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6강 영상법문 녹취록
지금 이 瞬間의 刹那가 無數한 時間과 같고 時間을 넘어서서 空間도 마찬가지입니다. 空間的으로도 지금 여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 자리 이 안에 온 宇宙 모든 空間이 사실 지금 여기 이 안에서 다 具足 되어 있고 33(?)이라고 하죠. 모두 다 담겨져 있고 이 지구란 이 자리, 이 자리 하다 못해 안드로메다까지 저 수많은 우주의 모든 별까지 모든 공간까지도 사실 다 지금 이 안에 갖추어져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 이 空間에 딱 있어서 다른 空間을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신통자재한 공덕을 얘기하다 보면 여기서 다른 空間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가만히 生覺해보면 그것이 可能한 理由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 이 자리가 다른 空間과 連結된 뭔가가 있다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적인 連結法, 連結性을 이야기 하죠. 지금 이 자리에 있어도 온 宇宙의 모든 일들이 事實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쉬운 비유를 들어서 지금은 이제 뭐 언론에도 많이 공개가 된 이야기인데요.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遠隔透視 같은 것을 연구를 했었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 보통 영화 ‘서스펙트 제로’ 영화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소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묘사하는 것은 거의 맞은 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묘사하는 것만큼 쉽다. 이런 표현을 했다 하는데요. 다시 말해서 이 원격투시 프로젝트에서 보면 緯度와 經度를 딱 지정해 주면 특정 지역을 지정해 줘서 어떤 이완이나 명상이 깊은 사람들을 뽑아다가 그 사람들에게 투시를 시킨다 그래요. 그렇게 시키면 그 場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런 일들을 바로 앞마당에서 일어나는걸 보는 거처럼 봤다고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지금은 이제 이걸 안 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래서 그때부터 아마 첩보전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렇게 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예를 들어, 엄청난 큰 대량학살이라던가 대량무기라던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데 이러한 투시, 원격투시를 통해서 그런 것들을 축소화시키고 최소화시키기도 하고 이런 어떤 일들을 실제 군에서도 한적도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죠. 이것처럼 이렇게 이런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지금 이 자리에 있으면서도 다른 공간 다른 공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볼 수 있는 거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거처럼 다른 시간 다른 역사 속의 어느 시기 그때만을 관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도 지금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자리에 구족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可能하다.
이건 뭐 좀 안 좋은 연구이긴 한데요. 그냥 우리 공부를 위해서 잠깐 말씀 드려보면 러시아에서 이런 연구를 했었다고 해요. 어미토끼를 새끼 토끼들과 분리를 시켜서 도대체 어느 空間까지가 다 連結 되어 있는지 이게 궁금해서. 보통 우리도 그러잖습니까? 자식에게 뭔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머니에게 뭔가 모르게 그냥 찜찜하다거나 이런걸 마음에서 마음으로 텔레파시처럼 느끼지 않습니까? 이 연구에서 어미토끼를 새끼들과 여러 마리 새끼와 뭘 했느냐 하면 잠수함을 태워가지고 새끼토끼를 잠수함을 태워가지고 아주 깊은 深海에 가서 새끼 토끼를 참수한다 할까 이렇게 했더니 어미토끼의 腦에 連結되어 있던 두뇌에 삽입되어 있던 腦波가 상당히 크게 치솟으면서 격앙스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다시 말해서 이런 공간만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그런 얘기가 있거든요. 우리 業을 벗어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바다 밑으로 들어가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든 그것은 다 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든 避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것처럼 아무리 바다 밑에 깊은 곳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것은 서로 連結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연구이기도 합니다.
전세계 41개국에 있는 물리학자 75명이 모여 가지고 1997년부터 세계적인 재앙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이것을 이 우주법계가 얼마나 빨리 알아차리고 있느냐? 이 우주법계가 이것을 알고 있을까?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책에서 보면 그 어디죠? 그 걸프만에서 전쟁이 일어나던 날 일본의 전역에 있던 물의 결정들이 찌그러졌다 이런 연구들이 있었답니다. 그 비슷한 얘긴데, 전세계적인 충격적인 뉴스가 일어날 때 이제 이 과학자들이 만든 게 그거거든요. REG(random event generator) 라고 해서 無作爲 事件 發生裝置 라는 것을 만들어서,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보통 일반적인 경우에는 동전을 천 번 만 번 던지잖습니까? 예를 들어 동전을 천 번 던지면 앞면이 나올 確率과 뒷면이 나올 확률이 얼마일까요? 반반이겠죠? 똑 같은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이 50:50이랍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큰 천재지변이나 재앙 같은 충격적인 뉴스가 일어나는 瞬間을 보면 일어날 때 보면 동전을 던질 때 언제나 50:50인데 그런 큰 뉴스거리가 있거나 재앙이 있거나 이럴 때는 70:30이나 80:20 심지어 예전에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는 REG라는 바늘이 치솟기 시작해 가지고 900:100까지 치솟았다고 합니다.
한 사일 동안 900:100에서 800:200까지를 계속해서 왔다 갔다 했다 합니다. 800:200까지를 왔다 갔다 한단 겁니다. 즉 이 REG라는 기계의 바늘이 한국에 있던 아프리카에 있던 어디에 있던 상관 없이 전 지구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을 기록하고 알고 있다는 거죠. 이것은 곧 이 空間的으로 보더라도 世上은 다 서로 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이 티끌이라는 공간 속에 이 티끌 속에 온 우주 전체가 서로 連結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微粒子도 그렇다고 하죠. 미립자도 한곳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똑 같은 하나의 微粒子는 可能性으로 존재한다. 가능성으로 모든 곳에 무수한 곳에 모든 곳에 동시에 편재한 편만해 있다. 모든 可能性이 온 宇宙에 遍滿해 있다는 겁니다. 實際 物體 알갱이라는 것은 없고 微粒子 波動이라는 것으로 可能性으로만 存在한다. 가능성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意識을 集中할 때 다시 말해 마음을 集中할 때 ‘一切唯心造’라고 하듯이 마음을 딱 일으킬 때 거기에서 實體的인 物質的인 알갱이가 되거나 實質的인 힘을 지닌 物質로 變化하게 된다는 거죠. 그것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 모든 우주 시공에 펼쳐져 있다는 거죠.
