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신과 나눈 이야기,(13장)

장백산-1 2015. 7. 15. 18:49

 

 

 

 

신과 나눈 이야기,(13장)

 

 

제가 직면하고 있는 일부 건강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저는 평생토록 지속되기에 충분할

만큼 심한 고질병들을 앓아 왔습니다. 왜 저는 지금까지도 그런 병들을 갖고 있는 걸까요? 이번 생애에

서 말입니다.


우선 한 가지 점을 분명히 해두자. 너는 그 病들을 사랑한다. 아무튼 그 病들 대부분을. 너는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남들의 注意를 끌기 위해 그 病들을 놀라울 만치 잘 利用하고 있다. 어쩌다 네가 그 病들을

사랑하지 않는 때라고 해봐야, 그 病들이 정도 이상으로 진전되었을 때, 애초에 네가 그 病들을 지어내면

生覺한 程度보다 훨씬 더 심할 때뿐이다. 아마 너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病은 自身 스스로 創造한다.

리타분한 現代 醫士들조차 지금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自身을 스스로 아프게 만드는지 알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전혀 意識하지 못한 채 그렇게 스스로 病을 만들어내다(그들은 자기네가 뭘 하는지도 모른

다). 그리하여 病이 들면 그들은 왜 病이 자신을 덮쳤는지 모른다. 마치 자기네 스스로 저지른 病이 아니라
하늘에서 뭔가가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느낀다.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을 意識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비단 健康 問題와 그 結果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면서도 自身이 왜 癌에 걸렸는지 의아

해한다. 사람들은 고기와 지방을 먹으면서도 왜 동맥경화가 일어났는지 의아해한다. 사람들은 한평생 계

속해서 화를 내면서도 왜 심장마비가 왔는지 의아해한다.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무자비

하게 남들과 競爭하면서도 자신한테 왜 뇌일혈이 일어났는지 의아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죽음

으로 몰아갈 만큼 걱정하며 살지만, 이것은 그리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근심 걱정은 마음의 活動 중에서 미움 다음 가는 나쁜 것으로, 거의 最惡이라 해도 좋을 만큼 自身을 심하게

破滅시키는 마음의 形態이다. 금심 걱정은 一定한 焦點 없이 精神 에너지를 쓸데없이 허비하게 만든다.
그것은 또 몸에 害를 주는 生化學 反應들을 創造하여, 소화불량에서 관상동맥 폐색까지 온갖 병들을 일으킨다.
근심 걱정을 그만두면 健康은 이내 좋아질 것이다. 걱정은 마음이 自身과 나(神)와의 連結性을 理解하지 못할

때 보여주는 마음의 行動이다.

미움은 최고로 危險스런 精神狀態이다. 그것은 몸에 毒을 퍼뜨려,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結果를 빚어낸다.
두려움은 '너희'의 모든 것에 맞서는 對立物이다. 따라서 그것은 너희의 精神 健康과 肉體 健康에 對立하는

結果를 낳는다. 두려움은 근심걱정이 增幅된 마음의 形態이다. 걱정과 미움과 두려움은, 그 派生物들인 不安,

애달픔, 성욕, 탐욕, 불친절, 심판하기, 비난 따위와 함께 어느 것이나 몸 細胞들을 공격한다. 이런 條件에서

健康한 몸을 유지하기란 不可能하다. 자만심, 방종, 욕심 같은 것들은 앞의 것들보다 다소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신체의 질병이나 불편을 가져온다. 모든 병은 무엇보다 먼저 精神, 마음에서 창조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남한테서 옮는 병들은요? 예를 들면 감기라든지....그리고 에이즈 같은 건요?


너희 삶에서 生覺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絶對 없다. 生覺은 磁石과 같아서 같은 생각

들의 결과를 너희에게 끌어다준다. 때로는 생각이 명료하지 않아서, "나는 고약한 병에 걸릴 거야"라는 식의
확실한 원인제공자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은 그보다 훨씬 더 微妙한 形態로 나타날 수 있다(그리

고 대체로 그렇다). 예를 들면 ("나는 살 가치가 없는 놈이야"), ("왜 내 인생은 늘 엉망이야"), ("나는 실패한

인간이야"), ("신이 나를 벌하실 거야"), ("사는 것이 지겹고 신물이 나!") 등등......

