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중도의 수행 아닌 수행, 망상에 이름붙이기 |영상법문 녹취록
법우 |2015.04.14. 17:19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253
예, 잘 계셨습니까? 이제 다음주가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네요.
부처님 오신 날 여기 동참하셔도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호흡관찰 수행에 대해서 지금 계속 말씀 드리고 있는데 아마 그 동안은 절을 하든
염불을 하든 진언다라니를 하든 다양한 독경수행을 하든 아마 多樣한 修行을 해 오셨을 겁니다. 간
화선 하신 분도 계시고 그러고 이제 지금 이렇게 呼吸을 觀察하는 修行 方法,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께서 말씀하신 修行의 方法을 지금 우리가 같이 工夫를 하고 있는데, 어떤 修行을 해도 사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면 모든 것은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止觀을 通해서 즉,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깨어 있는 알아차림인 止와 觀 수행으로 歸結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절을 하면서 절하는 동작
과 내 마음을 觀察하면서 절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止觀 위빠사나, 마음을 관찰하는 명상수행이고
절冥想 修行이 되는 것이구요. 念佛을 하면서 염불하고 있는 그 소리를 똑똑히 귀로 듣고 염불하면서
雜念이 일어나지 않는지 온전히 바라보고 있다면 念佛冥想 修行이 되고, 眞言다라니도 마찬가지입니다.
讀經을 할 때도 뜻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독경을 하면서 한문으로 뜻을 모르지만 해도 된다고
하는 이유가 독경이라는 것은 하나의 方便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경전 독송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독송하면서 내가 그 瞬間에 깨어 있는지 그 자리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염불 명상, 진언
다라니 명상, 절명상 모든 것이 명상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그 瞬間에 온전히 알아차리고 觀察할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이 修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修行을 할 때 지금까지 우리들은 어떤 마음으로 수행을 했느냐면 빨리 해서 빨리 끝내
거나 빨리 이뤄야지, 뭔가를 얻어야지, 成就해야지, 무언가가 있겠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깨달음이
오거나 그게 아니라면 놀라운 體驗이 오거나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바라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工夫를 하고 있단 말이죠. 여러분이 호흡을 관찰하면서도 잘 안 하는 이유가 있어요. 절을 하고
나면 천배를 하고 나면 다리라도 후들후들 떨리던가 그러니까 뭔가 成就感이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呼吸을 觀察하는 것은 아무런 成就感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죠. 그런데 내 마음은 뭔가 빨리 成就
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지속적으로 올라온단 말이죠.
제가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부처님 가르침, 마음工夫는 전혀 거꾸로다. 마음工夫는 무엇을 成就
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성취와는 전혀 관계가 멀다. 무엇을 成就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
自體가 이미 시비 분별하는 妄想 分別心이다. 妄想이고 分別心이다. 나는 어리석은 衆生이고, 성취하
지 못한 자, 성취한 또 다른 어떤 모습으로 둘로 나눠 놓는 겁니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고 성취한
어떤 모습의 境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그 境界를 쫓아서 간다. 둘로 나눠 놓고 그 相對편을 쫓아 가는
겁니다. 마음이 完全히 둘로 나뉘어져 있는 거죠.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한 거 그것은 전혀 修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아마도 여러분 지금 어쩌면 이 말씀 듣고 의아할 수도 있지만 아마도
한국불교에서 거의 모든 수행자들이 지금까지 여러 분들이 배워 왔던 것과는 어찌 보면 正面으로 相衝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겁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마음工夫를 잘못 알고 있다. 修行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修行을 해서 어떤 깨달음을 빨리 깨치는 걸 修行으로 잘못알고 있으니까.
