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眞實과 方便 ▒ 종범 스님
方便 나 아닌 다른 사람을 相對하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眞實은 自己 自身입니다. 그래서 이제 自己
自身으로 돌아오면 眞實 뿐인데 이 眞實이 다른 사람에게 傳해질 때는 方便이라는 도구가 必要합니다.
방편이라고 하는 도구, 수단은 글자 그대로 方法, 便은 가장 알맞은 것, 便利한 것. 眞實은 하나, 나
하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모를 相對 할 때는 父母를 相對하는데 가장 알맞은 方法이 있어요. 그게
方便이거든요. 친구를 상대할 때는 친구를 상대하는데 가장 알맞은 방법, 또 아이들을 상대할 때는
아이들을 상대하는데 가장 알맞은 방법이 있다, 그게 상대를 상대하는 도구, 방편입니다.
그런데 眞實은 단 하나, 나 하나죠. 부모, 친구, 아이를 상대하는 나는 하나인데 상대방을 다루는 方便은
각각 다 다르거든요. 그래서 내 眞實만 믿고 方便을 쓰지 아니하면 그게 어긋난다 이말 이예요.
왜그러냐 하면 格式이 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世上은 格式을 가지고 만들어 지는데 이 格式을 알맞게 選擇을 해서 잘 쓰는 것을 方便이라
그럽니다. 그 格式이 모두 方便으로 만들어진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북쪽에 살 때는 북쪽에서
사는데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집도 짓고 옷도 만들고 그럽니다. 그게 방편이죠. 남쪽에서 살 때는 남쪽
에서 사는데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집 짓고 옷 입고 생활합니다. 그게 방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眞實과 方便, 方便과 眞實이 인간들이 살아가는데도 아주 重要하고, 또 부처님이 중생을
敎化 하는데도 重要하고, 중생이 부처님 만나서 發心을 해서 道를 공부해 나가는데도 아주 重要합니다.
方便이 없으면 사랑도 잘 못 해요, 사랑이 깨지는 것도 다 方便을 잘못 써서 깨지더라구요 보니까.
방편이 없으면 敎育도 못합니다. 그냥 교육자가 된 게 아니거든요. 방편이 없으면 事業도 잘 못하고,
그게 世上살이죠.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실 때도 다 방편을 사용하셨구요. 도를 닦아
가는 데도 다 방편이 있습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을 法華經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법화경에 方便品이
있습니다. 그 뒤에 法師品이 있는데 거기서 뭐라 그러냐 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이 첫째는 方便門을 열었다
그래요. 개(開)方便門이라, 方便門을 열었다는 말이죠. 여러 가지 格式을 만들어서 중생들이 다 따라오
게끔 門을 열어 놓은 겁니다. 그게 方便門을 열어놓은 겁니다.
그럼 그런 方便門을 왜 열었나? 석모니부처님이 方便門을 연 眞實은 뭐냐, 目的은 뭐냐 이거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 위 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입니다. 중생을
모두 다 깨닫게 하는거, 이걸 ‘시진실상(示眞實相)’이라 그럽니다. ‘示’라고 하는 건 보인다는 말인데요,
眞實相을 보였다 이거 예요. 그러면 이 眞實相을 보이는 게 目的인데, 중생이 다 깨닫게 하는 게 目的
인데 그냥 진실상을 깨닫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멋해서 方便門을 열 수 밖에 없었던거죠.
먼저 ‘開方便門 하야’ 방편문을 열어서 ‘示眞實相 이라’ 이 세상의 진실한 모습을 중생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석가모니부처님의 중샌을 교화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손님 接待하는 것도 마찬 가집니다. 손님을 접대하는 데는 손님을 만나서 그 손님과 정을 나누고
대접하는 게 목적이거든요. 손님을 대접하는 게 목적인데 손님 대접을 어떻게 할 건가,그게 方便 이예요.
차 한 잔으로 대접할건가, 음식으로 대접할건가, 선물로 대접할건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눠서 대접할건가,
이게 전부 방편이란 말입니다. 그런 거 저런 거 없으면 손님을 맞이하고자 하는 내 뜻이 傳達이 안돼요.
그러니까 眞實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方便도 있어야 되고, 또 方便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眞實이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眞實이 없는 方便은 虛禮虛式이 돼 버려요. 虛禮虛式은 生命이 없는 造花와
같아서 香氣가 없거든요. 그래서 봄 없는 꽃이 없고 꽃 없는 봄이 없는 것처럼 봄은 오지 않았는데 꽃만
있으면 그건 香氣가 없고 봄은 왔는데 꽃이 하나도 없다면 봄을 느끼기가 힘들듭니다.