生覺은 대단히 微妙하면서도 엄청나게 强力한 에너지 形態다. 말은 그보다 덜 微妙하지만 더 짙은 에너지

形態이고, 行動은 셋 중에서 가장 짙은 에너지 형태이다. 行動은 둔중한 물질 형태와 둔중한 움직임 속의

에너지이다. 너희가 "나는 패배자야" 같은 否定的인 槪念을 生覺하고 말하고 行動할 때, 너희는 엄청나게

强力한 創造 에너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너희가 感氣에 걸린다 해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감기에 걸리는 정도는 아마 가장 弱小한 結果일 것이다.

 

否定的인 生覺의 結果들이 일단 物質에너지의 形態를 띠고 나면, 그 結果들을 뒤집기는 대단히 어렵다.

不可能하지는 않지만 대단히 어렵다. 그것을 뒤집으려면 最高의 믿음이라는 行動이 필요하다. 宇宙

肯定的인 힘에 대한 남다른 믿음이 있어야 한다. 너희가 宇宙의 肯定人 에너지, 이 힘을 神이라 부르든,

女神, 혹은 부동(不動)의 動因, 原動力, 最初 原因, 하느님, 부처, 宇宙本性, 혹은 그밖의 어떤 딴 이름으로

부르든 상관없이 말이다. 치유자(Healers)들이 바로 이런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것은 '절대 앎'에

전달되는 믿음이다. 치유자들은 너희가 바로 지금 여기 이 瞬間 宇宙 全切이고 完璧하고 完全한 存在들

임을 알고 있다. 이 앎도 역시 生覺이다. 아주 强力한 에너지를 지닌 生覺이다. 이런 앎도 山도 옮길만한

힘을 갖고 있으니 너희 몸의 分子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치유자들이 종종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치료해줄 수 있는 건 이와같은 生覺의 原理 때문이다. 生覺은 거리에 制限받지 않는다. 生覺은 世上으로

퍼져가며, 말의 에너지 波動보다도 더 빨리 宇宙를 가로지른다.

"주님이 그저 나으리라는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마태오 8:5~13 - 옮긴이)" 그래서

그 순간 그렇게 되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장교의 믿음은 그토록 컸다. 그러나 너희의 마음은

모두 문둥병을 앓고 있다. 너희의 마음은 否定的인 生覺들에 먹혀버렸다. 否定的인 그런 生覺들 중에는

너희에게 注入된 것들도 일부 있다. 그러나 그중 상당수는 너희 스스로가 지어내거나 불러일으켰다. 그러고

나서 너희는 몇시간이고 며칠이고 몇주고 몇달이고, 심지어는 몇년이고 그런 否定的인 生覺들을 지닌 채 즐

긴다...그리고는 自身이 왜 病 들었는지 의아해한다. 네가 표현했듯이 너는 '일부 건강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네 思考方式의 問題들을 解決한다면 말이다. 그렇다, 너는 새로운 큰 문제들이 발전해가는 걸 막을 뿐

아니라, 네가 이미 취득한(스스로에게 부과한) 條件들 중 일부를 치료할 수도 있다. 또 새로운 큰 문제들이
일어나는 걸 예방할 수도 있다. 그냥 네 生覺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神에게서 나오는 말 치고는 너무 저속하게 들려 이런 말을 하기는 싫지만, 제발 自己自身을 잘 보살

피도록 하라. 너는 自身의 몸을 함부로 굴린다. 몸에 뭔가 異常이 있지 않나 疑心이 들기 前까지는 전혀 神經

을 쓰지 않는다. 너는 예방 차원의 몸관리는 사실상 전혀 하지 않는다. 너는 몸보다는 車에 더 신경을 쓴다.

