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7강

장백산-1 2015. 2. 16. 15:02

 

 

 

 

법상스님의 법성게 강의 제7강   |영상법문 녹취록  


무위행 |2015.02.15.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248                                

 

1. 華嚴一乘法界圖 지금 강의 하는 중이었습니다. 오늘의 法性偈의 강의는


초발심시변정각 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常共和

이사명연무분별 理事冥然無分別  십불보현대인경 十佛普賢大人境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게송인데요

‘初發心時便正覺’ 하면 처음 일으킨 이 한 마음, 發心한 이 한 마음이 바로 곧 깨달음이니

'生死涅槃常共和'  生死와 涅槃이 함께 어우러져있다.

‘理事冥然無分別’ 理致, 本質界과 現象世界가 아득하여 分別되지 않으니

‘十佛普賢大人境’ 이라. 모든 부처님과 보현보살님의 큰 어떤 설함의 경지가 바로 이와 같다 하는 얘깁니다.

 

어~ 오늘 이 게송부분이, 어~ 華嚴經의 아주 그 重重無盡의 그 法界緣起라고 하는,

혹은 뭐 ‘事事無碍法界’ 라고 하는 화엄경의 그 어떤, 아주 그 大乘佛敎의 꽃이라고 하는 그 蓮華藏世界의,

華嚴世界의 어떤 實相을 보여주고 있는 게송이라서 너무나도 놀라우면서도, 禪佛敎의 어떤 바탕이 되는

思想이라고도 할 수 있고, 大僧佛敎의 核心이 되는 그 思想입니다.

思想이면서 어렵습니다. 아주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初發心時便正覺’ 이랬습니다.

 

처음 發心한 그 때가 初發心을 일으킨 그때가 바로 正覺을 이룬 때와 같다.

뭐 이렇게 이야기 한 理由는 우리가 지금 衆生이란 말이죠 근데 내가 깨달아서 부처가 되겠다 하고 發心을

하면 그 때 初發心이 正覺, 완전한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 이 말은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냐하면

 

지금 내가 깨닫겠다 한다고 해서 내가 바로 부처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말을 했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의 본바탕이 어리석고 分別妄想에

시달리고 하는 衆生이다 이렇게 生覺하지만, 華嚴思想에서 가장 核心的인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錯覺 속에 빠져있다는 겁니다. 衆生이라는 錯覺 속에 빠져있다.

내 삶은 괴로움이다 라는 錯覺 속에 빠져있을 뿐이지 本來 우리 삶은 괴로움이 아니고

本來 우리 삶은 이미 完全하게 完成되어있다. 이 自體로써 完成되어 있다.

우리가 그냥 中立的인 아무런 是非分別 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을 벌이고 있는데

그 일은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할 수 있는 아무 分別할 根據가 없는데, 中立的인 그 일을

우리는 마땅히 머리를 굴려서 分別을 함으로써 그 일을 衆生의 境界,對相으로 바꿔놓는 겁니다.

 

 


2. 그냥 배고픈 어떤 사람이 있어요. 배고픈 어떤 사람이 배가 고파서, 밥이 있고, 김치가 있어서

밥을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김치와 밥을 먹고 있다.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고 그 사람이

밥과 김치를 먹고 있습니다. 그건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뭐 아름다운 겁니까? 아니면 불쾌한 겁니까?

유쾌한 겁니까? 행복한 건가요? 불행한 건가요?

밥과 김치를, 배고픈 사람이 밥과 김치를 먹고 있다 이건 그냥 中立的인 일입니다.

그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自然스러운 일이에요.


그런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야! 내가 옛날에는 정말 잘 살고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반찬에 그냥 막 상다리가

부러지게 밥을 먹고 살았는데 내가 이렇게 가난해져서 밥과 김치밖에 못 먹고 사니까 정말 비참하구나!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되나! 나, 이렇게 밖에 못 먹고 사는 내 人生은 정말 完全히 亡한 人生이구나!

이렇게 生覺하면서 막 비참해하면서 밥과 김치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어떤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밥을 한 번도 그렇게 진수성찬으로

배부르게 먹어본 적이 없는데, 나는 이렇게 풍성한 밥과 이렇게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이게

행복한 일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음~ 저는 이렇게 점심을 먹을 때 김치를 너무 좋아해서 특히나 우리 법당 김치가 너무 맛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반찬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한 번씩 보살님들한테 혼나는데 반찬 두루두루 안 먹는다고.

반찬이 있음에도 이게 때로는 뭐 좀 귀찮기도 하고 또 때로는 뭐 굳이 다른 반찬이 굳이 필요도 없고 그래서

그냥 그릇 하나만 들고 공양간에 가서 밥을 뜨고  그 밥 위에다가 김치를 수북이 올리고 그러고는 그냥 들어가서

저 방에 가서 그냥 이렇게 천천히 씹어서 먹기도 하고 그러기도 하는데

그 自體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3. 근데 아프리카서 아이들이 다 죽어가는 그 狀況에서 김치와 밥을 먹는다면 너무나 행복해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비참해 할 수도 있단 말이죠. 이 김치와 밥을 먹는 이 상황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주어진 삶,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삶의 條件은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이나,

뭐 어떤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봤을 때는 너무나도 놀라운 幸福한 삶이다.

하루하루가 놀랍고도 놀라운 幸福한 삶을 누리면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중인 겁니다.

심지어 저 전방에서 막 그냥 힘들게 근무하는 군인들조차, 생도들조차 하루하루 아침에 일어날 수 있고,

아침밥 먹을 수 있고, 물 먹힐 때 물 마실 수 있고, 아플 때 약도 받아먹을 수 있고....

 

근데 이것을 불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머리가 하는 일이지 삶 自體는 그런 分別이 전혀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깨달은 부처님의 삶은 우리의 삶과는 전혀 다른가? 그게 아닙니다! 삶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마음 姿勢가 달라지는 거죠. 마음이 달라지는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깨달음을 얻는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삶은 그대로 유지가 될 겁니다.

그냥 밥 먹고, 무리하면 아프고 하듯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집에 가는데 뭐 차를 타고 갈 필요도 없고

기름을 안 넣어도 차가 그냥 가고  이런 게 아니란 말이죠. 잘 못 먹으면 배탈 나고....똑 같습니다 평상시같이...

 

그러니 그 마음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이죠. 이처럼 本來 우리는 이미 完全하게 깨달아 있기 때문에

뭐 닦고 자시고 뭘 해야 되는 이런 存在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첫 發心하는 그 때가 바로 正覺을 이룬

때와 같다.  그래서 이 初發心이 重要하다. 發心이 뭐냐하면 지금까지는 生覺이 나를 이끌고 왔습니다.

生覺, 妄想, 分別, 煩惱 이런 思量分別心이 나를 이끌고 왔어요. 그러다보니까 얼마나 억울하게 살았습니까?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生覺이 만들어낸 머리속 이 虛像의 世上, 幻影의 世界를 살아온 겁니다.

삶이라는 진짜배기 實相은 내 던져버리고, 차버리고.....

여러분! 진수성찬이 있을 때, 그러고 막 남들하고 같이 막 먹을 때, 경쟁도 되고 이럴 때 이게 그렇게 맛있지가

않아요.  남들보다 빨리 먹어야 되고 막 그냥....

 

 

 

4. 그런데 혼자 조용히 앉아서 맨 밥을 입에 넣고 가만히 씹고, 씹어보세요. 혹은 거기다가 그냥 김치 작은 거

김치 한 조각만 입에 딱 넣고 가만히 씹어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 면요, 그냥 밥과 김치를 나는 분명히 씹고

있는 거 밖에 없는데, 일상생활 속에서 밥 먹는 것과 제가 지금 말한 이 밥 먹는 것은 차이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왜 그런 差異가 나냐면 밥과 김치를 입에 넣고 씹는데요, 입에서, 아! 그야말로 아! 이것이 천상의

맛이구나! 이거 제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단맛이 정말 입에서 이게 막 설탕 같은 그런 단맛이 아니라 아주

단~맛이 나서 어떻게 이렇게 맛이 있을 수가 있지? 이럽니다. 한 번 경험해보세요.