그래서 眞實과 方便이 서로간에 이렇게 重要 합니다.
그래서 法華經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말씀 하시기를 一切衆生을 다 깨닫게 하는 게 내가 世上에 나온
뜻이다. 이게 眞實 이예요.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중생이 千差萬別이니까 어른은 어른에게 맞는 방법이
있고, 아이는 아이에게 맞는 방법이 있듯이 그 중생에 맞는 方便이 필요하다 라는 거죠. 그래서 여러 가지
설법을 통해서 중생교화 한 것이 그게 方便門을 연겁니다. 그러나 本來 眞實한 目的은 一切衆生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럼 깨달음은 뭔가? 그건 아주 간단한 건데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석가모니부처님 당시에 그 어떤
젊은 여인이 그냥 한 순간에 남편은 산에 올라가서 뱀에 물려 죽었고, 작은 아이는 자신이 머리에 이고
물 건너갈 때 독수리가 와서 채가서 죽었고, 그 보다 큰아이는 독수리가 아이를 채가니까 채가면 안 된다
고 손짓을 했는데 강가에 있던 큰 아이가 자기보고 물로 들어오라는 줄 알고 물로 들어와서 빠져 죽었어요.
그냥 한 순간에 남편 죽었고, 작은아들 죽었고 큰아들 죽었고 다 죽었었단 말 이예요. 기가 막힐게 아닙니
까 이게..
그래 석가모니부처님을 찾아 갔어요. 세상이 어찌 이럴 수 있냐고... 그래 거기다 뭐라고 하겠어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뭐다 라고 하는 거를 어떻게 그걸 알게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 거기서 쓴[用] 것이
저 마을에 가서 사람이 하나도 죽지 않은 집안에 가서 겨자씨 7개를 求해와라 이랬어요. 이게 方便입니다.
그래 가보니 사람 안 죽은 집은 물론 한 집도 없지요. 할아버지 죽고, 부모 죽고, 누구 죽고, 안 죽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 나중에 이 여자분이 깨달은 거예요.
어떻게 깨달았느냐, 태어나고 늙어서 병이 들어 죽는 生老病死가 그대로 生老病死가 아닌걸 깨달은 거예요.
생로병사라는 말도 있고, 不生不滅이라는 말도 있거든요. 生老病死 그대로가 不生不滅이라는 것을 안거예요.
또 보는 거예요. 나중에 이걸 活用하는 거예요. 그게 生死解脫입니다. 生老病死 떠나서 不生不滅하는 다른
세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고, 늙고, 병들고... 이 늙으니까 病이 많아요. 보통
일이 아니예요. 다리 아픈 병도 생기고...요샌 절도 잘 못하겠어요. 한참 걷다가 절하면 무릎이 얼마나 이게
소리도 나고 불편한지 민망스럽게 그래요. 젊었을 땐 이런 거 生覺도 못했거든요. 또 잊어버리는 것도 왜
자구 생기는지..요샌 60세면 청년이라는데 그것도 다 사람 따라 틀리거든요. 똑같아져 버리면 안 되는 거
예요, 方便 따라 다 틀리거든요.60에 새장가 가는 사람도 있지만은, 60되면 노인 되는 사람도 있거든요.
全部 다 다른 거예요.
그래 늙으면 病이 오게 마련이다. 老病, 그 다음엔 죽게 마련 이예요. 이게 그대로가 人間의 格式이고 人生
歷史입니다. 그런데 인생 역사인 生老病死 이걸 깨닫고서 보면 生老病死 그대로가 不生不滅이다. 이 말은
그러니까 죽는 거 그대로가 안 죽는 거다(生死不二). 이 사실 진실을 올바로 아는 게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그 女人네 보고 죽는 거 그대로가 죽지 않는거다 라고 말해봐요, 그 여인에게 이 말이 理解가 되
겠습니까. 그러니까 方便이 반듯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敎化 方便입니다.
그리고 이제 修道方便, 修行方便은 華嚴經에서 말씀을 하셨는데, 修行에 대표적인 것이 십지품(十地品)
입니다. 華嚴은 여러 品이 있고 거의 다 비슷한데, 수행절차, 수행과정을 아주 잘 설명한 대표적인 내용은
十地品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 十地品에 보면 修行 過程을 열 가지로 설명을 하셨는데, 이
게 全部 方便이거든요.