우리가 몸이 아프다는 것도 모든 가능성이 다 있는 겁니다. 몸이 아플 가능성도 있고 몸이 깨끗하게 낫는 가능성도 있다. 어떤 가능성에 우리가 집중할 것이냐에 따라서 그 가능성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라는 거죠. 우리가 어떤 業을 짓느냐에 따라 새로운 可能性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란 얘기에요. 새로운 가능성을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可能性은 이미 無限히 遍在해 있다. 거기에서 어떤 가능성에 내 意識의 焦点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그 可能性이 드러나 보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통해서 과학에서는 平行宇宙라는 것을 얘기하죠. 모든 무한한 가능성들이 평행우주 속에는 다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 있다. 내가 아플 가능성과 아프지 않을 가능성이 동시에 평행우주 속에는 존재해 있다. 다음 주가 수능 시험이라 기도하시는 부모님들 계시는데 자식이 수능시험에 또 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가능성과 그렇지 못할 가능성 이런 무수한 가능성들이 同時에 平行宇宙 속에 존재 할 수 있다.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는 거죠.
[옥스포드 대학 도이치(David Deutsch) 라는 교수는 2007년에 平行宇宙가 存在한다는 事實을 數學的으로 완벽히 풀어냈다] 라고 하구요. 나사에서는 2011년 지구와 똑 같은 다른 지구를 찾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똑 같은 지구 다른 지구를 찾았는데, 신기해서 ‘야 이런 게 있구나’ 해서 계속해서 찾았더니 찾으면 찾을수록 그 지구의 숫자가 더 늘어나더라는 겁니다. 이 지구와 동일한 조건의 똑 같은 지구의 숫자가 자꾸 자꾸 늘어나더라는 거죠. 케플러 망원경이라는 것으로 지금 현재 찾아낸 것이 1535개의 또 다른 地球를 찾아냈다고 하거든요. MIT의 물리학자 맥스 테그마크(Max Tegmark) 라는 교수는 나와 똑 같은 외모, 이름, 기억,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無數한 또 다른 地球에 살고 있다.라고 平行宇宙를 설명했구요.
프린스턴 대학에 폴 스타인 하프라는 교수는 평행우주는 실제로 존재하며 어떤 공상과학 소설가가 상상할 수 있는 거 보다 훨씬 더 이상하고 신비한 존재이다. 도이체 교수는 또 이렇게 얘기 했습니다. ‘평행우주에 사는 무수한 나들은 늘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이 우주에 사는 나는 나의 행복은 다른 평행우주에 사는 또 다른 나에게 影響을 미치고 또 다른 우주에 사는 나의 행복은 이 우주에 사는 나에게 影響을 미친다.’ 우리 불교에서 業을 설명할 때 이렇게 표현 합니다. 전생 그 전생 그 전생 수십번의 전생을 얘기하구요. 우리는 전생과 현생과 내세라는 것이 시간적인 일직선을 가지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지고 이렇게 운행하는 이러한 어떤 것으로 輪廻를 우리 머릿속에서는 생각할 수 밖에 없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죽고 나서 未來로만 輪廻하는 게 아니라 過去로도 輪廻 할 수도 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幻想일 뿐이고 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라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幻想의 槪念일 뿐이라는 거죠. 그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瞬間 여러분들이 일요일 날 놀러 가고 집에서 늦잠도 자고 다른 무한한 것들을 할 수 있는 가능성들도 있고 법당에 와서 법문을 듣고 내가 아! 정말 이 佛性이라는 것을 깨달아야겠구나. 어디로 가는지 내가 누구인지 이걸 모르고 나머지 생을 살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공부를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법당에 와서 공부하는 可能性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거죠.
우리가 지금 보기엔 아무런 差異가 없어요. 법당에 한번 나오는 걸 선택하는 가능성과 그냥 다른 걸 하는 가능성 뭘 선택하든 相關 없는 걸로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또 다른 깊은 차원의 평행우주라던가 또 다른 윤회의 세계 속에서는 여기에서 내 마음 하나가 바뀌는 意識 하나가 딱 뒤바뀌는 瞬間 지금 여기의 나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전생 그 전생 그 전생 또 다른 수많은 나 平行宇宙에 있는 또 다른 나, 그 無限한 時空을 超越하는 나라는 存在가 同時에 바뀌기 始作합니다.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그럼 그렇게 시공을 초월하는 윤회적인 평행우주적인 모든 또 다른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느냐? 너가 바로 나고 우주 전체가 바로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인다라망 그물코 표현을 드렸는데요. 지난주 대만에 갔다 왔잖습니까. 대만 절에 갔더니 그 절에 불교 박물관이 있는데요. 다 돌고 마지막에 통과하는 곳을 보니까 깜깜한데 어둑어둑합니다. 어둑어둑한데 사람이 지나가니까 불이 딱 켜져요. 불이 딱 켜지고 전부 다 사면 모두 다 방 전체가 하나의 거울 같이 유리로 탁 되어 있고 그 유리 안에는 부처님이 다 부처님이 계시는 거에요. 불을 탁 켰는데 거울에 또 다른 거울 또 다른 거울 無數히 反射되다 보니까 제가 그 瞬間에 딱 서 있었는데 마침 그 시간에 그 많은 분들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시간에 앞에 가는 사람도 훅 가버렸고, 뒤에 오는 사람은 아직 안 왔고 저 혼자 거기 딱 있었습니다. 동쪽으로도 한도 없이 끝도 없이 부처님이, 끝도 없이 부처님이 이어지고, 서쪽으로 끝도 없이 부처님이 그냥 온 天地 四方 부처님이 똑 같은 부처님이 限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야말로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여러분 거기까지 갈 거도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엘리베이터 거울 있잖습니까? 