 

그러니까 이런 삶을 여러분들이 經驗해 본적이 있느냔 말이죠. 그냥 밥 먹고, 반찬 먹고, 이 반찬 저 반찬 막 잔뜩

먹어야 되니까 그 밥 한 숟갈만 먹고 반찬 하나만 넣고 오래도록 음미하면서 먹는 그랬을 때, 내 입에서 침이 나와

가지고 이게 섞이는데서 그 꿀맛 같은 그 아름다운 행복, 그 놀라운 밥맛의 비밀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잘 못

느끼고 살 겁니다. 허겁지겁 먹기 바쁘니깐....그런데 그 밥 한 공기, 한 숟갈 속에 그냥 우리가 허겁지겁 먹어버릴

수도 있지만 놀라운 맛을, 천상의 맛을 음미하면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밥을 먹으며 딴 生覺을 하고,

妄想을 피우고, 야! 이따가 또 뭐해야 되지? 공부해야 되는데, 일해야 되는데, 뭐하고, 뭐하고, 뭐해야 되는데

이런 온갖 妄想 分別 生覺을 하면서 밥을 먹게 되면 그 밥이 어떻게 그 맛이 있겠습니까?

밥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그게 맛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먹을 뿐이죠.

그래서 事實은 많은 사람과 함께 밥을 먹을 때는 진짜 제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어요.

입으로는 밥을 먹고 있지만 밥을 먹고 있다 라는 이 생생한 진짜배기 삶은 오히려 無視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밥을 먹는다 라는 지금 이 現實 삶은 우리에게 없는 거예요. 그냥 입에 뭐가 들어가고 있는 것일 뿐이지

생생한 진짜배기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5. 삶을 산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머릿속에서 妄想을 피우고 아니면 남들과의 對話 속에서 그 虛妄한 말의

잔치 속에서, 生覺의 잔치 속에서 놀고 있었던 것 일 뿐이죠. 그걸 보고 人生을 산다, 이렇게 生覺하는데 그건

人生을 사는 게 아니고 妄想, 分別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겁니다. 그야말로 相의 世界 속에서, 觀念의 世界 속에서,

生覺과 分別 世界 속에서, 虛妄하게 人生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진짜배기 생생한 삶, 정말 놀라운 每瞬間瞬間의 놀라운 삶, 뭐 놀랍다는 표현할 수도 없어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니까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의 삶은....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이 삶을 우리는 내 팽개치고, 머릿속에서 妄想 分別 生覺으로 만들어낸 幻相의 世上,

환영의 세상을 살고 있읍니다.


똑같이 이 육군사관학교를 다니고 있어도, 똑같이 군생활을 하고, 똑같이 어떤 직장을 다니고 있고,

똑 같이 학교를 다니고 있어도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되게 행복하게 공부하면서 다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정말 학교 다니는 게 地獄에 가는 것 보다 싫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직장도 마찬가지고. 부대도 마찬가지고. 이걸 삶, 그냥 하나로 똑같은데, 어떤 妄想 속에 사느냐에 따라서

어떤 生覺과 觀念 속에 사느냐에 따라서 幸福할 수 도 있고 不幸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똑같은 現實을 經驗해도 結局 그것은 똑같은 現實이 될 수가 없죠.

어떤 사람은 맨밥만 먹어도 天上의 음식을 맛보면서 그 순간을 누릴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막 비싼 뷔페를 먹고 있어도 전혀 그 瞬間을 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은 이 現實에 問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내가 어디에 集中하면서 어떤 妄想 分別에 集中하고

살았는지 그러니까 이게 世上의 問題가 아니라 自己 마음의 問題인거죠.

 

그래서 이 初發心이 얼마나 重要하냐? 그래서 이 發心을 했다는 것은 내가 이런 生覺과 妄想, 分別의 世上을

虛妄하게 살아오던 이런 習慣을 이젠 버리겠다. 내가 이제는 내 生覺으로 머리속에서 꾸며낸 이 거짓 世上을

사는 것 이런 인생들을 삶을 이제는 내가 내버려보겠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는데, 이게 가짜인 게 분명하게

드러났으니까. 우리 人生이 얼마나 虛妄합니까? 주변상황에 울고 웃는 그런 삶이 얼마나 虛妄한지가 딱 드러났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런 虛妄하고 거짓된 삶을 살지 않겠다. 진짜배기 생생한 삶을 내가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내가, 내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꾸며놓은 이 머릿속에서 만들어 놓은 世上에 내가 거기 들어 가가지고 울고

웃고, 늘 生覺으로 만들어 놓은 즐거움 속에 빠져서 좋아했다가 生覺으로 만들어 놓은 괴로움 속에 빠져서 막

괴로워했다가 이런 虛妄한 演劇같은 삶을 사는 것을 난 이제 抛棄하겠다. 그리고 난 이제 진짜 생생한 삶을

살아보겠다. 그게 發心입니다. 그것을, 그런 삶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를 衆生으로써 사는 삶의 方式도

있고. 그러나 지금 이 자리를 똑같이 살지만, 完全한 幸福으로 사는 方法도 있다.


이런 眞實을 가르쳐주는 분이 부처님 아니겠습니까? 그걸 딱 깨닫고 나면 그게 바로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이고,

그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내가 發心을 하게 되면,

 

내 첫번째 發心, 初發心  내가 한 번 깨달아보겠다, 이 깨달아보겠다 가 거창한 게 아닙니다.

이 生覺과 分別 妄想으로 만들어 놓은 虛妄한 거짓 世上을 사는 게 아니라  진짜 世上을 살아보겠다.

그...,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괴롭다 라고 生覺하는 게 이게 머릿속의 괴로움이지 진짜 괴로운 건

아니잖아요. 그 어떤 얘기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6. 幸福이라 生覺하는 것도 그게 진짜 幸福은 아닙니다. 내 生覺이 幸福이라고 解釋했을 뿐이지.

옛날과 比較해서 지금은 더 괴롭다. 뭐 어떤 점과 比較해서 지금은 괴롭다. 이렇게 생각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지.

진짜 괴로운 삶이라는 건 없어요. 진짜 즐거운 삶이란 건 없고. 그래서 내가 한 번 딱 發心을 하게 되면 진짜 제대로

된 發心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그 發心한 그 자리가 바로 正覺인 것과 똑같은 그런 功德이 있다.

佛敎工夫를 마음工夫라고 하잖습니까? 事實은 一切唯心造란 말이 一切가 우리 마음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世上도 事實은 그렇죠. 富者가 되겠다 마음내면 富者가 될 수가 있습니다. 마음내면 뭐 다 할 수 있죠. 그런데

이 世上은 物質世上이지 않습니까? 이 物質世上이 내가 마음 낸 대로 막 바로바로 이렇게 現實로 됩니까?

바로바로 안 되죠. 世上 사람들이 全部 다 富者가 되고 싶지만, 다 富者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이 物質 世上은 이게 現實이 되는데 時間이 걸린단 말이죠. 거칠다 거친 境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낸 世上은 어때요? 이 내 마음이니까, 내 마음이니까 마음工夫는 직바로 一切唯心造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富者가 되는 것은 마음 낸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닐 수 있지만, 잘 생기고 싶다! 마음 낸다고

바로 잘 생겨질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의 본바탕을 확 바꾸긴 힘들죠. 뭐 어느 정도는 바꿀 수 있겠지만.

그건 物質의 工夫이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이 마음의 工夫는 마음의 工夫이기 때문에 마음내면 바로 돼버립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이 工夫는 마음工夫 아니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내가 한 번 깨어나 보겠다.

이生을 넘기지 않고 내가 한 번 부처가 돼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딱 세우면 이 마음工夫기 때문에

이 본바탕인 마음에서 뭐 본바탕인 마음과 내 마음이 따로 나뉜 것도 없지만 方便으로 表現을 한다면

그 根源의 마음次元에서 우리가 마음 낸 대로 되게 만들어준다니까요.