이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너는 정기 검진이나 연례 종합건강진단, 의사가 처방해준 치료법이나 약들을

사용하여(너는 의사가 제안하는 처방대로 따르지도 않으면서 뭣하러 의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가? 이

점에 대해 나를 납득시킬 건덕지가 하나라도 있단 말인가?) 돌발사고를 예방하지도 않고, 그나마 건성으로

들르는 예약진료일 사이 기간 동안에는 또 얼마나 심하게 몸을 학대하는가! 운동을 하지 않아 네 몸은 자꾸
늘어지고 있다. 그보다 더 나쁜 건 몸을 使用하지 않아 자꾸 弱해지는 것이다.

또 너는 몸에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않아 몸을 더 쇠약하게 만들고 있다. 거기다 너는 온갖 毒素와

毒極物들, 飮食으로 가장한 가장 고약한 物質들로 몸을 채운다. 그런데도 몸은, 그  경이로운 엔진은 여전
히 너를 위해 달리고 있다. 그런 맹폭격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칙칙폭폭 칙칙폭폭 용감하게 달려가

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네가 자기 몸더러 이런 惡條件들 속에서 살아남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끔찍한 일

이고. 그러나 너는 거의 혹은 전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부분을 읽고 후회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그래 놓고는 곧장 몸을 함부로 굴리는 예전 習慣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왜 그러냐고 묻기가 겁나는군요.


네게는 세상을, 삶을 살려는 意志가 없기 때문이다.


가혹한 기소장(起訴狀)처럼 들리는군요.


난 가혹하게 굴 마음도, 기소할 마음도 없다. '가혹하다'는 말은 相對的인 用語, 즉 네가 그 이야기에 대해

내린 判斷이다. 또 '기소'는 罪를 암시하고, '罪'는 나쁜 짓이란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나쁜

짓도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죄도 기소장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나는 단지 眞實을 말했을 뿐이다. 眞實한

말들이 다 그렇듯이, 그 말에는 너를 일깨우는 效果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로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잠자고 싶어한다. 이 세상이 이런 상태가 된 건 이 세상이 자면서

걷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야기한 것이 事實이 아닌 것 같은가? 네게는 살려는 意志가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물론 네가 "이제 막 마음을 바꿨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앞으로의 네 行動

에 대한 내 예언을 재고해볼 여지는 있다. 내 예언이 이전 체험에서 나왔다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또한 그 말에는 너를 깨우려는 뜻도 들어 있다. 이따금 어떤 사람이 너무 깊이 잠들어 있을 때는 좀 잡아흔

드는 게 필요하니까.

過去에 나는 네가 살려는 意志가 거의 없음을 보았다. 지금 네가 그 事實을 否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말보다는 行動이 더 確實하게 말해주는 법이다. 너처럼 이십년 동안 담배를 하루에 한갑씩 피워댄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한번이라도 담배를 피운 적이 있는 사람은 살려는 意志가 없는 사람이다. 너는 자신

이 몸에게 무슨 짓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전 벌써 십년도 더 전에 담배를 끊었는데요!


이십년 동안 몸을 잔뜩 혹사하고 나서야 끊었지. 그리고 한번이라도 自己 몸 속에 술을 들이붓는 사람은

살려는 意志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저는 아주 적당한 정도로만 마십니다.


그 몸은 술을 마시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그리고 술은 精神을 害친다.


하지만 예수도 술을 마셨는데요! 그는 결혼식에 가서 물을 포도주로 바꿨다구요!


그래, 누가 예수가 完全하다고 말하던가?  오, 맙소사.

말해봐, 나한테 짜증이 나지?


神에게 짜증을 내다니요? 천만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뜻은요, 그게 어느 정도는 그냥 단순화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 生覺엔 우리가 이 問題를 좀 더 멀리까지 가져가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저한테 "뭐든지 적당히 하라"고 가르치셨죠. 술에 관한 문제에서 저는 이 가르

침을 따랐습니다.


적당히만 혹사당한 몸은 좀 더 쉽게 회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네 아버지의 가르침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애초의 내 주장을 고수할 것이다. 그 몸은 술을 마시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알코올 성분이 든 藥들도 있는데요!