거기 거울을 보면 똑 같은 내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거와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는 존재는 내가 손을 들면 무수한 거울에 있는 내가 손을 들듯이 여기서 내가 마음을 하나 일으킬 때 시공을 초월해서 이 우주에 모든 곳에 우리는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에요. 내가 하는 한 마음은 내가 하는 한 마음이 아니에요. ‘내가 담배 펴서 내 몸 버리는 건데 뭐? 내가 나쁜 생각해서 내 마음 나쁜 생각 하는데 너가 왜 신경 쓰냐?’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일으킨 한 生覺은 곧 宇宙 全切에 影響을 미치고 있는 우주전체를 변화시키는데 내가 기여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마음 하나 밝게 냈을 때, 긍정적으로 냈을 때, 마음 공부를 했을 때, 발심했을 때 그것은 곧 우주 전체와 連結되어 있는 것입니다.이 세상을 뒤바꾸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거에요. 대통령이나 높으신 분들만 그 분의 한 생각, 한마디 말이 우리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누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生覺과 말과 行動을 함으로써 우주전체에 시공을 초월해서 영향을 미치고 우주를 동 시간대에 늘 우리는 변화시키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나만 아니라 모두를! 한 사람에게 法을 설하는 것은 그것은 우주전체에 法을 설하는 것과 다르지가 않다. 이렇게 시간 공간적으로 우리는 모든 우주 전체와 連結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다음 게송을 보면
구세십세호상즉 (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란격별성 (仍不雜亂隔別成) 구세십세호상즉 九世와 十世가 서로 相卽한다. 서로 부합한다. 서로 닿아 있다. 九世가 뭐냐 하면 시간을 얘기하는 단위인데요. 과거현재미래를 三世라고 하지 않습니까?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거기 또 다른 삼세가 개입 된다는 거죠. 과거도 하나의 과거가 있는 게 아니라 과거 속엔 또 과거가 있고 우리가 영어 공부하다 보면 시제 공부하는 거랑 비슷하지 않나요? 그런 것처럼 과거에도 과거현재미래가 있고 현재 속에도 과거현재미래가 있고 미래에도 과거현재미래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時間이라는 槪念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을 좀 더 세분화 시켜서 봤을 때 즉 九世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것을 제각기 떨어뜨려서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망상 분별의 세계에서는.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미래는 미래 나눠서 생각하잖아요. 과거 속에도 과거가 있고 과거 속에 현재도 있고 과거 속에도 미래가 있고 우리는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하는 우리들의 생각 속에서는 九世가 있다는 거죠.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시간이 담겨져 있다는 거죠.
그런데 十世라는 것은 뭐냐 하면 十世라는 것은 九世라는 것은 과거현재미래라는 것은 따로따로 나눠져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둘이 아니다.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한 生覺, 이 자리에, 이 瞬間에 모든 永劫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十世라는 것은 온 과거현재미래를 포섭하는 永劫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것이 또 다른 지금 이 瞬間 지금 이 瞬間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에 바로 지금 이 자리죠. 바로 이 瞬間, 이 刹那의 瞬間. 과거현재미래를 九世로 나누는 분별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개가 있지만 十世라는 하는 전체의 영겁의 시간과 지금 이 자리라는 시간은 둘이 아닌 이 十世라는 것이 하나로 딱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이게 즉 그 얘기죠.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하나가 곧 전체고 전체가 곧 하나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전체의 시간이 十世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九世와 十世가 서로 부합하는 서로 맞닿아 있다.
잉불잡란격별성 (仍不雜亂隔別成) 仍 이라는것은 그러면서도 不雜亂 서로 잡스럽거나 혼란스럽지가 않고 隔別成 다시 말해서, 하나하나가 다 따로따로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거 같지만 그것이 다 相卽하고, 서로 하나로 通하고 일즉다(一卽多)라는 것이 다즉일(多卽一)이라는거죠. 잉불잡란격별성, 전체의 시간이 하나로 딱 지켜 있으면서도 서로 잡란스럽지 않고 혼란스럽지가 않고, 따로따로의 별도의 ‘이룸’을 성역됨을 유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좀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920년대 하버드 맥도걸이라는 교수가 어미쥐의 미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어미쥐가 미로를 통과하는 시험을 했다 합니다. 시행착오를 얼마나 겪는지 기록했죠.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언제쯤 저 끝에까지 가는가 봤더니 165번 만에 미로를 찾아간 겁니다. 165번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미로를 통과했어요. 이 어미쥐는.
그런데 그 어미가 새끼를 낳았어요. 새끼는 한번도 거길 통과시켜 본적이 없죠. 새끼가 나중에 엄마 나이가 됐을 때 그 새끼 쥐를 똑같이 미로를 통과시켰습니다. 그 어미 쥐는 165번 만에 미로를 찾아갔는데 그 새끼가 성인이 되었을 때 120번 만에 찾아갔다고
또 거기서 밑에 새끼는 줄어들고 또 줄어들고 나중에 몇 세대가 지나고 났더니 그 뒤에 새끼는 그 복잡한 미로를 단 20번 만에 찾아갔답니다 한번도 가르쳐 주거나 엄마가 뭐.. 학습이나 배움이나 깨달음도 마찬가지고 영적인 배움 이런 것도 마찬가진데요. 그 수준 같은 것이 똑같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달 되는 겁니다. 전달되죠.