스승을 보내주고, 좋은 도반을 보내주고, 책을 펴면 좋은 책을 보내주고,

TV를 켜면 나도 모르게 자꾸 그 마음을 낸 사람은 자꾸 불교 TV나 불교방송에 시선이 가게 되고,

그런 책에 시선이 가게 되고, 그 스승님과 파장이 맞게 되고, 공부의 인연이 자꾸 나에게 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내 스스로도 자꾸 工夫에 關心이 가게 되고, 그것이 마음의 힘이에요.

마음을 딱 내면, 마음만 내면 뭐 우리가 이 世上에서 할 것은 마음 내는 것 밖에 없습니다.

마음만 내면 物質世界는 저절로 따라 오는 거지 物質世界를 억지로 바꾸려고 애쓸 필요가 없단 말이죠.

 

마음을 내고 그냥 내 맡기면 되는 겁니다. 마음 내고 내 맡기면. 처음에는 우리가 그걸 모르니까 기복적으로

뭔가 기도하는 게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하고 빌기 밖에 안합니다. 좋은 대학가게 해주세요. 딸이 뭐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하고 기복적으로 빈단 말이죠. 그 어느 정도 기복적으로 빌던 것에서 이제 공부를 조금 더 하게

되면 비는 이런 祈福 佛敎에서 탈피해가지고 이제는 어떻게 되냐 하면, 아 지금 이 瞬間 내가 빌지 않더라도

삶은 이리도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굳이 빌지 않더라도 아! 이대로 滿足하는 삶을 살기

始作하게 됩니다.

 

 


7. 그 祈禱하고 빈다는 건 뭐예요? 願하는 걸 이루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 欲心과 執着이 기죽이는 삶이었다가

人生을 턱 내 맡기게 됩니다. 그냥 滿足하게 되는 거예요. 그 瞬間瞬間 아 이만하면 充分하구나! 滿足할 수

있구나! 아 지금 여기 주어진 삶 自體가 아름다운 것이구나!  그래서 그냥 이제 滿足하게 되고, 自足하게 되니까

欲心과 執着이 많이 떨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 삶에 特別히 바라는 것도 없고 特別히 반드시 돼야만

된다는 生覺도 없고 그냥 삶을 宇宙法界에 턱 내 맡기고 살게 돼요. 이 法身부처님을 무한히 信賴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 펼쳐지는 삶 自體를 無限히 信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삶 自體를 宇宙法界에 텅하니내 맡기고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佛敎工夫를 하다보면 이제 괴로울 게 별로 없어지게 됩니다.

 

삶을 完全히 우주법계에 턱 내 맡기고 사니까 모든 걸 法身佛께서 알아서 끌고 가는데, 眞理가 나를 끌고 가는데,

내가 굳이 뭘 억지로 이렇게 저렇게 해야 되겠다는 生覺이 없이 그냥 宇宙法界의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상당히 便安해지죠. 근데 마음이 그렇게 便安해진다 할지라도 이 알음알이라는 生覺 妄想 分別이

완전히 딱 떨어져 없어진 건 아닙니다.

 

내가 이제 머리로 어느 정도 이해해서 가슴으로 어느 정도는 그런 내맡기는 삶을 살고 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알음알이 妄想 生覺 分別心은 계속해서 피어올라오는 거예요.

또 여러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인 宇宙法界에 내맡기는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서

마음이 상당히 幸福해지고 便安해지고 自由로워졌어요. 滿足이 많아지고 執着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여전히 執着은 계속 나를 괴롭힙니다. 여전히 친구들이 어디 投資하면 좋다더라 하면 거기

솔깃하고, 자식의 성적에 더 執着하게 되고, 끊임없이 자꾸 내가 좋아하는 것들 이런 거에 欲望과 執着이 계속

올라올 수밖에 없어요. 때론 거기 또 빠지기도 하고. 그걸, 그걸 기분 나빠하거나 그게 내가 退戰했다고 生覺하면

안 됩니다. 當然한 거예요. 虛妄한 分別 妄想의 習慣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건데. 한 방에 끝나겠습니까.?

근데 그렇게 마음工夫하다가 어느 程度는 便安해졌는데, 그러다가 이제 내가 딱 이 發心을 한단 말이에요.

내가 야! 이렇게 사는 게, 이거 머리로 되는 게 아니구나!  내가 머리로, 알음알이 生覺 分別 妄想 煩惱 머리로만

佛敎工夫해봤는데 그게 다가 아니구나! 그래서 공부가 끝나는 게 아니구나! 요즘은 내 마음이 상당히 便安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工夫가 끝나지 않는 것이구나. 이게 다가 아니구나. 내가 진짜 發心을 해서 진짜 工夫를

끝내야 되겠다. 쉽게 말해 性稟, 성품자리를 보고, 내가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거구나.

이렇게 딱 答이 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인제 진짜배기 工夫를 하게 되는 겁니다.

진짜, 진짜배기 工夫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딴 건 關心이 없어지죠.

世上에 世俗的인 거에 關心 아무리 가져봐야 그~  돈, 財産, 名譽, 權力, 地位, 學歷, 인기등등 그런 껍데기들

그 아무리 많아봤자 그 뭐 고작해야 몇 十年하고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이 마음工夫는 數億劫을 輪廻하고, 輪廻하고, 輪廻해오면서 지금까지도 풀지 못한 課題 아니겠습니까?

이것 하나만 딱 끝내버리면 다음生, 그 다음生, 그 다음다음生 輪廻할 必要가 전혀 없고, 더 이상 허망한 苦痛과

煩惱 妄想 헛된 生覺으로 分別心 生死心으로 시달릴 필요가 없는데  이게 얼마나 참! 얼마나 比較될 수 없는

工夫입니까? 이게...이 工夫는요, 누가 나한테 大統領을 시켜준다 하고, 마~ 數兆원을 갖다 준다고 그럴테니까,

그런 工夫 하지마라. 마음工夫 하지마라고 한다 하더라도 아니 내가 미쳤다고 내가  그따위 大統領이나 겨우

數兆원 따위를 가지고 내가 하는 마음工夫랑 바꾸겠느냐 하고 한마디로 물리칠 수 있어야 되는 거죠. 事實은.

이 虛妄한 輪廻의 와중에 놓여있는 우리가 돈 많이 갖어봐야 뭐하겠습니까? 그렇다고 돈 벌지 마라. 그렇게 전혀

잘못됐다. 이런 말이 아니라, 그 自然스럽게 내가 내 삶에 살면서 벌어지는 거는 그냥 벌어 쓰는 거죠.

그 내게 주어진 나의 어떤 뭐 自己가 지은 功德이 있고, 福德이 있으면 그 공덕, 복덕이라고 받아쓰면 되고,

많으면 남과 나눠 쓰면 되고, 좋은 곳에 그냥 쓰면 되는 거죠. 그냥 福이야 뭐 많고 적고가 아무 相關이 없습니다.

富者고 가난하고 아무 相關이 없어요. 이 마음工夫에 있어서는.

 

 


8. 그렇게 인제 마음工夫를 하다가 그야말로 인제 탁 그야말로 진지한 發心을 해서 한 消息을 딱 해서 性稟을

봤다. 뭐 初見性 이렇게 表現을 하는데, 참性稟을 봤다. 물론 그야말로 그 瞬間 이제 놀라운 變化가 始作되는

것이죠. 그 뭐 어떤 사람은 그러면서 세상이 그야말로 환해지는 것 같고, 그야말로 황홀경에 빠져서 몇 일,

몇 날을 보내기도 하고, 너무나도 놀라운 그야말로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느끼기도 하겠죠.

근데 거기, 거기서부터 疑問이 始作되는 겁니다. 事實은. 性稟, 見性을 할 때부터 疑問이 始作되는 곳, 것이기

때문에 그게 거기서 工夫가 끝난 것이 아니고 그때부터 工夫가 진짜 始作되는 것이죠.

인제는 더 이상 퇴전하지 않고 공부가 된단 말이죠.

