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 잘 된 마음애는 탐욕이 스며들지 못한다
탐욕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달콤하며 동시에 가장 두려운 경계이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탐욕을 끊임없이 채워 나가려는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들 삶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우리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탐욕을 만들어내고 채워나가고,
탐욕을 채우지 못해 좌절하거나, 탐욕을 채움으로써 행복해 하거나, 탐욕을 채우고 난 뒤에
더 큰 탐욕을 만들어내는 이 끊임없는 탐욕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 탐욕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탐욕을 먹고 자란다. 그래서 탐욕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설사 이 세상을 전부 준다고 해도
그 탐욕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탐욕은 탐욕하는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으로만 끝낼 수 있다. 불교의 사성제을 탐욕에 대입해 본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다. 원인을 알고 그 원인을 소멸하면 그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면 탐욕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탐욕은 끊이지
않고 올라오는 것일까. 모든 貪欲의 原因은 바로 아상(我相)이다.
‘나다’ ‘내것이다’ '내 견해다'하는 我相으로 因해 내 영향력, 내 소유, 내 생각을 더 많이 키워가고 싶은
탐욕이 생겨난다. 내라고 여기는 生覺이 있으니, 내 것을 더 많이 늘려가고 싶고, 내 견해를 더 강화하고
싶은 탐욕이 자동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我相이 있는 이상 탐욕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든 탐욕의 그 근본원인인 아상을 닦으려고 하지 않고 현실적인 것만 탓하려고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貪欲을 消滅시키기 위해 少欲 知足하라, 혹은 布施하라, 나누라고 하는 方便을 설하고
있기도 하지만, 根本에서는 恒常 ‘修行하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조금 당황할 지도 모른다. 탐욕이
많아서 문제라면 마땅히 소욕하라, 만족하라는 가르침이 더 쉽고 직접적이지만, 佛家에서는 끊임없이
‘修行하라’ ‘精進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 理由가 바로 이것이다. 佛敎는 겉에 드러난 現象만을 治癒하고자
하는 종교가 아니라, 問題의 根源的인 原因이 무엇인가를 바로 보고 그 本質의 治癒에 힘쓰는 종교다.
'난다'라고 하는 사람은 예쁜 처녀와의 結婚式을 앞두고 처녀와의 사랑이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 그 설레는
마음을 접고 出家를 한 人物이다. 부처님께서 난다에게 出家를 권유할 것을 直感한 '난다'는 절대 出家하지
않겠노라고 단호히 답변하리라 마음 먹고 있었지만, 막상 부처님께서 出家 권유가 있었을 때 '난다'는
不可抗力的인 어떤 힘에 의해 出家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出家 以後에도 끊임없이 사랑하는
예쁜 처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출가 초기에 늘 불평불만이 많았고, 정진에도 게을렀으며, 늘
대중에서 겉돌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方便으로 신통을 보여 난다를 천상세계로 데려간다. 천상에 다다랐을 때는 아내보다
몇 배는 아름답고 예쁜 천상 선녀들이 황홀하게 난다를 사로잡고 만다. 부처님께서는 ‘네가 만약 열심히
수행 정진한다면 이 천상의 오백명의 선녀들이 너를 모시게 될 것을 如來가 보증한다’고 약속해 주셨다.
이에 난다는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끊임없이 정진 수행한 끝에 아라한과에 이른다. 그러나 드높은
깨달음을 성취한 난다는 부처님을 찾아 뵙고 부처님께서 하셨던 천상선녀에 대한 보증을 철회해 주실
것을 요청한다. 깨달음을 통해 모든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난 아라한에게 더 이상 천상의 선녀는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方便을 통해 난다를 깨달음으로 이끌면서 모든 제자들에게 貪欲에 관한 게송을
설하신다. ‘지붕이 허술하면 비가 새듯이 修行하지 않는 마음에 貪欲이 스며든다. 지붕이 튼튼하면
비가 새지 않듯이 修行이 잘 된 마음에는 貪欲이 스며들지 못한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