중국에 수 많은 禪師 스님들이 끊임없이 했던 말입니다. 결코 뭐 어떤 造作的인 修行을 通해서는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열 시간 스무 시간 참선하는 사람은 여러분보다 훨씬 根機가 높아서 그 사람들
은 빨리 깨닫는데 우리는 늦게 깨달을 거 같잖습니까? 수행을 열 시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먼저 깨
닫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같이 천배를 하니까 고도의 근기를 갖고 있어 그 사람은 나보다 빨리
깨달을 거야.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오래 앉아 있는 것이 깨달음을 保障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더 오래
앉아 있는 거 自體가 번뇌 妄想이 되기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한다' 라는 相이 생기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안되느냐?' 하는 그렇게 固執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自體가 마음을 둘로 나누는
것을 급격하고 크게 강하게 演習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기왓장을 열심히 막 갈고 있으니까 뭐하고 있느냐? ‘뭐하고 계십니까? 스승님 뭐하고
계십니까?’ 하니까 '이 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니까 웃으면서 ‘에이 스님 기왓장을 간다
고 거울이 되겠습니까?’ 스승이 하는 이야기가 ‘너도 마찬가지다. 너도 그렇게 오래 앉아 있는다고 成佛
하겠느냐?' 오래 앉아 있는다고 부처(佛)가 되는 게 절대 아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오래
앉아 있지도 말고 마음을 알아차리지도 말고 수행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그런 말이 아니다. 마음 자세
에 대한 부분입니다. 錯覺을 버려야 돼요. 오래 앉아 있고 수행을 잘 하는 사람이 훌륭하고 높은 근기고
그렇게 잘 못하는 사람은 낮은 근기라고 生覺하는 그 差別心 分別心을 완전히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
서 여러분 스스로가 '나는 못난 사람이야, 남들 정말 잘 수행하는 사람에 비해서 난 부족한 사람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깍아 내렸던 그런 分別하는 마음을 완전히 내려 놓아야만 됩니다. 그건 정말 잘못 된
生覺입니다. 혹은 여러분 중에 특별히 수행을 잘 한다고 生覺하시는 분이라면 ‘난 남들보다 수행을 잘
해’라는 그 두 가지 差別心을 내려놓는 것부터가 마음工夫의 始作이 됩니다.
제가 지난번에 그 말씀 드렸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로 온다
온다는 말도 맞지 않고, 깨달음은 이미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있다. 저 앞에 써 있는 글귀가
뭐냐 하면요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이렇게 써 놨는데요.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라는 말은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깨달아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만 깨닫지 못했다고 妄想 分別 하는 사람의 마음이 있을 뿐이에요.
이 肉身을 가지고 나라고 生覺하고 肉身이 나라고 生覺하다 보니까 이 我相에 얽매여서 스스로 煩腦
妄想 分別을 일으키고 있는 내가 衆生이라고 錯覺하고 있을 뿐이지 그런 分別 妄想 煩惱 그것만 걷어
내버리면 삶은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서 完全하다. 더 이상 부처(佛)가 될려고, 깨달을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두 눈이 있으시죠? 두 눈이. 그런데 눈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아요? 지금 自己 눈으로 自己 눈을
볼 수 있습니까? 내 눈으로 내 눈을 볼 수 있습니까? 내 눈으로 내 눈을 볼 수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들은 내 눈을 찾아 다니고 있는 거에요. 눈으로 계속 보고 있으면서 내 눈이 어디 있나 동네방네 찾아
다니고, 명상을 하면서 눈을 찾아야지 하고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있었던 것과 똑같아요.
그래서 선사들은 그랬습니다.
‘집안에 들어 앉아서 자기 집을 찾아 다니는 꼴이다.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상만물, 우리들은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깨달아 있는데 '나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 빨리 깨달음을 찾아야 돼' 하는 이런 錯覺때문이죠. 그래서 제가 예를 들어 마음 하나를
똑바로 쓰면 그 무엇이든 이루어 낼 수도 있다. 우리가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이룰 수 있고
난 요정도 밖에 능력이 없어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로 바뀔 수도 있고 마음 하나
바꿈으로써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게 實際 可能합니다. 可能한 理由가
本來 우리 안에는 無限한 能力이 있었고 그것을 이미 쓸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가능한 거
에요. 일상적으로 가능한 겁니다. 누구나 이미 깨달아 있고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아니라는 生覺의
틀만 옅어진 사람이라면 더욱 더 빨리.