 

그럼 인제 중요한 건 그렇게 工夫를 했다할지라도 여전히 虛妄한 生覺, 分別, 妄想이 그때그때 瞬間瞬間 올라오지

않을 수가 없다라는 것이죠. 그럴진대, 지금 우리가 쪼금 알음알이로 工夫해놓고 그러고 나서 나는 여전히 分別

妄想이 있어요. 왜 그렇죠? 뭐 불교를 工夫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애요. 이런 얘기를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우리가 가고 있는 工夫의 過程은 初中高等學校, 大學敎, 大學院으로 본다면

지금 우리는 겨우 中高等學校 쯤~, 마~ 인제 가고 있는 정도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 工夫 水準을 가지고 佛敎工夫 마음工夫에 대해서 어떻다 저떻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요 이렇게 첫發心을 하는 그때가 그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工夫인지 모릅니다.

이 華嚴經에 어떻게 이 ‘初發心時便正覺’ 을 表現하고 있냐면,

 

"만약 菩薩이 初發心에 머문다면 福德과 智慧를 成就하게 되며

生死를 떠나 超世間에 이르며 正等覺法을 두루 얻게 된다."

 

보통 華嚴經에서는 52位라고 해서 뭐 십신, 십주, 십행, 십회양, 십지, 등각, 묘각 이라는 段階를 거쳐서

뭐 깨달음에 든다. 뭐 이런 表現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方便으로 이렇게 얘길 하고 있죠.

근데 이 十信이라고 해서 믿음 열가지 段階의 어떤 믿음. 야! 내가 부처님 工夫한 저 길로만 가면 내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구나 하는 믿음. 아! 이 옛날 큰스님들이 깨달았다 하는 그 깨달음이 分明히 있는 거구나.

佛法僧 三寶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나서 그 다음에 해야 되는 게 바로 十信 다음에 십주인데 십주의

첫 번째가 바로 이 發心住, 初發心住 이럽니다. 여기에 인제 初發心에 대해서 어떻게 經典에 나오느냐하면요,

華嚴經 初發心功德品이란 곳에 이렇게 나옵니다.

 

帝釋天王이 법혜보살에게 물었다.

“佛子여! 菩薩이 처음으로 菩提心을 내면 그 功德이 얼마나 됩니까?” 했더니, 법혜보살이 말했다.

 

 “이 理致는 깊고 깊어서 말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分別하기 어렵고, 믿고 이해하기 어렵고, 증득하기 어렵고,

行하기 어렵고, 通達하기 어렵고, 生覺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가령 어떤 사람이 모든

즐거운 일로써 東方아승지世界에 있는 衆生들에게 한 劫 동안 供養을 하고 五戒를 갖추도록 하며, 南方 西方 北方

네 艮方과 上下方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면, 그 功德을 많다고 하겠느냐?

이 功德을 初發心의 功德에 견주어보면 百分의 일도 미치지 못하고, 天分의, 百千分의 일도, 億分의 일, 百億分의

일,千億분, 百千億分의 일, 나유타 억분, 백 나유타 억분, 천 나유타 억분, 백 천 나유타 억분,

수분, 가라분, 산수분, 비유분, 우파니사타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이 뭐 수분, 가라분, 산수분, 우파니사타분 이런 것은 印度의 無限히 많은 어떤 숫자의 단위라 그럽니다.

初發心을 낸 功德은 수도 없이 많은 이 동방, 서방, 남방, 북방에 있는 수도 없이 많은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 전부를 완전히 즐겁게 해주고 그 사람들에게 불법을 가르쳐주고 오계를 갖추게 해주고 공양해주고

이런 공덕보다 더 크다.

 

 


9. 근데 이런 수도 없이 많은 비유들이 나옵니다. 심지어 또 이럽니다.


“시방에 열 아승지 세계에 있는 중생들에게 백겁 동안 공양하고 그들을 가르쳐서 십선도를 닦게 하고 백 천 억겁

동안 그들을 공양하고 사선에 선정에 머물게 하고 백천겁을 지낸 뒤에 四無量心에 머물게 하고 억겁이 지난 뒤에

 四無色定이라고 하는 最高의 어떤 禪定段階에 머물게 하고 나유타 억겁을 지낸 뒤에 아라한과에 머물게 하고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을 아라한과에 머물게 하고 벽지불도에 머물게 하였더라도 이런 모든 功德은

初發心의 功德에 比較하면 百分의 일 내지“ 아까처럼 나가서 “우파니사타分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佛子여! 이 비유를 그만두고라도, 가령 어떤 사람이 한 生覺 동안에 갖가지 맛 좋은 음식과 향, 꽃, 의복, 당기,

깃발, 일산과 훌륭한 궁전, 보배, 휘장, 그물과 갖가지 장엄한 사자좌와 여러 가지 보배로써 동방의 무수한

부처님과 또 무수한 세계에 있는 중생들에게 공양하며 공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찬탄하며 몸을 굽혀

우러르기를 계속하여 무수한 겁을 지내며 또 저 중생들에게 권하여 모든 이렇게 부처님께 공양하게하고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는 각각 탑을 세우고 그 탑이 높고 크고 무수한 세계의 여러 보배로 이루어져 갖가지로

장엄하였으며 낱낱 탑 가운데 무수한 여래의 형상을 모시고 광명이 무수한 세계에 두루 비치며 이렇게 수없는

겁을 지내었고 남서북방과 간방과 상하방도 역시 이와 같이 하였더라도 이 사람의 功德은 初發心의 功德에

比하면 百分의 일 내지 우파니사타分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아! 우리가 뭐 想像할 수 없는 그냥, 경전의 비유가 이런 식입니다. 아무리 뭐 놀라운 공덕을 짓고 해도

이 初發心 功德에 미치지 못한다 하는 얘기에요. 이렇게 이제 수도 없이 많은 비유를 들고 나서 뭐라고 얘기

하냐 하면 發心을 하게 되면, 發心을 하였으므로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恒常 三世의 모든 부처님이 그를 記憶해주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게 되며 妙한 法을 주실 것이고

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性稟이 바로 平等해지며 깨달음을 돕는 가르침 즉 37 조도품을 다 닦은 것이 되고

모든 부처님의 힘과 두려움 없음, 여래 십력과 사무소외라고 하는 것을 성취하고

 18불공법 뭐 이건 아까 십력사무소외와 삼념주대비라는 것도 다 갖추게 되고

모든 부처님의 설법지혜를 다 얻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발심함으로써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다.

이 사람은 곧 모든 부처님과 평등하게 되고 곧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함께 칭찬하게 될 것이고

능히 법을 설하게 될 것이고 온 세계에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게 될 것이고 일체 세계는 振動할 것이고

일체 세계를 비출 것이며 일체 세계의 나쁜 고통들이 멸할 것이고  일체 국토를 깨끗이 장엄할 것이며

 

능히 일체 세계에 성불함을 보일 것이며 능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게 할 것이며

곧 능히 일체 법계의 성품에 들어갈 것이며 곧 능히 일체 부처님의 종성을 지닐 것이며

곧 능히 일체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初發心菩薩은 三世 그 모든 法에 대하여 아무리 法을 얻는다 할지라도 한 法도 얻은 바가 없느니라.

오직 온갖 菩薩은 智慧를 求할 뿐 모든 法界에 그 어떤 法에도 執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 부처님의 뭐 신통한 힘으로 시방 각각 일만 부처님의 세계에 티끌 수 같은 세계가 振動을 하고 하늘

꽃이 뿌려지고 화만과 옷과 보배와 장엄 풍류가 연주가 되고  광명을 놓으면서 하늘의 음성이 내려졌다.“

 

 

 

10. 이렇게 初發心의 功德을 表現을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이제 경전을 빌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렇게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을 내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공덕인지 우리가 발심, 마음을 내어서 내가 정말

부처가 되어야 되겠구나! 야! 내가 이거 찌지구레하게 불교공부해서 더 큰 富者 되고 좀 더 잘 살고 이게 아니고

내가 진짜 한 번 부처(佛)가 돼봐야 되겠다. 내가 진짜 이렇게 이 虛妄한 生覺 妄想 分別에 속아서 삶을 사느니

이런 헛개비 같은 人生놀이를 淸算하고 진짜배기 생생한 멋진 삶을 한 번 살아봐야 되겠다. 이렇게 발심을 딱

내는 瞬間 이 모든 功德이 同時에 이 모든 功德이 나에게 깃들게 되기 때문에 宇宙法界가 환희응약 하고 나를

돕기 始作합니다.