어떤 분이 그러셔요. 제가 아는 선배분이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그렇게 못했다고 해요. 석박사를 따 가지고 연구원으로 계신 분인데 공부를 너무 못했다는 거에요. 학교도 지방대밖에 못 나오고 그런데 대학교 3.4년때 갑자기 공부에 필을 받아서 갑자기 공부가 재미 있어져 가지고 서울에 좋은 대학교 대학원 간 거죠. 거기서 석사박사를 따고 거기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어릴 적에 너무 공부를 못했던 거에요. 너무 공부를 못했고 심지어는 초등학교때는 너무 공부를 못해 가지고 말도 못하게 못했다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잘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사까지 간 거죠.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구요. 이분은 이제 결혼해서 애를 날 때 고민을 참 고민을 했어요. 즉 그 얘기였었어요 내가 내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난 공부도 못했고 진짜 못났고 잘하는 것도 특별히 없었다 지금의 나를 닮은 자식을 낳으면 좋겠는데 어릴 때 나를 닮은 자식을 낳지 않겠냐고 이러면 공부도 못하고 이럴 건데 참 걱정이라고 해서 제가 그때 뭔 얘기를 했었냐면요.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이 내 과거를 담는 게 아니라 지금 이 瞬間의 내 意識을 닮을 수 밖에 없다. 과거도 여기에 있기 때문에 과거도 닮을 수밖에 없지만 여기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지금의 意識 水準이 自息에게 그대로 傳達 되는 것이지 그 意識이 전달되는 거지 과거가 더 영향을 많이 미치는 건 아니겠죠. 지금이죠 지금. 아무리 공부를 안 했어도 지금 공부를 하고 아무리 과거에 책을 안 봤어도 지금 책을 보고. 지금이 影響을 미치는 거죠.
아니나 다를까. 그분 그 선배 아들이 그렇게 책을 좋아하더랍니다. 그분은 고등학교 졸업 할 때 까지 책을 안 봤답니다. 나처럼 책이라면 쳐다도 안볼 줄 알았는데 그렇게 책을 보더랍니다. 그게 왜 그런가 봤더니 부모님이 늘 책을 보니까 내가 책 보는 재미를 느끼고 했을 때 자식을 낳았으니까 그 때의 意識을 따라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것과 마찬가지죠 학습 배움 이런 것도 부모에서 자식에게 傳達이 될 때 그 意識, 그 工夫까지 傳達 되는 겁니다. 내가 意識이 成長을 하면 子息도 意識이 成長을 따라 올 수 밖에 없습니다. 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遺傳子的으로만 連結 돼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전자를 넘어서 連結되어 있어 유전자적으로만 연결되어 있으니까 자식을 낳아야지만 그 자식이 훌륭한 자식을 낳겠죠. 내가 지금 공부해도 내 자식은 안바뀌겠죠? 유전자적으로만 連結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 한번도 連結性이 끊어진 적이 없어요. 連結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존재가 連結性이 끊어질 수 없습니다. 하물며 자식과 나의 連結性이 어떻게 끊어질 수 있겠습니까? 유전자를 넘어서서 미묘한 얼굴 표정 하나, 말투 하나, 마음씀씀이 하나가 그대로 자식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주변 친구들에게 친척들에게, 회사 사원들에게, 주변 도반들에게 그 미세한 하나하나를 가지고 전달해 가고 있는 겁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통해 배우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道伴을 얻는 즐거움 스승을 얻는 즐거움 이것이 깨달음의 전부다. 좋은 도반과 함께 있는 것 만으로 저절로 學習이 되는 겁니다.
165번의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 20번 만에 끝낼 수도 있게 된다는 얘기죠. 遺傳子的으로만 連結되어 있는 存在가 아니니까 시공간을 초월해서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 아니겠습니까? 이게 바로 緣起법 아니겠습니까? 연결되어 있다는 거 내가 어떤 도반을 만나든 어떤 사람과 평소에 어떤 공부를 하고 살고 고스란히 내 공부의 수준이 앞으로 나의 삶이 결정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의 몸은 千兆個의 細胞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요. 은하계 별보다 많다라는 얘기도 하대요. 이 細胞들이 每秒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을 하죠. 뇌세포는 자기가 할 일을 하지 않습니까? 뇌가 돌아가게 생각을 하죠. 위세포는 뭘 먹으면 자동적으로 알아서 소화시킨다고 막 작동을 하겠죠. 그러데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위세포가 뭐 잔뜩 먹었을 때 소화시키는 작동을 하느라고 위에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소화시키기 위해 엄청난 작동을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기 사항에 딱 놓여요 두려움에 놓인다던가 뭔가 막 걱정에 놓인다던가 위기 사항에 딱 놓이게 되면요. 온몸의 세포가 갑자기 딱 멈춰 버립니다.. 소화가 늦게 될 수 밖에 없어요. 소화하는 이 세포가 딱 멈춰버려요. 온몸이, 옛날에 우리 그런 거 했잖습니까? 15일만 되면 민방위 훈련하면 싸이렌 한번 울리면 모두가 딱 멈추자나요. 우리 몸의 모든 세포도 危機가 되면 모든 세포가 連結되어 있어서 저오가 傳達돼서 딱 멈춰서 모든 것이 그 危機를 극복하는데 이 세포 전체가.... 그래서 어떤 意識에서는 아무리 막 몸을 뒹글어도 몸에 傷處가 안 날 때도 있구요. 어떤 때는 조금만 음식을 잘 못 먹어도 체할 때가 있고 소화가 엄청 안되고 어떤 때는 빨리 될 때도 있지 않습니까?
아픈 사람은 병이 나면 뭐 먹고 싶지 않자나요? 입맛이 없자나요. 그러면 自然原理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아파서 먹고 싶지 않으면 그냥 굶게 하는 겁니다. 그게 藥이에요. 몸이 굶고 싶은 거에요. 왜 굶고 싶으냐? 몸은 굶고 싶을 수 밖에 없어요. 내가 아프기 始作하면 내가 아프다는 게 危機 사항 아닙니까? 몸의 모든 세포는 다른 모든 활동을 멈추고 아픈거를 치유하는데 모든 힘을 쏟습니다. 그런데 우린 어리석은 생각으로 많이 먹어서 밥심으로 낫는거야 이렇게 배워왔으니까 잔뜩 먹는 거에요. 잔뜩 먹으니까 이 세포들은 치유하는데 온전히 힘을 쓰지 못하고 이걸 소화하는데 쓰느라고 그러니까 힘이 분산되는 겁니다. 치유가 늦어지는 거죠.
