識蘊과 識蘊無我 - 오온(7)붓다수업 교리강좌
(5) 識蘊과 識蘊無我
식온의 의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眼耳鼻舌身意라는 主觀界가 色聲香味觸法이라는 客觀界를 接觸할 때 受想行이 일어난다고 했으며, 十八界에서는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이 일어난다고 했다. 즉, 眼耳鼻舌身意가 色聲香味觸法과 接觸할 때 受想行識이 同時的으로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受想行識은 늘 六根과 六境과 함께 일어난다.
여기에서 식온(識薀)이란 일반적으로 識別, 分別, 意識, 알음알이(識), 對相을 認識해서 아는 마음,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心-意-識이 同意語라고 보았을 때, 識蘊은 쉽게 말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마음은 ‘對相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것’이며, 意識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對相을 意識하고 알 때는 ‘있는 그대로’ 아는 앎이 아니라, 自己 識대로 主觀的으로 分別하고 識別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보통 識蘊은 對相을 ‘分別하고 인식해서 아는 마음’으로 이해된다.
눈 앞에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했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무언가가 눈에 나타났음을, 즉 眼根이 色境을 接觸했음을 알게 된다. 이처럼 눈이 色이라는 對相을 보고 눈에 對相이 보인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眼識이다. 마찬가지로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아는 마음이 耳識이고, 코에서 냄새 맡아지는 것을 아는 마음이 鼻識이다. 마찬가지로 舌識, 身識, 意識이 일어난다.
이처럼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무언가가 감지되었음을 아는 마음, 알음알이를 ‘識’이라고 부르고, 여섯 가지이므로 六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즉각적으로 對相이 나타났음을 아는 作用으로써의 眼耳鼻舌身의 識인 前五識이 있지만, 여섯 번째 意識도 있다. 意의 識은 물론 눈앞의 對相을 즉각적으로 아는 作用도 意識이라고 부르지만, 前五識의 도움을 받아서 綜合的으로 分別하고 認式해서 아는 마음의 作用도 포함된다. 이처럼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과 함께 작용하여 그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마음을 뒷날 唯識의 가르침에서는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앞서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할 때 受想行이 생겨난다고 했는데, 이 말은 識이 일어날 때 受想行 또한 함께 일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識이 일어나는 것이다. 앞의 설명처럼 수상행의 도움을 받기도 前에 먼저 즉각적으로 대상이 감지되었음을 단순하게 아는 작용도 식온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보통 識蘊이라고 하면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함께 작용하여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前五識에서의 ‘識’은 바로 이처럼 受想行의 도움을 받기 前에 對相을 즉각적으로 아는 ‘意識’으로써의 ‘識’을 말한다면,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對相을 綜合的으로 分別해서 아는 意識의 作用을 ‘分別識’, ‘識別識’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識이란 ‘意識’이라는 의미와 ‘分別識’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識은 대상을 單純히 인식하고 알기도 하지만, 受蘊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느껴서 알고’, 想蘊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개념화하고 생각해서 알며’, 行蘊의 도움을 받아 대상에 대해 ‘의지를 일으킴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는 그냥 單純히 아는 意識도 있지만,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아는 마음, 識, 알음알이인 意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對相이 있음을 아는 것은 그 對相이 느껴지고 生覺되기 때문이며, 그 對相에 대해 어떤 意圖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대상에 대해 느끼고 生覺하고 意圖하는 것을 通해 對相을 다른 對相과 分別하여 意識하는 마음의 作用이 바로 識蘊의 作用이다.
이와 같이 識蘊은 ‘대상을 분별해서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分別心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主된 機能이 바로 識蘊이다. 그래서 보통 識을 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初期불교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注釋을 달고 硏究를 한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識을 ‘심왕(心王)’이라고 하고, 受想行 등을 ‘심소(心所)’라고 부름으로써, 識이야말로 마음의 代表임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국왕이 명령을 내리면 신하들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識은 心王으로 國王에 比喩할 수 있고, 受想行은 心所로써 國王의 命令에 따라 움직이고 國王을 돕는 것처럼 心王의 作用을 돕는다. 心所라는 名稱도 臣下가 國王에 소속된 것처럼 心王이 心所를 所有한다고 하여 심소유법(心所有法)을 줄여 쓴 것이다.
[성유식론]에서는 ‘心所는 항상 心王에 依持하여 作用을 야기하며, 心所는 恒常 心王과 더불어 相應하면서 活動하고, 心所는 항상 心王에 所屬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識蘊은 항상 受想行이라는 心所 卽, 마음부수와 함께 활동하며,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하여 아는 작용을 말한다.
