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온의 의미와 오온무아, 색온 - 오온(3)붓다수업 교리강좌
2. 五蘊과 五蘊無我
앞 장에서 三法印의 諸法無我를 살펴보면서, 無我야말로 初期佛敎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며, 無我는 곧 緣起, 中道, 空과 다르지 않은 槪念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전 생애에 걸쳐 이 無我의 가르침을 쉽게 理解시킬 수 있는 多樣한 方便의 가르침을 傳해주셨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五蘊이다. 내가 없다고 無我라고 하는데 도대체 왜 내가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 몸뚱이도 있고, 느끼고, 生覺하고, 意圖하며, 認識하는 마음도 분명히 있는데 왜 無我라고 하셨을까? 바로 그 對答으로 하신 말씀이이 五蘊이다.
無條件적으로 ‘내가 없다’, 無我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라고 生覺하는 것이 細部的으로 分釋해 보면 어떤 要素들로 나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各各의 部分이 왜 固定된 實體가 없는 非實體的인 것인지를 살펴본 것이다. 나를 構成하고 있는 다섯 가지의 要素들이 各各 모두 텅~빈 空한 非實體的인 것이라면 그 다섯 가지로 造合된 ‘나’라는 存在 또한 텅~빈 空한 非實體의 無我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事實 無我라는 말은 獨立的으로 쓰이지 않고 五蘊이라는 말과 함께 五蘊無我라는 의미로 쓰일 뿐이다. 三法印의 無常, 無我, 苦는 부파불교가 조직화 시킨 것일 뿐, 事實 無我는 五蘊無我를 의미하는 것이다.
五蘊無我의 各各의 意味를 살펴보고, 五蘊無我의 各 蘊들이 왜 固定된 實體가 없는 無我인지를 살펴보게 된다면, 그 非實體的인 다섯 가지 要素가 쌓여 이루어진 우리라고 生覺하는 存在 또한 無我임이 밝혀질 것이다. 이 章에서는 먼저 五蘊의 意味에 대해 살펴 보고, 그 五蘊의 各 蘊들이 왜 固定된 實體的 存在가 아닌 텅~빈 空으로써의 無我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色蘊과 色蘊無我
색온의 의미
사람들이 生覺하기에 ‘存在한다’, 혹은 ‘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크게 物質的인 것과 精神的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物質的인 것을 ‘色蘊’이라고 부른다. ‘蘊’은 쌓임, 集合, 存在를 構成하는 要素 등의 의미다. ‘色’은 보통 모양과 形態를 갖춘 것을 의미한다. 卽, 色蘊이란 이 世上에 나타나 있는 모든 物質의 總體를 말한다. 五取蘊을 人間에 限定해서 말한다면 色은 우리의 肉身을 말하며, 構體的으로는 眼, 耳, 鼻, 舌, 身을 色이라고 한다. 바깥 對相 中에는 眼耳鼻舌身의 對相인 色 聲 香 味 觸 또한 色이다.
物質, 肉身,色은 사대(四大) 卽, 地 水 火 風 네 가지 要素로 構成되어 있으며, 우리 肉身으로써의 色은 內四大, 外部 對相으로써의 色은 外四大라고 부르기도 한다. 地 水 火 風 四大는 땅, 물, 불, 바람을 構成하는 要素를 말한다.
땅의 要素인 지대(地大)는 딱딱한 性質의 物質로 變形되는 性質을 가진 것으로 우리 몸에서는 피부, 뼈, 머리카락, 손발톱, 심장 등 우리 肉體를 構成하고 있는 여러 器管들이나 딱딱한 構成 要素들을 뜻한다.
물의 要素인 수대(水碓)는 흐르거나 濕한 性質을 가진 液體 部分으로써 우리 몸에는 피, 오줌, 침 등을 말한다.
火의 要素인 화대(火大)는 뜨거운 熱의 氣運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몸의 體溫을 말하며, 우리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一定한 體溫이 維持되어야 하듯이 火大 또한 우리 몸을 유지하는 중요한 要素이다.
風의 要素인 풍대(風大)는 움직이는 性質의 것으로 우리 몸에서는 호흡, 혈액의 움직임, 가스 등을 말하며, 우리 몸이 活動하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바람의 要素가 作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地水火風 네 가지 要素로 이루어진 우리의 肉身을 色蘊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色蘊을 構成하고 있는 地水火風의 낱낱의 要素들은 固定되고 不變하는 實體的 存在가 아니다. 地水火風은 다만 宇宙法界의 因緣을 따라서 내 肉身을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가 아침에 먹은 飮食이 地의 要素가 되고, 마신 물과 음료 등이 水의 要素가 되며, 움직이고 運動을 할 때 火의 要素가 모이고, 숨을 쉬거나 움직일 때 風의 要素가 因緣을 따라서 모였다가 因緣이 다하면 흩어질 뿐이다.
그렇기에 地水火風 네 가지 要素로 이루어진 色蘊, 卽 肉身 또한 固定된 實體的 存在가 아니다. 肉身이라는 內四大, 世界 對相인 外四大 모두가 因緣 따라 만들어진 因緣假合의 存在일 뿐, 固定된 實體는 아니다. 肉身이 ‘나’라고 生覺하는 錯覺이 어리석은 중생들이 生覺하는 色蘊의 모습이다.
