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없다, 진리 아닌 것도 없다
2016년 02월 29일 (월) 13:27:51 법상 스님 beopbo
붓다 입멸 후 500여년 경 나가르주나(용수)는 眞理란 말로써 說해질 수 없는 것임을 世俗諦(세속제)와
勝義諦(승의제)라는 표현으로 설명했다. 우리가 眞理라고 하는 말, 언어, 절에서 가르칠 수 있는 眞理란
그저 世俗諦, 즉 方便의 眞理일 뿐임을 역설했다. 卽 眞理는 말로써 설해질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말이란 意味가 담긴 言語로서, 사람들은 特定한 말에 自己만의 特定한 意味를 부여한다. 보편적인 의미
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 언어에는 자기만의 特定한 意味와 槪念이 담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가 眞理를 말로 설명하게 되면 말로 설명하는 眞理는 어디까지나 眞理 그 自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나름대로 특정하게 인식한 바의 相對的인 眞理가 될 수밖에 없다.
‘佛性’이니 하는 등의 말은 眞理 드러내기 위한 方便의 道具
眞理를 기리키는 道具인 方便의 말에 執着해 分別하면 眞理는 드러나지 않아'
예를 들어 우리가 佛性, 法性, 참나, 마음, 法, 本來面目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槪念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스란히 그 뜻하는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없다. 만약에 佛性이나 本來面目이 우리 認識의
對相이거나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모양이 있는 어떤 物件이라면 모양이나 意味, 槪念으로 理解될 수 있
을지 모르지만, 佛性은 우리 意識이 分別하고 認識해서 해서 알 수 있는 境界 對相이 아니기 때문이다.
事實 佛性이란 槪念, 法이란 槪念은 특정하게 定해진 어떤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本來無一物이다. ‘금강경’에서도 ‘이 法(眞理)은 진실함도 없고 헛됨도 없다’고 했고, ‘반야심경’에서는 ‘얻을
바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法을 說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佛性이나 法에 대해 말로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防便의 眞理, 즉 言語라는 世俗諦를 사용해서 법을 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
이다. 그러나 言語라는 方便은 어디까지나 方便일 뿐이기에, 언어라는 방편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본래면목이나 불성이라는 말을 듣고, 초기불교의 無我思想과 다르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言語라는 方便의
쓰임에 집착해서 사로잡힌 것이다. 佛性이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일컬어서 불성이라는 이름, 말로 표현
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佛性卽非佛性 是名佛性).
예를 들어 ‘낙서금지’라는 말을 벽에 씀으로써 그 말은 낙서를 금지할 수 있는 方便은 될 수 있지만, 벽에
쓰여진 낙서금지라는 그 말 自體가 이미 낙서가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낙서금지라는 말을 方
便으로 받아들일지언정, 그 말을 따라 너도나도 벽에다 ‘낙서금지’라고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지금까지 歷史가 해 온 일, 종교와 사상가가 해 온 일, 眞理라고 들어온 모든 가르침이 해 온 일이
모두 ‘낙서금지’라는 말에 덧칠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만약 眞理라는 달을 가리키는 方便인 손가락을 보지
말고 眞理인 달 그 自體를 보려거든, 이제 낙서금지라는 그 말을 헤아리고 분석하고, 따라 쓸 일을 생각하지
말고, 그저 그 텅~빈 벽에 어떤 낙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지금 여기 이 순간 매 순간에 존재하고 있을
뿐, 어떤 方便의 글씨도 쓰려고 하지 말라. 어떤 方便의 生覺도 일으키지 말라.
우리가 그렇게 찾고 구하는 法, 眞理는 지금 여기 이 순간 매 순간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이것’이다. '이것은'
어떤 말이나 언어적 설명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意識 생각 마음으로는 절대로 헤아릴 수가 없는 ‘그것’이다.
진리, 불성, 본래면목, 참나, 참마음(眞心), 법, 佛(부처)는 언제나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이렇게 매 순간
내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것은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불생불멸이다.
‘떠들지 마!’라고 소리치지만, 사실은 그 말 자체도 소음에 불과하다. 이제 그런 말도 따라하지 말고, 그저
우주의 언어인 침묵 그 자체로 존재하라.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현존하라.
그 어떤 이름이나 말도 眞理 그 자체는 아니다. 이름이나 말은 소음일 뿐, 진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眞理는 없다. 眞理가 없다는 事實은 곧 이 세상 모든 것, 우리들, 우주만물이 眞理라는 의미다.
眞理는 없지만, 그렇기에 ‘금강경’의 말처럼 ‘一切法이 모두 佛法’이다. 즉,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들,
우주만물이 모두 다 眞理이다. 그러니 우주삼라만상만물, 頭頭物物, 山河大地, 草草花花, 모래 한 알,
먼지 한 톨까지 眞理의 現顯 아닌 것이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진리다. 산과 들, 꽃 한 송이와
당신과 나를 빼고 별도의 특별한 神, 眞理, 부처, 불성, 참나, 본래면목이 따로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거쳐 간 수없이 많은 각종의 학교에서 가르쳐 온 그 모든 知識을 넘어 自己 自身
에게로 돌아가 의지하라. 그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있는 이대로 온전한 眞理인 自己 自身을 確認
하라.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하지 않든, 당신이 살아내고 있는 삶, 세상은 찬란하고 숭고한 眞理이다.
-법상 스님-
[1333호 / 2016년 3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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