이처럼 우리 모든 몸의 세포 하나하나는 저마다 자기 역할들을 알고 있고 그것은 서로다 連結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千兆個의 細胞가 있지만 同時에 각자가 할 일은 다 따로 있어요. 胃는 胃대로 臟은 臟대로 腦는 腦대로, 모든 세포가 저마다 각자 할 일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각자 다 따로 따로 할일이 있어요. 또 그럼에도 잉불잡란격별성 (仍不雜亂隔別成) 서로 잡스럽고 황망스럽지 않아요. 다 자기 할 일 따로따로 있지만 서로 잡스럽지 않고 서로 따로따로 자기 할 일 주어져 있다. 나라는 도움을 주고 있는 겁니다. 기여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과 똑같이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우주에 이러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가장 우주 전체에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잉불잡란격별성 (仍不雜亂隔別成)으로서 즉 나는 나다운 삶을 나에게 주어진 삶으로써 胃에 있는 細胞가 난 生覺을 하고 싶다. 腦가 되고 싶어한다고 막 하면은 胃에 있는 일을 딱 내버려두면 사람 몸이 유지가 되겠습니까? 위에 있는 세포는 최대한 소화를 시키는 거에요. 소화시키는 노력을 해줘야겠죠. 공무원은 공무원답게 스님은 스님답게 엄마는 엄마답게, 주부는 주부답게, 군인은 군인답게, 윗사람은 윗사람답게, 아랫사람은 아랫사람답게 저마다 자기답게 자기다운 삶을 독자적으로 자기만의 특기를 가지고 해냈을 때 그랬을 때 그것이 全 宇宙에 影響을 미치는 겁니다. 서로 混亂스럽거나 繁雜스럽지 않단 말이죠. 각자 자기마다 고유성을 가지고 있단 거죠. 그 固有性이란걸 통해서 獨者性을 통해서 깨달아 가는 거지만 結局은 깨닫고 나면 하나다. 저마다 각각 혼란스럽거나 잡스럽지 않다는거죠. 다 각자 자기 고유성 그러나 독자성이라는 것을 통해서 깨달아 가는 것이지만 깨닫고 나면 결국에 하나이다. 결국엔 하나로 가요. 그러나 그 하나이지만
空으로 하나지만 하나로써 하나지만 그 다라는 거 各者 自己마다 모습으로 표현한 저마다의 방식들, 그것을 무시하는 게 불교가 아니라는 거죠. 불교는 진리만 중요하다고 하니까 나머지 各子 無自性이라고 하니까, 自性이 없다고 하니까 나에게 필요한 固有性 이거 다 無視해야 되느냐? 그게 아니란 말이죠. 불교를 어렵다고 얘기합니다. 自性은 없다. 固有한 實體는 없다. 固定된 實體는 없기 때문에 自己의 固有性 自己답게 사는걸 認定한다는 거죠. 이것은 空도 認定하고 色도 認定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도 認定하고 全部 다도 認定한단 얘기입니다. 우리는 전체 각자 자기답게 피어난 自己다운 個性, 自己다운 能力, 自己다운 特技 이것을 통해서 世上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고 세상이, 쉽게 말해, 이렇게 얘기하죠 부처가, 이것도 方便이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이죠. 부처라는 하나의 부처가 꿈을 꾼단 말이죠. 꿈을 꿉니다. 諸各各 다 다른 모습들을 登場시킨단 말입니다. 왜 各者 各者 모습을 登場시키겠어요? 다 다른 모습으로써 다 저마다의 자기다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나다운 삶에서 저마다 배움의 파편들 배움의 조각들 그 하나라고 하는 佛性이라고 하는 부처라고 하는 그 하나의 全切性으로 統合시켜 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全切가 함께 배워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백명이면 백명, 천명이면 천명 全部 다 各各이 부처가 되는 방식은 各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부처가 되는 길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내가 個性이 다르고 特技가 다르고 性格이 다른데 어떻게 다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거죠. 自己다운 固有的인 方式으로써 깨달아가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삶입니다. 삶을 살아 나가는 것, 그게 내가 부처가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거죠. 이게 無爲法입니다.
有爲는 뭐냐 하면 나는 지금의 나는 문제가 많아. 지금의 나는 이대로 가면 안돼. 이 生覺에서 理想的인 사람을 定해 놓고 그 사람처럼 살아야지 하고 달려가는 겁니다. B라는 이상형을 만들어 놓고 나는 A인데 B가 되기 위해 달려가는 겁니다. 달려가려고 하니까 人爲的으로 막 努力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有爲法입니다. 힘이 듭니다.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B라는 곳으로 갈 곳이 없어요. 이미 到着해 있고 이미 우리라는 存在 自體가 이미 B이기 때문에 完成된 場에 있기 때문에 다른 어디로 갈 데가 없어요. 뭐만 하면 되느냐? 막 어디로 가려고 B라는 곳으로 가려고 彼岸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모든 努力들 모든 分別들 모든 生覺들 그것들만 그냥 놓아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놓으라고 하니까 놓는 일을 하려고 애를 쓰는데 뭔가를 하려고 하는데 힘을 빼 버려요. 멈추려면 어떻게 해요. 힘을 빼고 놔줘야지. 나중에 멈추겠죠. 修行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은 作爲的이고 人爲的인 게 아닙니다. 人爲的으로 修行을 通해 부처(佛)가 된다는 것, 깨닫는 것은 幻想이고 方便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唯一한 修行은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自身이 되는 겁니다. 解脫을 얻고자 하는 모든 努力들을 멈추는 겁니다. 分別心을 내려놓고 이 말을 잘 들어야 해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도 때로는 걱정스러워 하는 것은 개중에 어떤 분들은 이런 말을 自己式대로만 理解해 가지고서 ‘아 修行 다 필요 없는 거구나. 修行도 하지 말라는거구나. 난 修行 안해도 되는구나. 내가 하고 싶은 건 노는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건 맛있는거 많이 먹는 거야. 내가 하고 싶으니까 밤늦게 배달도 시켜 먹고 술도 먹고 원하는 대로 흥청망청 산다.’ 이렇게 生覺하는.