너희가 藥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내가 어찌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주장을 고수할 것이다.


당신은 정말 엄격한 분이로군요. 그렇잖습니까?


보아라, 眞實은 眞實이다. 누군가가 "약간의 술은 害롭지 않다"고 말하고, 지금 네가 그러하듯이 너희가 사는

대로의, 삶의 맥락 속에 그 주장을 놓는다면, 나로서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내가 말한 眞實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단지 너희가 그 眞實을 無視하는 걸 許容해주는 것일 뿐. 하지만

이걸 生覺해봐라. 사람의 몸은 대체로 적으면 쉰살, 많으면 여든 살 정도에서 완전히 소모된다. 일부는 그 보

다 더 오래 버티긴 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또 일부는 그보다 더 빨리 기능을 멈추기도 하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동의하느냐?


예, 물론입니다.


좋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논의를 위한 좋은 출발점을 마련한 셈이다. 그런데 좀 전에 내가 "약간의 술은

해롭지 않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했을 때, 나는 "지금 너희가 사는 대로의 삶의 문맥 속에 그 주장을 놓

는다면"이란 조건을 덧붙였다. 너도 알다시피 너희 인간들은 지금 사는 식의 삶에 만족하는 듯하다. 하지만

네가 이걸 알면 놀라겠지만, 너희의 삶은 完全히 다른 方式으로 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너희의 몸은

지금보다 더 오래 지탱하게끔 設計되었다.


정말요?  그렇다.

얼마나 더 오래요? 무한히 오래.

그게 무슨 뜻이죠? 내 아들이여, 그건 너희의 몸이 영구히(forever) 지속되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영구히라고요?  그렇다. 그 말을 "오래 오래도록(for ever more)"으로 읽도록 하라.

그러니까, 우리가 결코 죽지 않을 존재였고, 존재란 말씀인가요?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生命은 永遠하다. 너희는 不滅의 存在들이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는 그저 形態만 바꿀 뿐이다. 애초에 너희는 그것조차도 바꿀 필요가 없었다. 形態를 바꾸기로

決定한 건 너희였지, 내가 한 건 아니다. 나는 너희의 몸을 오래오래 지속되도록 만들었다. 너는 정말로

神이 할 수 있었던 最高의 作品, 내가 지어낼 수 있었던 최고의 작품이 고작 육칠십년이나 팔십년 정도

버티다가 스러질 몸이었다고 생각하느냐? 그 정도가 내 능력의 한계라 생각하느냐?


그 문제를 꼭 그런 식으로 생각한 건 아닙니다만......


나는 너희의 장대한 몸을 오래오래 지속하도록 설계했다! 最初의 人間들은 사실상 고통도 없고, 오늘날

너희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모르는 몸으로 살았다. 너희는 종교 신화에서 이런 유형의

最初의 人間들을 아담과 이브라고 불러, 그들에 관한 단편적 記憶을 象徵化하고 있다. 물론 實際로는 단

두 사람만이 아니라 더 많은 수였지만. 내가 이 책에서 거듭 설명해왔다시피, 애초에 相對界의 物質인 몸
의 모습을 하고 얻은 體驗을 통해 너희 自身을 '참된 자신'으로 認識할 機會를 갖겠다는 發想은 멋진 너희

靈魂들에게서 나왔다. 이 觀念은 測定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모든 振動(사고 형태)의 速度, 즉

주파수를 늦추어, 소위 몸이라는 物質까지 포함하여 物質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實現되었다.

生命은 오늘날 너희가 數十憶年이라 부르는, 눈 깜짝할 찰라의 瞬間에 일련의 段階를 거쳐 進化했다.

그리고 그 성스러운 찰라 동안에 너희는 生命의 물인 바다에서 나와 陸地로 들어섰고, 이어서 오늘날

너희가 지니고 있는 形像을 갖추었다.

 

 

가져온 곳 : 

카페 >의식 혁명

|

글쓴이 : 배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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