受想行과 識의 이해
앞에서 行蘊과 識蘊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요지는, 受蘊과 想蘊을 가지고 行蘊이 有爲를 造作하고 그 造作된 有爲를 名色으로 綜合的으로 分別해서 認識하는 마음이 識蘊이라고 했다.
쉽게 예를 들어 보자. 처음 어떤 女人을 보았는데, 느낌과 生覺이라는 마음의 데이터에서 좋은 느낌과 좋은 生覺이 일어나는 그 女人을 사랑하기 始作한다. 有爲를 造作한 것이다. 즉 ‘사랑’이라는 없던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行蘊이다. 受蘊과 想蘊을 가지고 行蘊이 사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게 된 여인은 이름과 모습 즉 名色으로 認識한다. 내가 사랑하게 된 女人은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을 가진 존재라고 識蘊이 認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式의 對相은 名色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方式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現實을 만들어 낸다. 그 前에는 이 世上에 무수히 많은 女人들이 있었지만, 내 마음 속에 사랑하는 감정이나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受蘊과 想蘊이 좋은 느낌과 生覺을 일으키고 行蘊이 사랑하는 意圖를 일으킴으로써 결국 識蘊은 그 평범하던 여인을,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이 여인은 내가 특별히 사랑하는 대상이라고 分別하여 認識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을 가진 누구라고 名色으로 認識하는 것이다.
그렇게 認識된 여인은 이제 더 이상 다른 여인과는 같지 않다. 다르게 分別하여 認識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여인과 헤어지고, 뒤에 다시 다른 여인을 만났다고 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예전에 만났던 여인과 지금 만나는 여인을 나도 모르게 比較하고 分別하여 어느 여인이 더 좋고 나쁜지를 分別하여 認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識蘊은 대상을 意識할 때 分別하여 認識한다. 分別해서 아는 것이다.
이처럼 識蘊은 受蘊, 想瑥, 行蘊의 作用을 통해 綜合的으로 對相을 分別하여 認識하는 마음이다.
唯識에서의 이해
이렇게 識蘊에 대해 설명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은 ‘識蘊’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잠시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에서 나오는 六識에 대한 설명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六識의 의미를 공부하고 나면 識蘊이 어떤 마음인지 조금 더 쉽고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유식불교에서는 이러한 ‘識’을 前五識처럼 自身에게 주어진 對相만을 分別한다고 해서 자성분별(自性分別)이라고도 하며,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등의 분별작용을 한다고 해서 수념분별(隨念分別)이라고도 부른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려면 受想行의 도움이 必須的이다. 과거의 느낌들, 과거의 개념작용 내지 사고들, 미래 계획을 위한 의지 등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야만 隨念分別이 可能한 것이다. 이처럼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識은 隨念分別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계탁분별(計度分別)이란 錯覺을 하여 대상을 인식하는데 誤謬를 일으키는 分別作用을 말한다. 이 또한 受想行蘊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대상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느낌이나, 잘못된 개념화나 생각, 잘못된 의지작용으로 인해 대상을 錯覺하여 분별하는 데 오류를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식온의 헤아림과 분별작용의 특징에 따라, 전오식처럼 눈앞에 나타난 사물에 대해 基本的인 分別心을 일으켜 헤아리는 작용을 현량(現量)이라고 하고, 六識의 작용인 상온 등의 도움을 받아 비교, 분석, 판단하는 작용을 비량(比量)이라고 하며, 대상을 판단하여 잘못 헤아린다고 하여 비량(非量)이라고도 한다.
유식불교에서는 六識의 役割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상을 의식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이비설신식과 함께 작용하여 대상을 분별한다고 하여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하며, 꿈 가운데 나타나는 의식은 몽중의식(夢中意識)이라 불리고, 객관세계의 대상과는 상관없이 내면에서 단독으로 분별하는 의식을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모든 의식에서 나타나는 착각과 잘못된 분별, 장애와 번뇌 등을 모두 정화함으로써 나타나게 되는 청정하고 맑은 의식을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유식에서는 六識을 물질, 정신세계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대상으로 수많은 廣範圍한 意識作用을 일으킨다고 하여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分別心과 識의 成長
[잡아함경] 39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識은 네 가지에 머물면서 반연(攀緣)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識은 色 가운데 머물고 色을 반연하며 色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커 간다. 또한 識은 受想行 가운데 머물고 受想行에 반연하며 受想行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커 간다.”
쉽게 말하면, 識은 色受想行에 머물면서 依持하고, 色受想行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커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識을 사식주(四識住) 즉 네 가지 識이 머무는 場所라고 하며, 이 四識住가 바로 色受想行이다. 이처럼 識은 色受想行에 머물면서 依持하고 즐기면서 커 간다.