그래서 中道를 잘 지켜줘야 한다, 中道를.
제가 佛敎만이 絶對的인 眞理가 아니니까 執着하지 마라. 이렇게 얘기했단 말입니다. 다른 어떤것에도 眞理性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했단 말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어떤 분이 아 불교는 진리가 아니구나. 난 그럼 딴 거 더 솔깃한데 가봐야겠다. 그리고 딴 데 가서 ‘아이구 저 저 法相 스님이 그렇게 얘기했다.’하면서 딴 데 가서 거기만 또 빠져 가지고 있어서 제가 참 어떤 말씀을 드리더라도 매번 정말 어렵습니다. 아주 미묘해서요. 外道는 아주 微妙해서요. 언뜻 보기에 外道처럼 안 보입니다. 그러나 外道들이 정말 많습니다. 정말 많아요. 正道가 아닌 正法을 가장한 외도들이 너무 많단 말입니다. 물론 그곳에 가서 잠시 그곳에 있었다가 나중에 다시 깨닫고 돌아 오는 그런 과정을 겪어야 할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 또한 절대적으로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잘 못 이해해 가지고 分別心 때문에 혼자 가서 안 해도 되는 걸 괜히 겪을 필요는 없지잖습니까? 괜히 그런 거 겪을 필요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움입니다. 어떤 자리를 한번씩 힐끗힐끗 쳐다봐서 道人인척 행세하는 이런 사람들이 하는 法하고는 완전한 차이가 있단 말이에요. 완전한 차이가. 제가 이런 말씀 드렸자나요. 저도 이것 저것 이 공부 저 공부 많이 해봤다고. 왜냐면 솔깃하니까. 부처님 말씀은 정공법이거든요. 재미가 없단 말이에요. 재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솔깃한 공부 많거든요.재미있고 실제 뭔가 딱딱 段階를 만들어 단계를 딱딱 넘어 얼마 있음 몇 일 하면 뭐가 딱 되고 뭐 이런 거 많거든요. 그런데 솔깃하게 다가오는 게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저도 한 때 이곳 저곳 이 공부 저 공부 다 해봤었죠. 그런데 돌아온 게 이 자리에요. 이 자리 밖에 없어요. 이런 쓸데없는 짓 이걸 너도 나도 다 할 필요 없잖습니까? 제가 한번 해보고 나서 그게 아니구나 하고 말씀을 드렸으니까 딱 智慧로우신 분이라면.... 제가 여기 저기 기웃기웃 거렸을 때요. 보니까 정말 솔깃한 게 너무 많습니다. 너무 유혹적이고 너무 정말 홀깃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니까요. 명상 수행 이런 것들을 가장한 우리를 홀려 버리는 게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아요. 정말로. 제가 그래서 정말 깜짝 놀란 것이 야 이 정도라면 사람들이 정말 솔깃하겠다. 그런데 그게 다 돌아오는 길이고 심지어는 망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부처님 가르침의 이 正攻法은요. 너무나도 경이롭고 아름다운 것인데 이 가르침이 그 수준에 닿아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너무 지루하고 깝깝하고 다른 데로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法입니다. 여기서 여러 분들이 아 이 法門을 듣고 뭔가 工夫가 되고 깨달음을 얻고 뭔가 工夫 되는 사람이 있어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 없다고 생각하시죠? 이 중에도 있습니다. 화랑호국사 불교아카데미 여기에도 이 工夫를 듣고 이 法門을 듣고 工夫가 놀랍게 진척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상법문을 듣고도 마찬가지고 工夫가 딱 된 사람들은 안단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안단 말입니다. ‘아! 저게 무슨 말이구나’, ‘어떤 가르침이구나 이걸 압니다. 그런데 이걸 스스로 어떤 체험이 없고 스스로 공부가 아직 미진한 사람들은 그저 알음알이로써만 이해가 될 뿐이고 그러다 보니까 이게 뭔 얘기인지를 確然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과학적인 얘기도 하고 해 가면서 하나하나, 하나하나 조금 조금씩 볼 수 있도록 方便을 들어 말씀 드리는데 이런 과학적인 비유를 들고 하는것은 정말 方便일 뿐인데 나중에 보니까 항상 설법을 하면 정말 핵심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이 方便 저 方便 끌어다가 얘기하고 나면 그 다음주에 제가 지난주에 무슨 얘기했었죠? 하고 물어보면 제가 하려던 말씀은 記憶을 못하시고 그거 설명 하려고 한 方便들만 記憶을 하시더라구요. 처음에 그게 귀에 들어온단 거죠. 그러다가 이게 조금 조금씩 끌려오는 거죠. 부처님 法을.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오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까 모르죠. 못 느낍니다. 그런데 조용히 끌려오고 있단 말이죠. 法으로써. 法과 가까워지고 있어요.
그래서 아까 말씀 드린 거처럼 부처님 法이란 얼마나 單純하고도 아름답습니까? 제가 受容해라 받아드려라 이런 얘기 많이 하자나요. 그런데 어떤 분은 교리에 수용해라 받아드려라 이런 얘기 없는 거 같은데 그게 교리와 맞는 말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는데 受容해라 받아 드리라는 말은 뭐냐면요 수용하려고 애를 쓰고 받아드리려고 막 애를 쓰는데 그렇게 애 쓰는건 受容하는게 아니고 받아들이는게 아니죠. 제가 그래서 許容하라, 許諾하라, 認定하라 이런 말도 쓰는데 許容하려고 막 애를 쓰는 건 받아들이는 게 아니에요. 이대로인걸 내버려 둬야지 許容해라 받아들이란 말은요. 내버려 두란 말입니다. 無爲. 有爲 아닌 無爲로 하란 말입니다. 억지로 애쓰지 마라. 더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더 못하려고 내치려고 하지도 마라. 이게 中道가 아니겠습니까? 힘쓰지 말고 애쓰지 마라, 수용해라, 받아드려라. 이게 無爲法 입니다 힘쓰지 않고 작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無爲行 그게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고 그 인연 따라 연기법이죠 인연 따라 힘쓰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것을 인연 따라 하는 거에요. 자기가 하는 일은 정말 힘들지 않은 거에요.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신나서 하는 열정과 에너지가 넘칠 뿐 그걸 열심히 하고 나서 밤을 새서 그걸 하고 났어도 그 일을 끝내고 나면 한없는 기쁨이 넘치지괴롭습니까? 피곤합니까? 그런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억지로 하면 하기 싫어 죽겠는데 참선하라고 하니까 열 시간 참선하라고 하니까 열 시간 참선하고 나면 지치고 힘빠지고 수행은 수행대로 안되고 이런단 말이죠.
