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연기를 통한 괴로움의 원인 탐구
법상 |2016.03.17. 19:02 http://cafe.daum.net/truenature/S27F/499
오늘은 십이연기의 각 지분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탐구 해 보도록 하자.
부처님께서는 노병사와 우비고뇌라는 괴로움의 原因이 무엇인지를 사유해 보았더니, 당연히 그 原因은
생(生)에 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노병사라는 괴로움의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태어난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노병사라는 괴로움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태어남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生의 原因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유(有)다. 즉 어떻게 태어날지에 대한 業이 있어야지만 태어
날 수 있는 것이다. 業이 없다면 더 이상 生死하는 輪廻의 生을 받을 아무런 理由도, 原動力도 없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業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마다 業이 다 다르다. 태어남을 받으려면 業이라는 어떤 生의
原因이 ‘있어야(有)’ 하는데, 바로 그 業有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欲有, 色有, 無色有는 저마다 각기
다른 業有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찌 有의 종류가 세 가지만 있겠는가. 우주상에
존재의 숫자 만큼 많은 有의 方式이 있다. 즉 業은 일체 모든 중생이 각각 다 다른 것이다. 業이 다 다른 것은
生의 原動力, 生의 原因이 되는 業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제각각 다 다른 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의 원인이 業有에 있다면, 그 業有의 原因은 어디에 있을까? 取에 있다. 즉 執着, 取着心이 있을
때 그 취착하고자 하는 대상을 취하려는 行爲인 業을 일으키는 것이다. 대상을 취하여 집착하려는 마음으
로, 생각을 일으키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함으로써 生覺 말 行動의 三業을 일으키는 것이다. 가만히 사유해
보면,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말 행동 三業은 宇宙萬物, 對相을 取하고자 하는 意圖에서 시작된다.
어떤 아름다운 女人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행동으로 구애하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에 그녀에 대한 취착심이 생겨나야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꽃도 사다 주고, 쫒아 다니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엔 얼마나 아름답고 잘생긴 異性이 많은가. 그렇다고 그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걸
거나, 쫒아 다니지는 않는다. 아름답고 잘생긴 異性들은 그저 거기에 있을 뿐, 나와는 상관없는 존재일 뿐이
다. 그러나 어떤 特定한 對相을 집착하고, 내 것으로 취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비로소 저질러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직업을 가지는 것도 돈과 직장을 取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고, 공부하는 행위
도 좋은 성적, 좋은 대학을 取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운동하는 것도 건강한 몸을 取하려는 취착심
에서 시작된다. 이처럼 모든 行爲, 즉 모든 業의 원인은 취착심에 있다.
그렇다면 取着心은 어디에서 올까? 取의 原因은 愛에 있다. 愛慾, 欲望이 있기 때문에 取하려는 마음이 생기
는 것이다. 좋아하는 욕망, 사랑하는 욕망이 있을 때 그 대상을 내 것으로 取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愛의 原因은 무엇일까? 그것은 受에 있다. 대상에 대해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그 좋은 느낌에는 愛慾
이 따라오는 것이다. 대뜸 愛慾과 執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앞서 좋은 느낌이 먼저 일어난다. 좋
은 느낌에는 애욕이 따르고 취착심이 따르는 것처럼, 싫은 느낌에는 미움과 증오 같은 싫은 마음이 따르고
연이어 거부감이 일어난다. 좋은 느낌에는 애욕이 생기면서 ‘내 것’으로 붙잡으려는 취착심이 따르고, 싫은
느낌에는 미움, 증오가 생기면서 내 바깥으로 보내버리려는 거부감이 생기는 것이다. ‘내 안’으로 끌어당기
려는 집착이나, ‘내 바깥’으로 밀어내려는 집착이나 모두 결과적으로는 ‘취착심’에 다름 아니다.
느낌, 즉 受의 原因은 무엇일까? 受의 원인은 觸에 있다. 좋거나 싫은 느낌이 일어나려면 대상과 접촉해야
한다. 내 앞에 어떤 대상이 ‘있다’는 느낌이 일어나야 그 대상에 대해 좋거나 싫은 느낌을 일으킬 수 있지
않겠는가.
