 眞懺悔의 始作인 겁니다.
卽, “나는 이런 罪를 지었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罰을 받을 거야. 이러한 罰을 받아야지만 나는 마땅해.”라고
믿는 사람의 意識에게는 스스로가 그 罪意識을 믿기 때문에 果報가 오는 겁니다. 自己 意識이 惡業의 果報를
끌어당긴 것이지요. 그러나 惡業의 果報라고 해서 機械的으로 반드시 받아야 되는 果報는 아닙니다.
왜냐? 佛敎는 宿命論을 拒否하는 宗敎죠. 外道들이 六邪外道라고 얘기할 때 그 중에 하나가 宿命論이었어요.
그 宿命論은 佛敎의 因緣法, 緣起法과 뭐가 다르냐하면 宿命論은 罪를 지었으면 罪를 지은 사람은 宿命的으로
絶對的으로 罪를 받아야만 됩니다. 지은 罪를 받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것이 宿命論이에요. 佛敎는 機械論的인
宿命論이 아닙니다. 罪를 지었으면 반드시 地獄에가야 된다고 한다면 그건 佛敎가 아니에요.
부처님께서는 소금물을 비유로 드셨는데요, 惡業을 지었을 때 惡業만을 그대로 반드시 받아야 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컵에 있는 소금물을 먹어야 된다면, 이 소금물이 罪業이라고 한다면 이대로 소금물을
먹으면 너무 짜게 먹어야 되겠죠? 그러나 먹긴 먹어야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짜게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컵이라는 그릇을 크게 키우게 됐을 때 이 큰 그릇에다가 그 소금물을 그대로 넣고 물을 잔뜩 채워가지고
목마를 때마다 희석된 소금물을 마시면 結局에는 똑같은 量의 소금물을 다 먹을 수 있고 또한 목마를 때
마시니까 기쁘게 덜 짠 소금물을 먹을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소금물이 罪業을 의미하는데요, 지은 罪業은 받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꼭 짜게만, 卽 괴롭게만
받아야 하는 罪業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罪業을 지었더라도 自身의 그릇을 키우고, 智慧를 키우게 된다면
소금물의 비유처럼 오히려 같은 量의 소금이 들어있는 소금물을 먹더라도 괴롭지 않게 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機械論的인 運命論 宿命論과 佛敎의 緣起法, 因緣法이 다른 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지은 罪의 業障이나 罪意識을 지금 이 자리에서 終結짓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幻想인 罪意識을 계속 未來로 질질 끌고갈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佛法을 工夫하려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自身의 意識이 스스로 짊어지고 온 過去의 무거운 生覺의 짐들,
罪意識, 혹은 過去에 잘못했다고 生覺하면서 그 때로 돌아가면 두 번 다시 그런 잘못된 選擇은 하지
않을꺼라고 後悔하고 있던 過去에 대한 그 모든 生覺과 判斷들을 確實하게 내려놓는 工夫부터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 온 모든 삶은 그 때의 意識 水準에서는 그 삶이 最善의 選擇이었다는 事實을
認定해야만 합니다. 지나온 過去의 삶을 바꾸려고 할 必要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選擇을 했었기 때문에
後悔도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는 다짐도 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저 南便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人生이 쫙폈을 텐데라고 生覺하겠지만, 그 人生은 내 삶이 아닙니다.
그 때 내가 정확하게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났던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지난 過去는 단 한 瞬間도
잘못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 모든 삶이 아름다운 決定이었고, 그 決定에 대한 失手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실수를
通해 배우고 나아진 지금 이 자리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過去로 부터의 모든 罪意識, 自身이 行했던 모든 일들, 決定, 判斷들 그 모든 것를 認定하고 받아들인
채로 그대로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깨끗하게 비워진 內面의 텅~빈 도화지에 새롭게 아름다운
삶을 그려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