그래서 임제 선사도 임제 스님도 수행하는 사람을 호되게 혼낸단 말이에요. 수행 하는거 人爲的이고 作爲的인거다 이미 完成되어 있는 줄 모르니까 修行하려고 애쓰는 거다. 이런 얘기들을 하면 여러분들이 法相스님 요즘 破格的인 얘기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건 뭐냐면요. 진짜 工夫를 가르쳐 주는 스님들 말씀을 못 알아들어서 그래요. 方便을 걷어내고 本質을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큰 스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똑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니까요. 물론 수행하라는 얘기도 하죠. 그건 어디까지나 方便으로 하는 겁니다. 方便으로 하는 겁니다. 方便을 다 걷어내면 修行이라는 것 또한 事실은 必要 없다라는 것이 本質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제가 하는 얘기가 아니라 다 禪師들이 말씀하신 얘기 아닙니까. 그것은 곧 自身의 삶을 許容하라는 겁니다. 사는 게 그게 修行이에요. 사는 게 그게 工夫고.
그러니까 지금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써 나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認定하고 許容하고 삶 그대로의 그 흐름을 타고 가는 거에요 그게 수다원이에요. 흐름을 타는 거. 흐름을 타는거는 통나무가 강물을 따라 내려갈 때 기를 쓰지 않습니다. 그냥 흐름에 따라 흐를 뿐이지 자신의 인생이라는 흐름을 따라서 분별하지 않고 그냥 따라 흐르면 됩니다. 分別하지 않고 是非걸지 않고 解釋하지 않고 난 이래서 괴로와 저래서 즐거워 저 사람 나보다 잘났는데 난 저게 부러워 하지 않고 저 사람처럼 살아봐야지 하지 않는답니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이대로 지금의 나 여러분들은 지금의 내가 되세요. 나보다 잘난 누구처럼 되려고 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은 相일 뿐이고 格式일 뿐입니다. 格式을 破하는 것이 바로 佛敎에요.누가 멋있으니까 그 사람처럼 나도 해야지 그게 멋있는 게 아니에요. 나답게 사는 삶이 가장 멋 있는 삶입니다.
머릿속에 相이 있고 틀이 있으니까 이 틀에 안 맞으면 못난 사람처럼 보이는 게 우리의 分別心입니다. 그런 格式들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의 世界 속에서는 一卽多 할 때 一, 一의 世界에서는.... 스님이나 재가신자나 아주 수준 낮은 방편일 뿐입니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깨달음에 가깝다. 이건 진짜 유치한 방편이구요. 이건 하나의 제도일 뿐인 거에요. 승복을 입을까 말까 하는 그건 정말 유치한 방편이고. 스님들은 도가 있고 재가신자는 도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너와 내가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부처와 내가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었는데 내가 왜 깨달음을 못 얻느냐? 전 이 사실에 대해서 내가 확 와 닿는데 꽤 오랜 세월이 걸렸어요. 부처님은 당연히 위대했으니까 저리 되셨지 내가 어떻게 저렇게 까지 되겠느냐? 이런 生覺이 언제나 들었단 말이죠. 이거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방편이었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니까요. 이 말은 뭐겠습니까?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란 소리입니다.
부처님과 여러분이 한 티끌도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格式 속에서나 다르죠. 틀속에서나 相속에서나 다를 뿐이죠. 부처님은 부처님이고 출가하신 분은 출가하신 분이고 나는 몇 천년 지난 사람이고 나는 공부도 못하고 수행도 못하고 오래 앉아 있지도 못하고 나는 여자고 나는 재가자고 一卽多 할 때 多의 세계 속에서 일어난 일이지 一의 세계 하나의 세계 속에서는 아무런 差別이 없어요. 그러니까 金剛經에서는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 모든 相이 相이 아니라는 것을 딱 본다는 것이 그것이 즉시 여래를 보는 거에요. 相에는 그 어떤 差別이 없습니다. 서로 다른 게 있을 뿐이지. 나라는 存在가 살아온 方式이 다 하나의 相이지 않습니까? 나는 이런 직장을 가지고 이런 일을 하고 이런 삶을 산다. 相의 次元에서는 서로 다 다르죠. 저마다 자기의 相의 次元 一卽多 할 때 多의 次元 저마다 자기 相의 次元, 자기 존재의 次元에서 자기 존재의 삶을 통해서 부처의 길을 간단 말입니다. 부처의 길을 간다고 할 것도 없죠. 부처를 쓰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다만 내가 妄想을 가지고 다만 衆生이라는 妄想 속에 빠져 있을 뿐이지. 지금 이 자리에서 살면 되는 거에요.