接觸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앞의 십팔계에서 이미 배운 것처럼 六內入處와 六外入處,
그리고 六識이 和合함으로써 일어난다. 그래서 촉의 원인은 차례로 六入과, 名色, 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接觸을 하려면 당연히 우리 몸에 感覺器管, 感覺機能이 있어야 한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 기능, 감각활동을 六入이라고 한다.
六入의 원인은 名色이다. 명색 즉 대상이 없다면 감각기능이 있을지라도 감각할 수 없을 것이다. 감각
활동은 감각의 대상이 있을 때 일어난다. 六入의 對相은 六外入處인데, 엄밀히 말하면, 육입이 감각적
으로 접촉하는 대상은 六外入處만이 아니라, 六內入處도 포함된다. 눈은 外部 事物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바라보고, 귀 또한 外部의 소리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소리도 듣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六入의 原因은 六外入處라기 보다는 名色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름과 모양을 가진 안팎의
모든 것이 六入의 對相인 것이다.
名色은 識으로 因해 일어난다. 물론 識 또한 名色으로 인해 발생한다. 識과 名色은 循環 緣起의 관계에 있다.
눈귀코혀몸뜻의 六入이 그 對相인 名色, 色聲香味觸法을 認識하는 것이다. 六入에 들어온 대상인 名色이 있
을 때 비로소 그 대상인 명색을 分別하고 認識하여 아는 것(識)이다.
그러면 識의 原因은 무엇일까? 識의 原因은 行에 있다. 五蘊 즉, 色受想行識(모양 물질, 느낌 감정, 생각 상상
이미지, 욕망 욕구 충동 의지 의도, 분별심 분별의식)에서 이미 배웠듯이 受想行의 도움을 받아 識이 최종적
으로 대상을 分別하여 認識하는 것,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受蘊과 想蘊의
기초자료를 가지고 行蘊이 의지작용인 業을 일으켜 有爲를 만들어낸다. 業이 有爲를 만들어내면 識蘊은 行蘊
이 만들어낸 有爲를 認識한다고 했다. 그리고 識이 그 行에 의해 造作된 有爲를 認識할 때 이름과 형태를
부여해 명색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이 과정이 바로 ‘行-識-名色’이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 또한
일방적인 직선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 循環되고, 되먹임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識이 있으면 識이 認識할 有爲를 만들어내는 行의 作用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行의 原認은 무엇일까?
우리가 業을 짓는 原因은 앞에서 取着과 愛慾이라고 했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직접적인 業의 원인을 탐구
함으로써 그러한 취착과 애욕이 일어나는 근원적인 원인을 묻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애욕을 일으키고,
취착을 일으킬까? 그 根源的인 原因은 바로 어리석음, 즉 無明에 있다.
五蘊無我인 것 처럼, 나라고 착각은 본래 실체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아 안다면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집착하려 하거나 애욕심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오온무아를 모르는 상태가 바로 무명이다. 즉 ‘나’라는
것이 固定된 實體가 아닌 줄 모르고, 그 허망한 나에 집착하고, ‘내 것’으로 취하려하며, ‘내 생각’이 옳다
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無明, 어리석음은 ‘나’를 실체화하려는데서 시작된다.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核心은 이 世上 모든 것들은 緣起的으로 맞물려서 돌아가며, 그렇기에 이 世上은 無我고,
그렇기 때문에 兩極端을 포함하는 中道를 실천해야 한다고 설하셨다. 緣起 中道 無我는 서로 다른 槪念이
아니다. 이처럼 연기와 중도 무아를 모르는 意識의 상태가 바로 무명이요, 어리석음인 것이다.
이처럼 十二緣起는 老病死라는 근원적 괴로움이 어떤 원인에서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보여준다. 그것은
12연기의 전체 지분이 그 원인이 되고, 그 중 핵심은 무명과 취착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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