앞에서 식은 안이비설신이 색성향미촉을 만날 때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아는 의식, 귀에 들리는 것을 아는 의식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식은 아는 의식이지만, 십이입처에서 수상행이 생겨나면서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이라고도 했다. 卽, 識은 즉각적으로 對相을 아는 意識이면서 同時에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對相을 分別하는 分別心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서 識이 受想行에 머물면서 依持하고 즐기면서 살아가며 커 간다는 점이 바로 識의 增長을 알려주는 重要한 部分이다. 識은 受想行에 머물면서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對相을 分別하면서 커 가는 것이다. 즉각적으로 아는 작용인 ‘意識’이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分別하는 ‘分別心’이 되고, 受想行의 도움으로 對相을 分別해서 아는 意識은 또 다시 對相과의 接觸을 通해 受想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또 다시 受想行의 도움으로 分別心도 커가는 것이다.
結論的으로 十二入處에서 發生한 識이 色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다시 새로운 識으로 성장, 增長하고, 새로운 分別心인 識은 또 다시 成長한 意識으로써 色受想行을 통해 또 다시 分別心이 커 가는 것이다. 이처럼 識은 十二入處에 依해 發生했지만, 色受想行에 依存해서 成長하고 커 간다. 이러한 識이 커간다는 가르침이 훗날 大乘佛敎 唯識思想의 種子說, 阿賴耶識 思想으로 發展하는 根據가 된다.
예를 들어 보자. 대학교 1학년 때 내가(色) 누군가에게 좋은 느낌을 받아(受) 사랑에 빠지고, 그 女만을 생각하며(想), 온통 그녀를 나의 여인으로 만들려고 의도, 사랑하려는 의도(行)를 일으켰다면, 그러한 색수상행의 작용을 일으키는 존재를 ‘나’라고 錯覺하여 ‘나’라고 알고, 意識하는 마음이 識인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퇴짜를 맞고 아픔도 겪으면서 군대를 다녀 온 뒤 다시 성숙해진 마음으로 대학교 2학년 때 똑같이 내가(色)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受), 온통 그녀만을 생각하며(想), 그녀와 꼭 사귀어야겠다고 의도(行)를 일으켰다면, 1학년 때 일으킨 識과 2학년 때 일으킨 識은 같은 마음(識)일까? 같은 마음(識)이 아니다. 識은 그저 因緣 따라, 卽 十二入處라는 因緣 따라 識이 發生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던 意識과 2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는 意識이 같은 意識이라고 여긴다. 내 안에 동일한 마음, 동일한 意識이 계속 존재하고 있어서, 그 識이 시간이 흐르더라도 대상을 인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識은 六內入處와 六外入處가 만나는 因緣 따라, 卽 十二入處에서 緣起한 것일 뿐이다. 持續的인 意識, 持續되는 마음이 내 안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存在하는 것이 아니다. 卽 식온무아(識薀無我)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2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識)과 1학년 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識)은 같은 것이 아니다. 1학년 때 사랑하던 마음 보다 2학년 때는 그녀를 보는 느낌도 다르고, 그녀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고, 그녀를 사랑하는 의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1학년 때 그녀를 짝사랑 해 본 경험을 통해, 色受想行을 통해 그녀에 대한 認識, 分別도 달라지고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受想行識이라는 經驗을 통해 많이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1학년 때의 실수를 2학년 때는 더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랑도 그만큼 더 성숙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色受想行에 依持해 識이 成長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삶의 經驗을 通해, 卽 六內入處와 六外入處의 接觸과 거기에서 나타나는 受想行의 發生을 통해 우리의 意識은 成長한다. 分別心도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識의 成長이다.
識蘊無我
이와 같이 ‘分別해서 아는 작용’인 識蘊은 固定되고 實體的으로 存在하는 것이 아닌, 因緣 따라 條件에 依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인 緣起的 存在일 뿐이다. 識蘊無我인 것이다.
경전에서도 “意識은 條件에 依存해서 發生한다. 條件이 없으면 意識은 생겨나지 않는다. 어떤 條件에 依存하여 意識이 發生하는가? 눈과 색에 依存하여 發生한 意識을 눈의 意識(眼識)이라고 한다.” 라고 하며, 귀코혀몸뜻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十二入處에서 六識이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識蘊은 눈귀코혀몸뜻이 色聲香味觸法을 接觸하는 條件에 依持해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눈이 어떤 대상으로써의 色을 보았기 때문에 보는데 따른 意識이 發生하는 것이지, 보지 않고 대상을 분별하여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그 소리를 意識하고 分別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識은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하는 條件에 依해 發生하는 緣起的인 것, 존재이다.