 

이 宇宙法界의 수없이 많은 화엄성중들, 신중님들이, 수호천사들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승들이, 도반들이,

부처님, 보살님들께서 나의 깨달음의 공부를 도와주기 시작한다. 이게 우리가 마음을 내는 發心, 發心이 마음을

내는 거 아니겠어요? 마음을 내는 건, 힘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쪽으로 마음을 내면 이 엄청난 게 나쁜 쪽으로 現實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좋은 쪽으로 마음 내면 좋은 쪽으로 이것이 모든 공덕들이 깃들게 되고 이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 겁니까.

근데 이 마음을 나쁜 쪽으로 쓰면 되겠습니까?  마음을 나쁜 쪽으로 쓰는 同時에 宇宙法界의 모든 힘들이

그 나쁜 것이 現實로 이루어지도록 만들기 始作하는데, 좋은 쪽으로 發心을 하면 이 엄청난 發心의 功德이 나에게

깃들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아까 말했지만 이렇게 發心을 내게 되면 그 자리서 바로 正覺을 이룬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우리가 부처에서 떠나있다 라고 錯覺하고 있는 衆生이고  錯覺을, 아 錯覺이었구나 라고

아는 게 부처니까. 우리는 단지 錯覺하고 있을 뿐이지 한 번도 부처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부처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錯覺만 버리면.....

 

義相스님이 이것을 이렇게 表現을 하셨어요.

 

행행본처 行行本處 라. 가고, 또 가지만 언제나 본래 그 자리고,

지지발처 至至發處 라 도착하고 또 도착하지만 언제나 떠난 그 자리다.

 

華嚴經에서는 이렇게 表現을 했습니다.

 

밤에 잠이 든 사람이 旅行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는 本來 제자리에 있었음과 똑같다.

 

우리는 모두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서 자고 있단 말입니다. 근데 꿈, 旅行이라는 꿈을 꿨어요.

그 旅行하는 꿈을 꿨지만 그게 진짜 旅행간 겁니까? 언제나 本來 그 자리에 있었던 거지.

꿈 깨고 보면 本來 그 자리가 아니겠어요? 언제나. 인도를 가든, 뭐 저 안드로메다를 가든.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가서 旅行을 했어도 그건 단지 꿈일 뿐입니다.

여러분들 意識이 아무리 衆生世界 속에 빠져서 울고, 웃고 많은 일들을 만들어 냈어도

事實은 한가지 일도 일어난 일이 없고 단지 그냥 本來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냥 꿈일 뿐이지.

 

불성천진자연 佛性天眞自然 이요, 역무인연수조 亦無因緣修造 다.

불성은 자연그대로 천진하여 꾸밀 것이 없으니 인연으로 닦고 만들고 할  필요가 없다.

 

불성이라는 것은 自然 그대로 이미 本來 지금이 자리에 꾸밀 것 없이 造作하지 않아도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니까 因緣으로 꾸미고 造作하고 닦을 필요가 없다. 修行을 通해 깨닫는다?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發心을 하느냐? 이것이 깨닫는 길입니다. 이게 인제 大乘佛敎의 思想이에요.

禪佛敎의 思想이고. 한 마음으로 간절히 發心한 사람은 이게 뭔가 막 간절히 工夫해야 된다라는 發心이 있고,

있고, 發心이 있게 되면은, 그 사람은 그야말로 한 마디 말에도 그 자리에서 탁 깨달음이 열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고 禪師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理解가 안 되죠. 發心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발심을 해서 꽉 차 있는 사람에게는 말 한 마디  던져 주면은 그 자리에서 工夫가 된단 말이죠.

 

 


11. 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常共和 죠.

지금 말씀드린 게 그거죠. 生死, 生死라고 하는 것이 衆生의 삶을 말하는 거에요.

衆生이 生老病死 하잖습니까? 그걸 줄여서 生死 이럽니다.

衆生들의 意識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虛妄한 幻想 속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늙는 것도 아니고 병드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本來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일이 있을 뿐이지. 그냥 지금 이 자리에 일이 있을 뿐이지.

지금 내가 이렇게 이 눈으로 世上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늙는 게 있고 병드는 게 있고 죽는 게 있습니까?

여기에 나이 든 게 있습니까? 아무리 나이 드신 어르신도 젊은 여성분이나 잘 생긴 젊은 남성, 남자들을 보면

설렌단 말입니다. 기분 좋고. 그건거는 20대 때나, 30대 때나, 50대 때나 똑같단 말이죠.

내 마음 속에서 나는 늙었다! 이런 生覺이 있으니까 늙어지는 거지. 그래서 그런 얘기가 있죠.

우리가 늙는 唯一한 原因 늙는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옆에 사람들이, 내 친구들이 다 늙는 걸 보니까

아 나도 저렇게 늙고 늙었겠구나 하고 지레 짐작하는 겁니다.

 

또 거울을 보니까 아 나도 이렇게 늙고 있구나. 다 마음이 하는 일이예요. 마음이 하는 거.

그래서 生死, 生老病死라는 것,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生老病死의 苦痛이 事實은 그 生老病死 自體가

涅槃이다. 그래서 生老病死 그 自體가 涅槃과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입니다.

이 事實이 바로 華嚴經에서 말하는 事事無碍法界입니다. 지금 이 자리 우리가 드러난 現實世界가 그대로 涅槃의

世界다 그대로 부처의 世界다. 事事無碍法界 華嚴에서는 虛妄한 生覺 煩惱 妄想이 그대로 부처라는 말이죠.

 

지공화상은 불이송(不二頌)에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우인탐착열반 愚人貪着涅槃  지자생사실제 智者生死實際다.

어리석은 이는 열반에 탐닉하고 집착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생노병사가 곧 진여실상이란다.

미오본무차별 迷悟本無差別 열반생사일여 涅槃生死一如

어리석음과 깨달음에 본래 차별이 없고 생노병사와 열반이 하나로 같다.

 

우리가 生覺할 때 佛敎는 이 世上을 등지고 저 멀리 있는 새로운 涅槃을 찾는 종교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世上을 등지고 또 다른 涅槃을 求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涅槃이라는 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뭔가 감촉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뭔가의 涅槃이 있다? 그런

涅槃은 따로 없다는 말입니다. 不二無一物이라고 말했단 말이에요. 涅槃이라는 게 따로 있어서 얻는 게 아닙니다.

 

그냥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이대로가 涅槃이지.

단지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이대로를 내가 生覺 分別 妄想으로 보니까 衆生이지만

단지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이대로를 있는 그대로 봤을 때는 涅槃인 겁니다.

그 涅槃이라는 것을 어디 가서 따로 찾아서 求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로 찾을 게 있으면 따로 求할 게 있으면 求하려고 애써야죠 당연히.....

 

本來부터 있지도 않은 없는 涅槃을 있도록 만들려고 애를 쓰니까.

나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열반을 내 껄로 만들려고 쫒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근데 언제나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서 恒常 내가 지금도 쓰고 있는 거니까.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 이 涅槃의 자리가 없으면, 佛性자리가 없으면, 本來자리가 없으면

여러분들은 제 말을 절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해를 할 수도 없고. 이 소리도 들을 수도 없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 할 수가 없어요. 부처(佛)가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서  나와 같이 함께 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고 숨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손을 폈다, 오무렸다하는 이게 바로 부처가 하는

일인데. 그럼 부처가 뭐냐? 이 손가락 하나만 들었단 말이에요. 구제스님은.