그래서 結論은 뭐냐 하면요? 무엇이 成佛을 하게 하느냐? 깨달음을 이루게 하느냐? 成佛이나 깨달음
그것은 修行을 통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修行은 이미 成佛되어 있고 깨달아 있는 事實 그것을 보
고 確認하는 하나의 方便일 뿐입니다. 여러분 눈이 세상을 보고 있지만 내가 눈이 있는지를 모른다고
했어요. 눈이 있는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울을 봐도 되긴 되지요. 예를 들어 앞에 무언가가
있음을 보면 제가 이것을 들어올리게 되면 여러분들이 눈으로 보게 되죠. 본다라는 마음의 作用 그 自
體가 내 눈이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죠. 이걸(죽비) 보여주든 이걸(컵뚜껑) 보여주든 저를 보여주던
마이크를 보여주던 무엇을 보여주더라도 하나를 딱 가르쳐서 보여준 다음에, 이걸 봐라 그럼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보는 것이 바로 내 눈이다. 이렇게 이해해서 눈을 볼 수 있는 거죠.
우리가 내 마음 가운데 있는 참나, 참마음, 한마음을 찾으려고 한단 말이죠. 一心이라는 한마음을 찾으려
하는데 佛性을 찾으려 하는데 진짜마음이 뭔지를 찾으려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찾을 수 있겠습
니까? 그것이 화두가 되었던 마음이라는 건 뭐냐 하면 아는 作用입니다. 아는 作用. 보는 作用을 通해서
눈이 있음을 아는 作用처럼, 아는 作用을 通해서 마음이 있음을 아는 作用이죠. 그냥 그 아는 作用을 通해
서 보세요.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치켜 뜨고 눈을 볼려고 기를 써도 눈이 안보이지만 아무 노력도하지 않고 그냥
아는 作用, 마음을 通해서 탁 보면 눈이 보이는거 아닙니까? 그래서 옛날에 선사 스님들은 마음(心)을
보는 것 卽, 見性하는 것이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거만큼 쉽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에둘러 가려고
하고 눈을 봐야지 봐야지 하는 힘쓰는 마음만 내려 놓으면 되는데 여러분 매직아이 이런 거 보는 것과
비슷하다. 매직 아이를 보다 보면 기를 쓰고 눈을 사팔뜨기로 하면서 너무 안보이니까 기를 쓰고 온갖
노력을 하면 노력을 한다고 잘 하는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살짝 한번을 봐도 탁 보여버리고 어떤 사
람은 진짜 몇 일을 해도 안 보이는 사람도 있잖아요. 몇 일을 해도 안보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살짝 봤
는데 보여버려요. 내가 어떻게 봤는지도 모르죠. 힐끗 본 사람은 내가 어떻게 봤는지도 까먹고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닐 수도 있지만 누구에겐 너무나 해도 안 되는 어려운 거죠. 매직아이 보는 게. 그거와 마찬
가지다.
그래서 무엇이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느냐? 어찌 보면요. 첫째는 信心입니다. 내가 이런 깨달음이
라는게 있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얻은 境地란게 있구나. 경지라고 할 것도 없고 이미 내가 부처라는
거기에 대한 굳은 믿음 내가 이미 부처이고 깨달아 있는데 내가 다만 보지 못할 뿐이구나 부처님처럼
나도 깨달음을 볼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해요.
그러한 다음에 發心이 있어야 합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發菩提心’ 발보리심, 보리가 깨달음입니다.