첫 번째 第 1地가 환희지(歡喜地), 기쁨인데 거긴 원(願)을 설명하고 있어요. 열 가지 願, 十願. 發心을
하다 보면 願이 나옵니다. 誓願, 發願...이 서원 발원이 없으면 수행이 안 됩니다.
두 번째 이구지(離垢地)는 戒를 말씀 하셨어요, 十善戒. 戒가 다른 게 아니라 十善이 戒입니다. 十惡懺悔
(십악참회)라 하지 않습니까. 그거 하나하나를 돌이키면 善이거든요. 그래서 十惡이니까 十善이 되는 거
죠. 이 十善이 뭐냐, 우리 身口意 三業 이예요. 行動과 말과 生覺, 이게 잘못 쓰면 十惡이 되고 잘 쓰면
十善이 되거든요.
세 번째 光明을 내 뿜는 발광지(發光地)라고 있는데, 여기서는 禪定을 말씀 하셨어요.
네 번째 염혜지(焰慧地)라고 있는데 이 焰慧地는 여러 가지 수행을 해나가는데 있는 37도품(三十七道品)
이라는 게 있습니다. 道品이라 함은 하나하나 닦아가는 節次고 項目이죠. 이것을 나눌 분(分)자, 분도(分
道)라 그래요.
그리고 다섯 번째가 난승지(難勝地)인데, ‘難勝’은 어려울 난(難), 이길 승(勝)잔데, 거기 가서 勝利하기가
어렵다, 勝利라는 것은 合格이란 말입니다 合格하기가 어렵다. 뭐냐 그 內容이? 네 번째 까지는 全部 自己
를 위한 眞實 修行입니다. 願을 세우고, 戒를 닦고, 禪定을 닦고, 道品을 닦고, 이 네 가지가 다 眞實行 이
예요. 그런데 이 다섯 번째 와서는 方便行이 始作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을 相對하는 내용 이예요. 그래서
世上 사람들을 相對해서 글을 아는 사람을 위해서 글을 배우고, 事業을 하는 사람을 위해서 事業을 하고,
政治를 하는 사람을 위해서 政治를 하고...이게 方便이란 말 이예요.
大乘菩薩修行에 이 方便行이 나와요. 소승불교하고 대승불교하고 差異点이 바로 이겁니다. 이 關門을 通過
해야 해요. 이 方便修行을 通過하지 못하면 이 대승불교 보살수행이 進前이 없어요.이게 그러니까 難勝地다,
아주 合格하기가 어렵고 成就하기가 어렵다 해서 이 部分을 眞實行에서 方便行을 이루는 게 어렵기 때문에
難勝이라 그러는 거예요. 참 어려운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世上에 일을 내가 다 해도 自己 眞實行이 흔들
리면 菩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眞實行이 아주 淸淨 하면서 世上을 다 受容하니까 淸淨하고 受容하고, 受
容하고 淸淨하고..이게 조금도 흠이 없고 不足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菩薩行이니까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예요.
예를 들면 혼자 조용하게 禪定을 닦는 거 보다 여러 사람들을 相對하면서 修行 하는 게 더 어려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難勝地라 그랬어요. 難勝地, 참 이게 중요한 法門입니다. 그래서 이 眞實과 方便을 갖추는
게 아주 重要하다 하는 법문을 합니다.
이 難勝地에 通過하면 현전지(現前地)가 나오는데 現前이라 함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말 이거든요. 이
중생의 모든 過程이 눈앞에 훤히 보여요. 因果가 훤히 보이고, 輪回가 훤히 보입니다. 그래서 現前地예요.
이 現前地에 올라가면 成佛 하는 거예요. 이걸 小成佛, 작은 성불이다 그래요. 왜 그러냐하면 거기 까지
올라가면 後退가 없습니다.
그럼 일곱 번째는 원행지(遠行地)인데, 그 때부터 菩薩行이 막 펼쳐져요.
그리고 第八地에 올라가면 부동지(不動地)인데 여기는 努力하지 않아도 저절로 돼요. 이걸 無功用이라,
공용은 노력이고 무공용은 노력함이 없는 거거든요. 한참 올라가서 어느 極한 水準을 넘어가면 이게 저
절로 되거든요. 그게 8번째不動地예요.
아홉 번째는 선혜지(善慧地), 계속 해서 善行이 나오는 거예요.
열 번째는 법운지(法雲地)인데, 그땐 온갖 功德을 저 하늘에서 비 내리듯이 그냥 내리는 거예요.