뭐 손가락 하나 드는 그걸 통해서 우린 부처(佛)를 確認 할 수 있을 뿐이라는 말이죠.

 

다만 分別 妄想으로 자꾸 生覺을~ (손가락을 쳐다보며) 이게 부처란 말이야?

이게 그러면 이게 뭐, 뭐, 뭐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이제 막 生覺 分別 妄想을 하기 始作하면은 그거는, 부처와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왜냐하면 六識이라고, ‘識’이라는 게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알음알이인데,

‘識’,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면서 인생을 살아왔던 그 알음알이, 分別心, 마음이라고 하는 ‘識’, 分別心,

그거 가지고는 부처(佛)을 절대로 確認할 수가 없습니다. 12處 18界가 다 空하다 그러잖아요. 그걸 가지고 부처를

確認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工夫가 어려운 理由가 뭐냐면요, 習慣 때문에 佛敎工夫를 알음알이, 知識으로

分別하고 헤아리고 해서 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알음알이 지식으로 할려고 해요.

 

그러니까 佛法을 法을 說하면 여러분들은 自動反射的으로 머리에서 生覺으로 이제 헤아려서, 이해해서

아! 이해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佛敎工夫가 안 되는 거예요. 물론 이제 머리로, 지식 알음알이로

생각으로 헤아리면서 하는 공부는, 이제 쉽게 말해서 方便의 초등학교 중학교 쯤 되는 공부를 하고 있는 거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우린 지금까지 머리로만 生覺 分別 妄想으로만 자꾸 마음工夫를 할려고 하잖아요.

이 工夫가 이제 어느 정도 해도 안되는구나 하고 답이 나옵니다, 인제. 그러다가 이제 佛敎經典이나 祖師語錄을

보게되면은  갑자기 내가 지금까지 뭔 짓을 한 거지? 하는 變化의 어떤 覺性이 일어납니다.

아! 내가 지금까지 이걸 머리로 알음알이로 分別하고 있으면서 안다고 내가 錯覺을 했구나!

아! 이거 그 世界가 아닌데. 그 世界가 아닙니다.

 

이 다음에 나오는데요, 그래서 아까 ‘生死涅槃常共和한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生死,生老病死는 뭐 그 자리서 涅槃인데 分別하는 사람에겐 涅槃이 아니다.

 

 

 

12. 어~ 인도의 바라문 가족 세 사람이 길을 걸었다해요. 먼 길을. 남편과 아내와 아들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가다가 인제 잠시 쉬었다 그럽니다. 쉬고 있는데, 잠시 젊은 나그네가 와가지고 같이 쉬고 있는 거예요.

같이 한참을 쉬다가 이 나그네가 먼저 길을 떠났죠. 근데 이 부인이, 부인이 그 남자와 눈이 맞은 거죠.

부인이 그 남자를 따라서 그렇게 가는 겁니다. 근데 아버지는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아들아 우리도 이제 갈 길을 가자,” 하고 그냥 자기 길을 가는 거예요. 떠나가는 마누라 냅두고.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 저 엄마가 딴 녀석 쫒아 가는데 왜 그냥 가십니까?” 그랬더니 아버지가 아들한테,

 

“저 여인은 처음 나에게 올 때도 그냥 自己 意志에 따라서 그냥 어떤 남자에게 왔었을 뿐이고,

또 지금도 自己 意志에 따라서 또 딴 남자에게 갈 뿐이다.

나에게 오는 것만이 眞理고 저 사람에게 가는 거는 眞理가 아니거나

나에게 오는 거는 善이고 저 사람에게 가는 건 善이 아니거나 그 어떤 分別, 差別도 있을 수 없다,“ 라는 거예요.

우리는 나에게 왔던 사람이 딴 사람에게 가면 離婚했다, 저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

저 사람은 천하에 있을 수 없는 짓을 해서 나쁜 놈이다. 憎惡와 怨望을 마음속에 품으면서

이제부터 世上 사람들의 視線이 나를 이제 뭐 離婚男, 離婚女로 보겠지. 나는 인생의 패배자야. 이런 온갖 是非,

分別과 妄想 속에서 스스로 自己를 괴롭히면서 남들을 怨望하면서 그 놈을 그 여자를 怨望하면서 살잖아요.

이게 다 단지 自己 머릿속에서 生覺으로 일어나는 錯覺입니다.

 

이 세상에 이혼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이혼 한 사람은 비정상이고 이혼 안한 사람만 정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어디서 만든 법이예요? 그런 건 없습니다. 심지어 한 남자가 두 명, 세 명, 네 명을 데리고

살아도  정상일 수도 있어요. 어느 나라에서는. 또 뭐 티벳같은 나라에서는 한 여자가 남자를 세 네 명 데리고

살아도 근데 티벳에서는 그 남자가 다 형제인데도, 형제를 다 내가 남편으로 데리고 살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眞理라는 게 定해져 있지 않단 말입니다. 한 여자만 데리고 살아야 된다. 아니면 이 여자가 나에게서 떠나가게

되면 그건 실패자다, 패배자다?  이건 우리 觀念이 만들어 낸 幻想 幻影일 뿐입니다.

이 世上이 함께 共同作業으로 만들어낸 觀念이라는 틀일뿐이죠.

 

그, 그런 觀念이라는 틀에 갇혀서 사니까 우리는 生老病死라는 思考方式, 分別妄想하는 思考方式에 갇혀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갑자기 비참해지기도 하고 劣等感을 느끼기도 하고 남들과 比較해서.

아니면 優越感을 느끼기도 하고. 우월감도 幻想이고 비참하다는 것도 幻想일 뿐입니다.

 

이 世上에는 그냥 한 存在가 있을 뿐이지 잘 살고 있거나 못 살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아름다운 삶을, 독자적인 자신의 삶을. 그냥 하나 그 누구도 分別할 수 없는 그냥 하나의 삶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지. 根源에서 봤을 때는 罪도 없고 善도 없습니다. 선도 악도 없습니다.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이겠어요.

 

내가 머리속으로 그렇게 妄想 分別을 피우니까 그 때 善이 되고 惡이 되죠.

그러니까 거기서 生死 앞의 思考方式, 衆生의 思考方式이 나오기 始作한 거지

本來 부처의 자리에서는 그런 分別 妄想이 전혀 없다. 이런 次元에서 본다면 

내가 옛날에 50평대 아파트에 살았는데 지금 갑자기 18평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한다면.

이런 내 삶이 비참한 게 아닙니다. 전혀 비참한 삶이 아니죠. 그냥 좀 널직한 데 살다가 그냥 좀 좁은데 산다는

사실밖에 없죠. 좁은 데 살면 좁은 데 사는 대로 좋죠. 멀리 왔다갔다 안 해도 되니까.

화장실 갈 때, 밥할 때, 청소할 때, 이 뭐 짧게 왔다 갔다 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뭐 관리비 많이 안내서 좋고, 신경 덜 써서 좋고. 이 한 生覺의 差異 아니겠어요? 한 生覺의 差異.

 

뭐, 저~ 제가 일부러 한 번씩 보는데, 정글의 법칙 보면요, 참, 참 공부할 게 많습니다.

정글의 법칙 보면은 그 화려한 삶을 살던 연예인들이 그냥 거기서 풀 하나 이렇게 풀떼기 이렇게 올려놓고,

나무짝 위 풀떼기 하나 올려놓고 그 밑에서 비 맞으면서 자도 행복하다고 하잖아요.

집을 지었으니까 좋다고 生覺하고 잔단 말이에요. 그냥 먹을 거 하나만 있어도 좋아하고.

하지만 그 可能性이, 거기서 하루 종일, 종일 굶다가 뭐 하나 잡아서 먹을 때 얼마나 기뻐합니까?

우리는 그냥 밥 한 공기만 있어도 기뻐할 수 있는 可能性을 가진 存在인데 이렇게 많이 먹으면서도 비참하다고

生覺하는 건 分別心이고 衆生의 마음인 거지 本來 부처世界에서는 그런 分別 妄想이 없단 말이죠.