여기 계신 분들이 지금 딱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집에 가면 자식 밥해 줘야 하구요. 똑같이 겨울에 반팔 입고 다니면 감기 걸리고 부처님도 상한 음식 드시고 배탈이 났단 말이죠. 불교 공부를 하면 하나 아프지도 않고 이런 얘기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아픈 사람들은 수행을 잘 못 해서 아프다 스님이 아프면 아픈 것도 스님이 수행을 안 하니까 아프지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修行은 그런 神秘的인 게 아니에요. 그런 超越的인 게 아닙니다. 지극히 人間的인 거에요. 어떤 禪師 스님은 그렇게 얘기했어요. 修行은 그냥 道고 사람이에요. 사람이 바로 法이고 사람이 바로 道다 가장 인간미 넘치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부처님의 니까야 경전을 보십시요. 가장 인간미 넘치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목이 막히면 아난에게 물을 떠오라고도 시키고 아프고 병이 나시기도 하고 감기 걸리시기도 하시고 아난 이전에 수많은 제자가 시봉을 했는데 시봉하기 싫어서 도망가기도 하고 그럼 부처님이 붙잡아서 저기 갈 때까지만 같이 가자 부탁도 하고 그런데도 뿌리치고 도망치기도 하고 다시 와서 죄송하다고 하고 아주 人間 그 自體라는 거죠. 우리가 이렇게 幻想에 빠져있는 이런 깨달음을 生覺하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다. 깨달음을 얻을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삶을 사는 거에요,.
부처님이 갑자기 부처님이 딱 되고 나니까 외모가 32상(相) 80종호(種號)로 몸이 확 뒤바뀌었느냐. 갑자기 귀가 쭉 늘어지기 시작했느냐 발바닥에 갑자기 전륜 마크가 딱 박히기 시작했느냐 그건 그냥 한 소리죠, 그걸 그냥 믿으면 안 되는 거죠 진짜로 믿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重要한 것은 지금의 내가 나의 삶이 아무 問題도 없었다는 事實을 알아야 돼요. 過去에 지나온 내 모든 삶은 完璧했어요. 다만 머리 속에 내 妄想 分別만 완벽하지 않았다고 生覺하고 있을 뿐이지
지금 이 瞬間 完璧한 삶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아무 相關 없습니다. 언제나 完全합니다. 아무 相關이 없어요. 相의 次元, 꿈의 次元, 꿈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무슨 相關이 있습니까? 꿈이야 무슨 꿈을 꾸든 무슨 相關이 있습니까? 낼 모래 會社에서 잘리든, 돈을 한 일억을 벌게 되든, 심지어 죽게 되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차피 이 世上은 꿈인데 꿈속에서 그냥 잠깐 왔다 가는 거지 심지어 죽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죽음은 심각한 게 아닙니다. 아무런 심각할 것이 아니에요. 어차피 우리 삶 자체가 反復하면서 삶을 깨달아 가는 過程인데 꿈을 實踐 하는 것과 똑같아요. 꿈속에서는 꿈이 진짜인 줄 알자나요. 그런데 꿈을 깨고 나면 좋은 꿈은 계속 꾸고 싶었던 그 마음 그 執着이 虛妄하다는 걸 알잖습니까? 虛妄하다는 걸 알잖아요. 꿈속에선 모르지만.....
우린 지금 더 오래 살아야 한다 난 빨리 죽으면 안 된다 生覺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죽고 나면 그게 幻想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거죠.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큼 虛妄하고 어리석은 게 없다 엊그제 니까야 경전에도 나왔지 않습니까? 죽음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막연하게 生覺으로 죽음이 이럴 것이다 두려움을 만들어 놓고 그 두려움에 빠져서 괴로워하면 그 얼마나 虛妄하고 어리석은 일이냐..... 이 事實을 안다면 앞으로 여러분 앞에 앞으로 있을 삶은 언제나 完全하고 언제나 부처의 삶이 나라는 存在를 通해서 隔別性으로,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自己 自身의 個別性을 通해서 固有性을 通해서 나로 드러난 거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라는 相을 정해놓고 그 相으로만 달려가려고 하면 안되고 나, 지금의 나의 모습,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許容하고 認定하고 이 삶을 그대로 살아 나가는 겁니다. 그랬을 때 깨달음이 옵니다. 깨달음을 찾는 동안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깨달음을 찾으려고 눈을 부릎 뜨고 찾고 있을 때 참선하고 깨달으려고 하다 깨달은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깨달으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다가 그것조차 놔버렸을 때 홀연히 깨닫거나. 그것조차 딱 놔버리고 ‘나한텐 깨달음이 안 오나 나는 안되나 보다’ 하고 탁 포기했을 때 그랬을 때 들에 있는 꽃 한 송이 보고 깨달음이 확 오기도 하고 바람결에 느끼기도 하는 거죠. 그러니까 노력을 또 안 해도 안돼요 노력을 아예 애초부터 안 한 사람은 아예 올 기회가 없죠 그런데 이 노력이라는 게 엄청난 노력이 아니라 지금 이 瞬間 이 자리를 온전히 受容하고 받아들이고 法門 듣고 觀하고 그것밖에 없어요. 觀한다는 것은 人爲的인 게 아니에요. 요즘 觀하는 修行을 일부러 人爲的으로 하려고 해요 앉아가지고 呼吸을 막 애쓰면서 하는데 觀한다고 하는 것은 分別하지 않고 애쓰지 않고 그냥 본다는 겁니다. 그냥 보는 거처럼 쉬운 게 어디 있어요? 그냥 아는 것처럼 쉬운 게 어디 있습니까?
止觀에서 止가 중요한 게 아니라 觀이 중요한 겁니다. 止는 힘이 들어가고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集中을 계속 유지하면 얼마나 힘들어요 그런데 止가 진짜 공부가 아니에요, 觀이 진짜 공부지. 觀은 그렇게 애써서 아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아는 거지. 여러분 방바닥 한번 손을 딱 대보세요. (차가와요) 차갑다라고 딱 아는 거. 그게 힘이 듭니까? 차갑다고 아는 거 그게 힘이 듭니까? (죽비 소리) 이 소리를 듣는 게 힘이 들어요? 바로 그게 觀하는 겁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환히 알고 있는 겁니다. 다만 分別하지 않고 훤히 알고 있는거에요. 그냥 아는데 뭘 수행이라고 합니까 自然스러운 狀態가 觀하고 있는 狀態지.... 다만 우리는 그 自然스러운 觀하고 있는 狀態를 벗어나서 妄想 分別 是非를 자꾸 하니까 그게 문제지. 수행이라는 것 힘들여서 고통스럽게 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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