보리를 얻겠다고 하는 마음 깨달음을 얻겠다고 하는 마음 그 마음이 간절하게 사무치면 어느 순간
깨달음이 저절로 찾아 온단 말이죠. 깨달음 그것은 쫓아가면 쫓아갈수록 더 더욱 멀어지고 안 된다.
그래서 십년 이십년 참선하는 분들도 공부가 안 되는 이유가 기를 쓰고 깨달음을 보려고 하니까 오
히려 잘 안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보면 부처님께서 法門 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그냥 바로 同時에 때로는
어떤 경우에는 산도적이었는데 도적 오백명이 바로 아라한과를 증득한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런데 아난존자 같은 경우는 부처님 10대 제자라고 하지만 부처님 평생 동안 깨달음을
얻지 못했단 말이죠.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정말 열심히 하는 수행자라
해도 바로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재가신도님들이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바로 아라한
과를 증득한 사람들도 있다.
중국 禪에 가면 더욱 더 신비해지죠. 그냥 말 한마디에 끝이고. 그 어떤 말도. 이 話頭라는 게 이걸
(컵뚜껑) 보여주든 이걸(죽비) 보여주든 무엇을 보여주든 보게만 해주면 되듯이 화두나 수행법이
온갖 다양할 수도 있고 천칠백가지 공안이 있다고 하는 이유도 그 무엇을 물어도 상관 없단 말이죠
그 마음을 딱 보게만 해주면 된단 말이죠. 그래서 다시 말해서 굳은 믿음과 내가 깨달음을 얻어야겠
다는 보리심, 발보리심, 발심 이 발심이 굳으면....이 수행을 많이 하는 사람이 조금 더 빨리 깨닫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뭐냐 하면은 수행을 많이 한다라는 것은 發心이 깊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信心이 깊어지잖아요.
信心이 있고 發心이 있는 사람만 열심히 그렇게 수행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수행을 많이한 시간에
비례해서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니라, 수행을 많이 한다는 건 그만큼 굳은 믿음과 굳은 발심이 함께 가기
때문에 조금 더 우리보다 깨달을 확률이 높다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집착이 될 수
도 있기 때문에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제가 누누히 말씀 드리는 것은 그러면 그렇다고 해서 수행이 다 필요 없느냐? 이것도 中道에서
어긋나는 겁니다. 수행을 안 하면 절대 안되고 남들은 수행 잘하는데 나는 수행 못하니까 나는 느리다
하는 것도 中道에서 어긋나고, 야, 그러니 수행을 열심히 한다 해도 그래야 깨닫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나는 수행을 안 하겠다. 이렇게 해도 中道에서 어긋난단 말이죠. 이렇게 해도 수행이 안 된다.
공부가 안 된단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수행을 열심히 해도 안되고 안 해도 안되고 대충 해도 안됩니다. 피나는 노력을 다 해서 수행을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수행에 게으르지도 않다. 왜 이러냐면, 수행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
니고 어떤 스님은 한 소리를 내고 道라고 하고 , ‘뜰 앞의 잣나무’라고도 하고, ‘방하착’이라고도 하고,
뭐 다양하게 ‘똥막대기’라고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道, 깨달음은 말로 生覺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生覺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호흡을 관찰하다가 생각으로 이렇게 하면 더 잘될까 하면 저렇게 하면 더 잘될까
하고 生覺으로 造作하기 始作한다면 그것은 마음工夫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成佛이나 깨달음은 말
이나 생각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겁니다. 말이라는 건 全部 다 生覺일 뿐이죠. 생각으로 말을 만들은 겁
니다. 그러니까 말로써는 성불이나 깨달음을 도저히 표현 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중도적으로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만 미친듯이 하고 수행 잘하는 사람에 비해 나를 열등
하다고 생각하거나 우월하다는 마음 分別 妄想을 내려놔야 하고 수행을 완전 내팽겨 쳐도 안되고 수행에
집착해도 안되고 그래서 제가 드린 말씀이 하루에 시간을 정해서 십분이든 이십분이든 좋다. 시간을 정
해서 그 시간에 딱 앉아서 좌선을 하고 그리고 일과중에 틈나는 대로 일분명상 이분명상을 틈나는대로
계속해서 하라는 이유는 그렇게 하게 되었을 때 자꾸 마음을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호흡을 관찰하면서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우리가 견성이라고 하는 그 자리를 우리가 쉽게 말해서 아까 매직아이를 말 했는데
매직아이 보는 방법을 모른다 해도 어쨌든 자꾸 자구 보다 보면 어느날 한번 탁 초점 맞을 때가 있지 않
겠습니까?