 

 

 

13. 그래서 理事冥然無分別, 이게 이제 華嚴經에서 가장 重要한 가르침인데요,

이, 저, 華嚴思想에서 理事無碍法界, 事事無碍法界, 理法界, 事法界해서 이 四種法界 이렇게 설명하는 건데,

그 ‘理’와 ‘事’가 冥然되는, 그윽해서 分別할 수 없다. 즉 다시 말해 理法界는 理致, 眞理의 世界입니다.

理法界가 根源 世界다면, 事法界는 現象 世界 이 눈에 보이는 이 物質世界, 現象世界, 다양한 삶 그 自體를

얘기하죠. 그런데 理致의 世界와 理解의 世界, 理法界와 事法界가 理事無碍法界란 말이죠.

二와 事가 無碍, 걸림이, 서로 걸림이 없다. 卽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傳할 때, 眞理를 설명한단 말이에요.

그게 理法界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데 理法界만 설명해서 觀念的으로 부처님 가르침은 緣起法이고 中道고 空이고 어쩌고저쩌고 觀念的으로만

막 배우는 공부는 理法界만 배우는 겁니다. 그럼 이법계만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삶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불교공부가 된 거겠어요? 理法界만 알고 있다고 삶이 바뀌게 되는 게 아닙니다.

처음엔 우리가 事法界 속에서만 살죠. 佛法, 眞理는 전혀 모르고 살죠. 그니까 弱肉强食 속에서 막 사는 겁니다.

그러다가 理法界에 눈을 딱 뜨기 시작해요. 아! 理致가 있구나. 이런 眞理가 있구나.

아! 이 世上을 내가 그렇게 붙잡지 못해 안달하더니 이게 執着할 꺼리가 아니였구나. 空한거구나.

이런 걸 깨닫게 되는 理法界를 안단 말이에요.

 

그러나 理法界를 알기만 해서 삶이 變化되는 게 아니라 이러다가 나중에 理事無碍法界, 本質과 現實世界가 이제

걸림이 없이 하나로 圓融自在하게 自由自在로 섞이는 겁니다 서로서로, 이제 그야말로 相卽相入이 되어서.

이제 現實世界를 살면서 그대로 부처님 가르침 理致가 그대로 現實世界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어떤 누구에게 내가 돈을 왕창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아 이 돈 이게 固定된 實體的인 어떤 執着할 게 아닌데 하고

깨달으니까 괴로움이 덜한 겁니다.

 

그 理, 事가 無碍하게 되면은 理致만 따로 있고 事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理와 事, 現實과 眞理가 하나가 되어서

이 삶 自體를 보다 自由롭게 살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理事無碍法界 次元에서 우리가 理와 事를 다 알고

理와 事를 다 融通自在하게 쓰니까 그야말로 理事無碍法界를 잘 實踐하는, 뭐랄까 대표로 예를들면,

法輪스님같은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애요. 理致도 確然히 알고 現實的인 것도 確然히 아니까.

現實世界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온갖 質問을 하면 거기 理致를 事와 融通自在하게 答을 탁탁 내준단 말이죠.

 

理事無碍하게 答을 준단 말이죠. 그래서 理事無碍法界 次元에서는 어떻게 表現을 하냐면

妄想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妄想은 事에 해당합니다. 事에.... 근데 理致는 妄想만 딱 걷어내면

本來자리로 돌아간다게 理致에요. 그 이거 妄想 分別하던 것을 탁 내려놓으면 바로 부처에 契合이 됩니다.

이게 理와 事를 自在하게 딱 설명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고 華嚴세계의 다가 아닙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事事無碍法界다. 事事無碍法界. 事와 事. 現實世界와 現實世界 그 自體가 無碍하다.

서로서로 아무런 막힘이 없다. 卽 現實世界 낱낱의 現實世界가....

 

事實은 理致가 世界가 따로 있고 現實世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낱낱의 現實世界, 宇宙萬物 各各이 그 自體가 바로 理致, 眞理 그 自體다.

낱낱의 現實世界, 宇宙萬物 各各이 있는 그대로 부처(佛)의 世界다.

現實世界가 따로 있고 理致世界가 서로 따로 있어서 이 두 세계를 理事無碍로만 融通自在할 필요가 없이

現實世界 各各 그 自體가 法이다. 이것이 事事無碍法界입니다. 즉 이런 式이에요.

理事無碍法界에서는 妄想만 걷어내면 부처가 돼. 이겁니다. 事事無碍法界는 妄想 그 自體가 實上이야.

 

煩惱 그 自體가 부처다. 煩惱 그 自體가 菩提다.

妄想을 걷어 내려고 애쓰지마라. 妄想과 싸워 이기려고 노력하지마라.

妄想과 싸워 이겨서 勝利했을 때 그 때 부처가 드러나는 게 아니다.

이미 우리는 언제나 부처를 드러내고 있으며  부처를 쓰면서 살고 있다.

이게 바로 쉽게 말하면 禪佛敎에서 禪師스님들이 쓰는  어떤 方便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냥 사사무애법계 두두만물 사사, 현실세계, 현실세계가 그야말로 그대로 다 법이니까.

 

이 事事無碍法界는 理事無碍法界까지만 해도 生覺으로 理致를 理解하고

理致와 現實이 나눠져 있으니까 理致를 제대로 理解해서 現實과 잘 組合해서 現實을 幸福하게 살 수 있는

方法이에요.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게 주로 理事無碍法界를 工夫해왔었단 말이죠. 그 동안은.

근데 요즘에 제가 자꾸 事事無碍法界 쪽을 얘길 하고 있는 중인 겁니다.

근데 걔 중에 못 따라 오는 분들이 계시니까 또 다시 理事無碍法界 쪽을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14. 여러분이 事事無碍法界에서는 이 事實을 깨달으셔야 됩니다. 事事無碍法界에서는요, 여러분들이 이제 앞으로

가야 할, 앞으로 지금까지 理事無碍法界를 工夫해왔다면 앞으로 여러분들이 工夫해가야 할 方向이 事事無碍法界의

방향이에요. 事事無碍法界는 뭐냐 하면, 生覺을 굴려가지고는 절대로 갈수 있는 世界가 아닙니다.

 

이제 事事無碍法界에서 부처가 뭐냐? 컵뚜껑이다. 이 컵뚜껑 自體가 事라고 生覺해서 이거와 別道의 理致가

있다고 生覺했는데 이 事事無碍法界에서는. 선사스님들은 道가 무엇입니까? 이 컵이 부처다.

 

道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마이크다. 道가 무엇입니까?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다.

眞理가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다. 마삼근이다. 眞理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늘 아래 있으니 바람이

시원하구나. 이렇게 왜 이렇게 얘기하겠습니까?

 

事事無碍法界에서는요, 生覺이 갈 길을 잃어버리게 만들어야 됩니다. 分別 妄想을 딱 끊어버리게 만들어야 돼요.

生覺과 妄想 分別로써 理解하게 만들면 이건 事事無碍法界가 아닙니다. 理事無碍法界 次元밖에 안되는 거예요.

事事無碍法界로 들어가게 할려면 여러분들이 是非 分別과 生覺 妄想을 딱 끊을 수 있게 만들어야 돼요.

道가 무엇입니까? 컵뚜껑이다. 허! 여기서, 여기서 生覺을 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救濟가 不可能하죠.

어떻게 生覺을 해서 이게 道라는데 뭔 生覺을 할 수 있겠습니까? 生覺 分別 妄想하지 말란 소리에요.

 

이렇게 얘기했는데 사람들은 뭐라고 질문 하냐 하면은.헛! 이해가 되게 쉽게 좀 설명 해주세요.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이해가 되게 쉽게 설명을 하면 그건 理事無碍法界의 次元이니까. 事事無碍法界 그건 이해되기 쉽게

설명하면 안돼요. 이해를 하겠다고 하면 벌써 어긋나는 거니까.

 

道가 무엇입니까? (죽비를 치며) 이겁니다. 이걸 어떻게 生覺 分別 妄想으로 理解할 수  있어요.