이처럼 識은 緣起的인 條件 發生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우리 안에 ‘意識하는 存在’, ‘意識하는 나’가 있다고 여긴다. 우리 안에 識, 卽 마음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안에 마음이라는 어떤 獨立的으로 固定되고 不變하는 實體가 있어서 그 實體가 눈귀코혀몸을 通해 對相을 認識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내가 대상을 分別해서 알고 認識하는 것을 보고, 내 안에 ‘認識의 主體’가 있다고 錯覺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識은 色受想行에 머물고 커 가며 成長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持續的으로 머물면서 成長하는 實體的인 自我로써의 ‘意識의 主體’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識이 成長하고 커간다고 말을 하니까, 그것을 보고 意識의 主體로써의 永續的인 識이 있을 것이라고 錯覺하는 것이다.
이 識, 卽 마음을 참나, 아트만처럼 永續적이고 固定 不變의 어떤 實體적 槪念으로써 받아들이면 안 된다. 특히, 이 識을 아트만처럼 잘못 알아듣고, 固定된 輪廻의 主體로 여겨 이번 生에서 죽고 다음 生에 태어나면서 輪廻를 反復할 때마다 계속 이어지는 어떤 實體로 여기면 안 되는 말이다. 이런 識의 이해가 바로 브라만교에서 主張하는 아트만이고, 佛敎는 이러한 實體的 槪念인 아트만 思想을 打破하기 위해 무아(無我)를 설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再生連結識이라고 하여, 다음 生에 輪廻를 할 때 옮겨가는 識을 설정하고 있지만, 이 재생연결識 또한 아트만처럼 영속적이고 불변하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業과 報(果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라는 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連結되는 흐름으로써의 因緣 따라 생겨난 緣起的 存在의 識일 뿐이다.
分別心을 버려라
이처럼 識蘊은 固定된 實體的인 마음이 아닌, 虛妄한 分別心일 뿐이다. 우리는 이 虛妄한 分別心으로 이 世上을 分別하여 意識한다. 分別心이라는 것은 나누어서 認識한다는 말인데, 우리 안에는 識이라는 마음이 있고, 그 識의 對相을 世上/世界라고 나누어서 認識하는 것이다. 이렇게 識의 對相이 되는 것을 명색(名色) 卽이름과 모양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識은 나와 世上을 나누어서 認識하고, 一切 모든 識의 對相들 卽, 名色을 서로 나누고 分別해서 意式한다.
스님들의 법문이나 불교 서적들을 살펴보다 보면 늘 많이 듣는 말이 ‘分別心을 버려라’, ‘알음알이(識)을 놓아버려라’일 것이다. 이 分別心, 알음알이가 바로 識이다. 앞에서 識蘊은 無我라고 했다. 識은 固定된 實體가 아니라 단지 因緣을 따라서 變化하는 緣起的 存在일 뿐이다. 因緣 따라 變化하는 모든 存在를 有爲法이라고 한다. 卽, 分別心이나 알음알이(識)를 버리라고 하는 理由는 그것이 固定된 實體가 아니라 단지 因緣 따라서 變化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무런 分別心이나 알음알이(識)를 전혀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分別心= 마음= 알음알이(識)=生滅心을 마음껏 일으켜 쓰되 그것이 實體인 줄 執着하지 말라는 의미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이라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分別하여 意識한다. 어떤 음식을 보고도 몸에 좋은 음식이라거나 나쁜 음식이라고 分別한다. 날씨를 보고도 좋은 날씨 혹은 나쁜 날씨라고 分別한다. 사람들의 피부색깔을 보고 相對를 偏見을 가진 채 分別하여 認識하기도 한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상대방을 分別하여 認識한다.
우리는 이러한 思量 分別心을 ‘내 마음’이라고 여기면서, 내 안에 變함없이 存在하는 意識活動의 主體라고 믿는다. 그 思量 分別心에 固執하고 執着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삶의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 意識이 因緣 따라 虛妄하고 無常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헛된 分別心임을 알지 못하고 그 分別心에 執着하는 것이다. 그러한 分別心들은 實體的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나쁜 固定된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그렇게 分別하여 意識해서 아는 마음(식, 알음알이)를 보고 그것이 固定된 내 마음인 것으로 錯覺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좋거나 나쁜 사람이라는 分別心을 가지고 對하게 된다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偏見어린 視線으로 相對方을 解釋해서 보게 된다. 나쁜 사람이라고 生覺해서 꺼려하고, 是非 걸고, 미워하던 사람이 훗날에 알고 보니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나를 위해 큰 도움을 줄 사람이었을지 어찌 알겠는가. 만약 分別心이 없이 사람을 對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을 偏見어린 視線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외모나, 경제력이나, 얼굴색이나, 학벌이나, 지위를 따지고 分別해서 認識하는 것이 아니라, 分別心을 놓아버리고 텅~빈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한 存在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識蘊이 無我인 줄을 아는 智慧로운 이의 世上을 보는 참된 認識일 것이다.
[붓다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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