外道들의 요소설을 보면 똑같이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四大를 설하고 있지만, 그것이 불교의 사대와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外道에서 말하는 사대는 물질을 구성하는 常住不變의 實體的 要素이지만, 佛敎에서 말하는 四大는 宇宙法界의 因緣에 따라서 緣起的으로 生겨난 것일 뿐, 그 어떤 實體도 없다.
색온무아의 과학적 증명
현대과학에서도 우리 몸의 最小의 構成要素는 結局 存在하지 않음을 밝혀내고 있다. 物質의 構成 要素를 쪼개어 보면, 分子에서 原子로 또 陽性子, 中性子, 電子로 나뉘며, 結局 小粒子로 나뉘어 진다. 그런데 이러한 소입자는 질량과 무게가 있어야 하는데, 소립자는 어떤 상태에서는 무게를 가지다가 어떤 상태에서는 무게가 없이 사라진다. 因緣 따라 있기도 하다가 없기도 하는 것이다. 素粒子는 測定 裝置와 觀察者의 意識狀態에 따라서 觀察 結果가 달라지는 것이다. 觀察하는 觀察者의 마음에 따라서 粒子가 되었다가 波動이 되고,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物質도 結局 마음에서 因緣 따라 緣起한 것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물질, 즉 肉身이 實體라고 우리는 錯覺하고 있지만, 事實은 그 또한 우리 마음에서 緣起한 것일 뿐이다.
그 뿐이 아니다. 原子의 構造를 놓고 보더라도, 물질의 微視的인 構造는 거의가 텅~비어 있는 상태로 있음이 밝혀졌다. 원자핵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는데 그 상태는, 콩알 만한 원자핵 주위를 먼지 보다 더 작은 전자가 월드컵 경기장 만한 큰 텅~빈 空間을 돌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原子는 99,999%가 다 텅~비어있으며, 0.0001%도 안 되는 電子와 陽性子만이 텅~빈 그 空間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電子와 陽性子를 더 쪼개어 보면 結局에는 最小 構成 要素라는 實體的 알갱이 素粒子는 存在하지 않는다. 結局 우리 눈에 보이는 이 宇宙萬物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빈 空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손으로 相對方의 몸을 누르면 몸 속으로 손이 쑥쑥 들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안들어가는 理由는 바로 電子와 電子가 마이너스끼리 接近하면서 電氣的인 反發力, 斥力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卽, 99.999%가 다 텅~비어 있는 肉身이지만 電子끼리의 반발력 때문에 딱딱하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다. 쉽게 말하면, 텅~비어 있는 肉身을 우리는 特定한 電子 에너지, 特定 因緣 때문에 現實로 實體的으로 存在한다고 錯覺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色蘊이라는 것, 우리 肉身, 몸이라는 것은 텅~비어 있으며, 實體的으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意識에서만 ‘있다’라고 錯覺을 하는 것일 뿐이다. ‘있다’라는 錯覺은 바로 觀察者의 認識狀態라는 因緣에 따라 素粒子가 마치 固定된 實體로 있는 것처럼 꾸며내기 때문이다.
肉身이 ‘나’라는 錯覺이 苦痛을 만든다
肉身은 이렇게 事實 텅~빈 空으로 固定된 實體가 아니지만, 우리는 肉體을 보고 그것이 ‘나’라고 生覺한다. 肉身이 ‘나’라는 觀念에 꽉 사로잡힌 채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삶과 죽음으로 나뉜 生死的 思考方式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思考方式에 빠져있기 때문에 肉身이 살아 있을 때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되지만, 肉身이 죽고 없어지면 ‘나’는 끝난 것, 죽은 것이라고 錯覺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思考方式은 ‘죽음’이라는 觀念을 人生이 마지막 끝난 것으로 알고, 最大의 失敗로 여긴다. 肉身이 ‘나’라는 思考方式에 갇히게 되면, 육신이 계속해서 살아남는 것만이 成功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죽음이 언젠가 올 것을 生覺하며 괴로워한다. 죽음은 卽, 괴로움이 된다. 肉身이 ‘나’라고 생각할 때는 죽음은 끝이며, 失敗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肉身이 ‘나’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삶은 永遠하다는 眞實을 깨닫게 된다면, 이번 生만이 生의 全部가 아님을 깨닫고, 또다른 삶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事實을 안다면, 幻想인 있지도 않은 生死的 思考方式에 빠져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 理由가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色蘊, 肉身을 ‘나’라고 生覺하는 錯覺, 五蘊을 나라고 生覺하는 錯覺때문에 苦痛에 빠져 있는 衆生의 實相을 보고, 五蘊無我, 色蘊無我를 가르치신 것이다. 色蘊, 卽 이 肉身이 ‘나’가 아님을 안다면, 生死的 思考方式에 빠져 生老病死를 고통이라고 여기는 根源的인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現實, 삶의 理致를 깨달아 解脫涅槃에 이르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生老病死의 고통을 해탈했다고 하신 분이 왜 죽게 된 것일까? 이 疑問은 生死的 思考方式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생기는 疑問이다. 肉身의 죽음은 괴로움이며, 肉身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顚倒妄想된 虛妄한 錯覺에 사로 잡힌 사람들에게 肉身의 죽음은 고통이고 人生 모든 것이 끝난 것이지만, 肉身이 내가 아님을 分明히 깨닫고 五蘊이 내가 아님을 分明히 깨달은 부처님에게 죽음은 고통도 아니고 인생의 끝도 아닌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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