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때부터 나름 아주 열심히 불교를 믿어 왔다.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면서는 더 좋은 불자가 되기 위해서, 더 훌륭한 수행자의 대열에 끼기 위해서 무진 노력을 다해 왔다.
때론 수행영웅주의에 빠져 용맹정진만 최선으로 여겨 수행은 목표 정해 몰두하는 운동경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中道的 수행을 찾는 게 필요
언젠가 대학교 때 써놓은 낡은 일기장을 열어 보고는 피식 웃었던 기억이 있다. 패기와 열정으로 수행정진하며 곧 깨달을 기세로 투쟁하고 분투하듯이 하루하루의 수행일기가 쓰여 있었던 것이다. 하루에 얼마만큼 수행을 해야 한다고 월간계획까지 잡아 놓고 그것을 다 못한 날의 좌절감과 패배감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에게 있어 수행이란 아무리 투쟁하고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먼 산이었다. 나처럼 하열한 근기의 수행자는 도저히 불법과 안 맞는 듯 느껴졌다.
언젠가는 결가부좌로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고,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수행자로서의 기본 자질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몇 번이고 앉아 있기 위한 도전을 용맹스레 감내해 냈고, 몇 번은 몇 시간을 버티고 버티며 심지어 몸살이 올 정도까지 후들후들 떨리는 싸움을 해내야 했다. 또 한 가지는 방학 때 수행센터를 갔었는데, 수행 중에 다른 사람들은 온갖 경계를 체험하고, 신비체험이며, 수행 중 일어난 놀라운 경계를 이야기 하면서 스님들께 수행점검을 하곤 했다. 정말 신기했다. 왜 나에게는 저런 신비체험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체험을 한 번 해보겠노라고 무진 애를 써 보았지만, ‘나는 도저히 안 되는 사람인가’라는 실망감만 느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그런 신비체험 같은 것들이 수행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잣대 쯤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정말 그럴까? 수행자는 저렇게 노력하고 분투하며 용맹한 기세로 나태함과 싸워 이기는 전쟁터의 투사 같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오래 앉아 있는 데 성공하고, 신비 체험하는 데 성공하면 나의 수행력은 나날이 높아져 가는 것일까?
부처님의 경우는 어떠셨을까? 어느 날 부처님의 생애를 강의하다가 부처님께서도 6년이라는 고행의 과정을 겪으셨고, 結局 苦行은 참된 修行이 아님을 깨닫고 苦行主義를 떠나셨음이 직접적으로 와 닿은 적이 있다. 과연 그랬다. 고행주의는 이미 2500년 전 부처님께서 中道가 아님을 깨닫고 폐기처분한 것이었다.
중국 선불교의 황금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래 앉아 있는 것을 수행으로 여기고, 마음을 닦고 닦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북종선이 아닌 혜능의 남종선이 한국 불교의 원류가 아닌가. 육조는 “만약 수행으로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을 수 있겠는가” “늘 앉아서 몸을 구속한다면 도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좌선 수행 중이던 마조에게 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라고 했던 회양의 일갈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마조 스님은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다만 더럽히지만 말라”고 했고, “수행도 좌선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여래의 청정한 선”이라고 했다.
이처럼 용맹정진하고 고군분투하는 수행자의 자세는 그동안 미덕처럼 여겨졌지만 사실 수행은 싸워 이기거나 분투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분투가 우리를 진리와 가깝게 하지는 못한다. 고난을 극복한 수행자의 영웅담을 숭배할 필요는 없다.
| | | ▲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진리가 확인되는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中道的인 수행 아닌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수행 영웅담을 들으며 좌절감을 느끼지는 말라. 신비체험 같은 하나의 경계를 수행의 진척으로 여기지도 말라. 수행은 특정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운동경기 같은 것이 아니다. 운동과는 달리 수행이란 이미 到着해 있는 이들이 到着해 있음을 마음으로 깨닫고 確認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到着地에 이미 到着한 사람에게 到着을 위한 고군분투의 苦行이나 到着을 위한 과정에서의 다양한 신비체험 같은 것은 필요 없는 것이다.
[1314호 / 2015년 10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