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하지 말고 다만 인연 따라 살라
보통 상담을 하고 싶어 찾아오시는 분들을 뵈면 거의가 '난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만큼은 이뤄야 한다'는
執着心과 慾心이라는 틀을 미리 만들어 놓고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데 대한 苦痛을 하소연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틀’이 自身을 괴롭히는 것이니 그 틀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면, 즉각 반발을 합니다.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지 말고 괴로움만 없애 달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보통 ‘얼마 이상은 벌어야 한다’거나, ‘어떤 위치 이상은 올라야 한다’거나 하는 그 執着心과
慾心의 틀을 미리 딱 定해 놓고 그 틀에 執着한 채 그렇게 되지 않아 괴롭다고 하소연 하지만, 애써 求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 執着 欲望의 틀만 깨고 나오면 '지금 이 자리' 에서 穩全한 幸福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미리 틀을 만들고 目標를 定해 놓으니 그 目標에 到達하지 못했을 때 괴로운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慾心과 執着이라는 짐을 잔뜩 짊어지고 삶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우리 삶 자체가 무겁고 괴로워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만큼은 살아야 한다'하는 그 바램을 놓아버리면 '지금 이 자리' 에서 特別한 狀況이 없어도 幸福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께서는 '佛法은 애써 求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平常心을 유지하여
特別한 일이 없게 함이니, 추우면 옷을 입고 더우면 옷을 벗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면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者는 나를 비웃겠지만 智慧로운 者는 무슨 뜻인지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佛法은 애써 眞理를 求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平常心을 유지하여 特別한 일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깨달으려고, 돈 벌려고 , 잘 살려고, 그렇게 애쓰고 그렇게 특별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애씀 없이,
特別한 일 없이 그냥 그냥 自然스럽게 물 흘러가듯 平和롭게 사는 것, 그것이 佛法에 이르는 길입니다.
事實 우리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지요. 누구나 추우면 옷을 입고, 더우면 옷을 벗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을 자게 마련이지요. 또 누구나 돈이 필요하면 돈을 벌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에 빠집니다. 그것이 턱 놓고 自由롭게 사는 平凡한 日常입니다.
그런데 問題는 이렇게 平凡하게 그냥 하고 살면 되는데 자꾸 分別을 짓고 慾心을 부리고 執着을 하는데
있습니다. 추우면 옷을 입으면 되는데 '더 좋은 옷'을 입으려 慾心부리고, 배고프면 먹으면 되는데
‘더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慾心부리지요. 어떤 집이나 차가 있으면 그만인데, 누구나 더 넓고 좋은 집,
더 크고 더 좋은 차를 끊임없이 欲望합니다.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면 되고, 또 사랑하다 헤어지게 되면 自然스럽게 離別을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합니다.
因緣이란 그렇게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딱 定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사람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執着하고, 어떻게든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만 사랑이 이루어진 것으로 錯覺하니 그런
執着과 欲望 어리석음에서 괴로움이 始作되는 것입니다.
執着心과 分別心을 다 내려놓고 살면 언뜻 못 살 것 같고, 또 時代에 뒤떨어질 것 같고, 이래저래
도통 어떤 일도 안 될 것 같지만 事實은 執着心과 分別心을 다 내려놓고 마음을 텅~비우고 살 때
삶에 참된 自由 平等 平和 幸福이 깃듭니다.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特別한 執着心을 내려놓은 채, 다만 다가오는 因緣에 應하면서
물 흐르듯 사는 삶, 그것이 애써서 特別히 求하지 않는 平常心의 삶입니다. 이런 平常心의 삶을
法性偈에서는 不守自性隨緣成이라고 했지요. 特別한 自性을 固執하지 않고 다만 因緣의 흐름에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自由롭습니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