그런데 뭐가 생깁니까? 道가 뭡니까? (죽비를 치며) 이거를, 이걸 깨달아야 됩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근데 알아졌어요, 몰라졌어요? (죽비를 치며) 이거를 딱 確認하게 되면 깨닫게 되면

내가 깨달았나, 안깨달았나? 이 生覺하고 있으면 이건 깨달은 게 아닙니다.

오! 알 것도 같고. 이건 아는 게 아니에요. 알 것도 하는 순간 아는 게 아니에요. 아닙니다. 알고 모르고가

나뉘어져 있는데. 그냥 (죽비를 치며) 이걸 깨닫는 것은 그냥 내가 알았나, 몰랐나를 生覺할 필요도 없어요.

저절로 아! 이거였단 말이야! 이거였단 말이야!  어쩌면 허무할 수도 있죠. 고작 이거였어?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내 옆에 있던 것이고 언제나 내가 쓰고 있던 當然한 거니까.

 

근데 確實해진다. 確實해진단 말이죠. 아 언제나 이거밖에 없었구나.

내가 뭐 잘 살려고 애쓰고, 뭐 온갖 이런 世上 저런 世上을 살면서 온갖 世上을 만들어 왔지만

허! 그 現實世上 그게 아무런 分別할 게 없었구나! 그냥 이거밖에 없구나!

그냥 佛性이라고 이름붙인 이거 하나밖에 없었구나. 부처, 이거 하나밖에 없었구나.

뭐 불교, 불성이라고 해도 이건 틀려요. 뭐라고 말로 하면 어긋납니다. 그래서 옛날 선사스님들은 어떤 방편을

즐겨썼냐면, 이해하지 못하게 할려고, 헤아리지 못하게 할려고 이거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거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 이겁니다. 아시겠습니까?

 

道가 무엇입니까? (죽비를 치며) 이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여러분은 모른단 말이에요. 모르잖습니까? 그죠?

근데 이걸 답을 내세요. (죽비를 치며) 이겁니다. 이거에 대한 답을 내세요. 답을 낼 수 있습니다.

답을 낼 수 있을 때 모르니까 '모를 뿐'이란 말이에요. 모를 뿐이니까 깝깝하단 말이에요.

 

저게 뭐지? 저게 뭐지? 아 이게 뭐지? 눈깜빡하는 게 이게 法이라고 했는데

숨 들이쉬고 내쉬는 게 이게 道라고 했는데, 난 맨 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는데 이게 뭐지, 이게 뭘까?

이게 이 뭣꼬 아닙니까? 이 뭣꼬. 이것이 무엇인가?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게 이게 무엇인가? 모른단 말이에요.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는데 알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요. 근데 모른단 말이에요.

그럼 알고자 하는 마음이 딱 서는데 그게 화두예요. 화두. 그게 疑情이고 疑團입니다.

 

이게 처음엔 머리로만 알고 싶은데 나중에는 알고 싶은 마음은 크고 큰데 도저히 알지 못하니까 막 깝깝해가지고

가슴이 막 저린단 말이죠. 이게 이제 의정이라고 그럽니다. 의정. 그걸 이제 의정이랑 다 사무치게 몰라가지고

알고 싶은 마음이 사무치는데 오직 모를 뿐이에요. 그러니까 生覺으로는 答을 낼 수 없으니까 生覺으로는 할 게

없어요. 그래 이거를 어떤 스님은 머리를 딱 떼놓은 것처럼 공부해라 이런단 말이에요. 

生覺을 굴리기 시작하면 진짜 工夫가 아니다. 이게 이제 事事無碍法界.

 

 

 

15. 이 서암도 화엄에 바탕이 되어있다라는 이유가 이 사사무애법계를 가르쳐주는 겁니다.

선에서 직지해준다 그러잖아요. 도가 무엇입니까? (죽비를 치며) 죽빕니다 하고 直指,

우리 직지심경 뭐 이런 거 있잖아요. 直指心體要節. 직지, 바로 直指, 바로 짚어주는 겁니다.

道를 바로 짚어줘서 心體, 마음의 本體를 바로 깨닫게 해주는 거예요. 이게 直指人心見性成佛 하는 겁니다.

이 마음이라는 게 깨달음을 얘기하는 거 거든요. 직지인심, 바로 그 마음 자체를 직바로 찍어줘서 견성성불하게

만든다. 그게 看話禪이고 祖師禪이고  佛敎核心입니다. 이게 바로 事事無碍法界를 說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事法界 속에서만 사는 衆生들은 이 事事無碍法界를 설하는 선사스님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해가 되게 얘기해줘야 되는데 이해를 못하게 만들어버리니까.

博士님들이 불교를 무시할 수밖에 없어요. 박사는 왜 박사가 된 거예요?

머리를 잘 써서 박사가 됐는데, 이거는 머리를 쓰는 것과 전혀 相關이 없는 거니까. 꽉 막혀버리는 거니까.

그래서 이렇게 事事無碍法界를 그야말로 딱 드러낸 게 바로 理事冥然無分別 理와 事라고 우리가 지금까지

是非하고 分別하고 해왔던 것이 冥然, 그윽하고 어두워서 그야말로 한치도 分別할 수 없는 자리다.

이 事事無碍法界를 義相스님은 이런 式으로 表現을 해주신 겁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事事無碍法界를 조금 더 보완 설명 해 드리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이제 한 겁니다. 

 

普賢十佛大人境이라. 십불, 수없이 많은 부처님과 보현보살이 대인의 경계다.

그게 바로 事事無碍法界라는 것이 바로 우리 중생들에게 뿐만아니라 수 없이 많은 부처님과 큰 보살님의 경계가

바로 이 事事無碍法界인 것이다. 법장스님이 오교장이라는 곳에서 뭐라고 썼냐면 法界, 제가 말한 이 法界,

이 事事無碍法界를 설명하는 이걸 法界緣起라고 하는데 이 法界緣起를 과분불가설과 인불가설이란 것으로

나누고  그것이 바로 十佛, 十佛子境界와 普賢子境界라고 했습니다.

卽, 法界緣起를 十佛의 境界와 普賢의 境界 두 가지로 나눴어요. 그니까 이 오교장 일곱 가지를 의상스님이

다 공부를 당연히 했겠죠. 십년을 유학했으니까. 그래서 여기서 말한 이 法界라는 이 事事無碍法界라는 것을

十佛과 普賢의 두 境界로 나눴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십불과 보현이라는 그 대인의 경계를 법장스님의 오교장에서 설한 그 가르침이

바로 이 理事冥然無分別이라고 하는 이 事事無碍法界를 설하는 것이다 라고 表現을 해놓은 겁니다.

 

예, 조금 어~ 이해가 좀 안되는 부분들은 다음 주에 事事無碍法界를 조금 더 補充하면서 진도를 또 나가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바로 이 事事無碍法界인 것이다. 법장스님이 오교장이라는 곳에서 뭐라고 썼냐면 法界, 제가 말한 이 法界,

이 事事無碍法界를 설명하는 이걸 法界緣起라고 하는데 이 法界緣起를 과분불가설과 인불가설이란 것으로

나누고  그것이 바로 十佛, 十佛子境界와 普賢子境界라고 했습니다.

卽, 法界緣起를 十佛의 境界와 普賢의 境界 두 가지로 나눴어요. 그니까 이 오교장 일곱 가지를 의상스님이

다 공부를 당연히 했겠죠. 십년을 유학했으니까. 그래서 여기서 말한 이 法界라는 이 事事無碍法界라는 것을

十佛과 普賢의 두 境界로 나눴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십불과 보현이라는 그 대인의 경계를 법장스님의 오교장에서 설한 그 가르침이

바로 이 理事冥然無分別이라고 하는 이 事事無碍法界를 설하는 것이다 라고 表現을 해놓은 겁니다.

 

예, 조금 어~ 이해가 좀 안되는 부분들은 다음 주에 事事無碍法界를 조금 더 補充하면서 진도를 또 나가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