그런데 아예 보지도 않고 내팽겨 쳐버리면 초전이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걸 붙잡아놓고 한시간 두시간
세시간 열시간 계속 하고 있으면 오히려 더 안돼죠. 오히려 더 안됩니다.그러니까 하루에 시간을 딱 정해
놓고 집중수행과 생활수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십분이든 삼십분이든 한시간이든 길게 안 하는 것에 대
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십분도 좋다. 딱 정해놓고 집중수행을 하고 일상생활에서 일분 이분씩 자주 자주
마음을 들여다 본단 말입니다. 이게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수행의
방법입니다. 과도하게 집착하지도 않고 자주 떨어져 있지 않고 자주 자주 마음을 관찰하고 보는 것...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괴로움을 수행에 대한 괴로움을 내려 놔야 되는 겁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수행에 대한 부담감, 수행에 대한 괴로움 수행 때문에 괴로워요. 남들은 수행 잘
하는데 난 못하니까 그것 때문에 괴롭단 말이에요. 수행은 잘하고 못하는 게 없고 우리는 본래부터
이미 언제나 완전하게 깨달아 있으니까 지금 깨달아도 좋고 몇 년 있다 깨달아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왜? 眞理의ㅡ 자리에서는 시간이 없으니까, 時間이라는 것은 空虛한 幻想일 뿐입니다.
多重宇宙, 平行宇宙라는 얘기 들어 보셨을 거에요. 동시에 존재하는 평행우주라는 것에서는
여러분은 완전히 이미 깨달아서 부처가 돼 있는 여러분도 있고 아직 지금의 나보다도 더 열악한
열등한 의식수준을 가지고 있는 나도 있는 겁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라한과를 가지고 있을 만큼의
그런 높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나도 지금 평행우주속에는 동시에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이
둘이 아닌 하나인데 시간이 다르지 않은데 빨리 깨닫겠다 하는 건 시간에 메이게 되는 겁니다.
스스로 중생으로 옭아매는 것과 똑같다.
여러분들은 빨리 깨달아서 완전히 해탈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고 지금 여기 이 瞬間 이 자리에 이미
解脫해 있기 때문에 그저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존재해 있기만 하면 되는 존재다. 수행에 대해 괴로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때 수련대회 다닐 고 할 때요. 저는 엄청 스트레스 받았습니다. 수행을 잘했어야
했기 때문에 수행을 잘하는 사람들에 비해 내가 열등하면 안됐기 때문에 이거 뭐 투쟁하듯이 경쟁하듯
이 수능시험에서 일등 해야 되는 것처럼 남들보다 수행을 더 잘 해 가지고 뭔가 모를 체험도 좀 있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붙잡는 것을 수행으로 알았다 오래하는 것 지속하는 것을 수행으로 알았다. 이건
수행과 전혀 거리가 먼 거다. 여러분들이 스트레스 받으면서 수행을 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스트레스 받으면서 수행하면 수행 절대 안돼요.
그러니까 즐기듯이 재미있게 놀이하듯이 10분 좌선하는 거야 놀이 하듯이 할 수 있잖습니까?
스트레스 안받고도 틈나는 대로 일분 이분 오분 일이분 명상 하는 거야 호흡 잠깐 잠깐 보는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쉽게 쉽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시길 바라는 마음을 말씀 드리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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