그래 이 중간, 딱 다섯 번째가 ‘難勝地’ 이니다. 自己 혼자 修行하는 데서 다른 사람을 受容하는 힘을
거기서 얻는다, 그 힘 못 얻으면 發展이 없어요. 그 참 重要하죠 아주.
三國遺史에 보면 新羅時代에 백월산(白月山)이라고 하는 山이 있었는데, 그 백월산에 들어가서 道를 닦은
분이 두 분이 계십니다. 新羅 末로 한분은 부득 스님이고 한분은 박박 스님입니다. 노힐부득 달달박박 이
러거든요. 이 분들이 大 發心을 했어요. 그 발심이 어디서 되느냐 하면 人生無常을 느끼는 데서 발심이
되거든요. 발심은 道 닦는 마음인데, 이 도 닦는 마음이 왜 생기느냐,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히 느낄 때
道 닦을 마음이 생겨요.
아까 석가모니부처님 찾아온 여인이 하루아침에 남편 죽고, 작은아들 죽고, 큰 아들 죽고 다 죽으니까
인생의 無常함을 거기서 느낄 수밖에 없죠. 자기도 언제 뱀에 물릴지, 독수리에 물릴지, 물에 빠질지
전혀 모르는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世上은 믿을 수가 없고, 生命도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 두 스님도 人生無常을 철저히 느끼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우리 人生인데 道를 한번
잘 닦어보자, 이렇게 두 분이 約束을 철석 같이 하고 그대가 먼저 성불하면 나를 제도해주고, 내가 먼저
성불하면 그대를 제도해주고...이런 관계를 함께 道 닦는 사람, 道伴이라 그럽니다.
이 함께 도 닦는 사람이 그렇게 중요 합니다.
그래서 白月山에 들어가서 道를 닦는데, 박박 스님은 阿彌陀佛를 열심히 부르고, 부득 스님은 미륵존불을
열심히 불렀어요. 이렇게 3년이 다 됐어요. 이 3년 동안에 道가 익어졌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이제 觀世音
菩薩님이 오셔서 이 道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그런데 觀世音菩薩님이 아주 젊고 예쁜 처녀의 모습
으로 이 두 스님에게 찾아왔어요. 그것도 낮에 온 게 아니라 첩첩산중 캄캄한 밤에 아주 아름답고 예쁘고
몸에서는 향기를 풍기고, 그런 몸을 해가지고 제일 먼저 박박 스님을 찾아 온 거예요.
“내가 길을 잃어서 갈 곳을 모르고 온 천지가 캄캄해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겠으니 오늘 하룻저녁만
재워달라”고..그러니까 박박 스님이 “여기는 여인들이 머물 곳이 아닙니다.”하고 문을 탁 닫고 들어가
버렸어요.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이 이제 부득 스님한테 찾아 간 거예요. 그러니까 “아 이 밤중에 어디서 이렇게 오셨
느냐” 하니까 “내 온 곳은 묻지 말고 하룻저녁 재워나 달라” 부득 스님이 그래 가만히 生覺을 해봤어요.
‘이 첩첩 산중에 남자 혼자 있는데 한밤중에 여인이 찾아 왔으니 여인이 머물 곳은 아니다, 헌데 이 밤중에
이 여인을 쫒아 내는 것도 이게 할 짓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고민이 되는 거죠. 그거는 박박 스님처럼
일도에 탁 선택을 하면 간단한 거예요. 근데 쫒아 내면 나는 便한데 이 여자분은 어떻겠는가,
이게 問題거든요.
그래서 부득 스님이 인제 거기서 方便을 찾은 거죠. 淸淨修行도 方便이고 隨順衆生도 重要하다. 여기 청정
수행하고 수순중생이 있는데 隨順이라는 것은 ‘따른다’ 이 소리예요. 중생이 고통스러우면 중생을 따라서
苦痛을 좀 덜어주는 거, 이게 수순중생이거든요. 隨順衆生도 또한 修行이다. 이렇게 결정을 한 거죠.
그래서 그 여인더러 들어오시라 해서 일단 들어 와서 쉬게하고, 당신은 열심히 미륵존불 念佛 했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쯤 되니까 그 여인이 아이를 낳아야 된다고 짚을 깔아 달라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하겠어요,
잘 깔아 드렸죠. 그래 아이를 낳았어요. 또 목욕을 해야 된다고 목욕물 준비 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물통을 준비를 해서 물통 안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실 수 있도록 다 도와 드렸어요.
그런데 조금 있더니 스님도 같이 목욕 하자고..하두 권해서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처녀가 목욕하고
남은 물을 이렇게 보니까 물이 그냥 물이 아니고 香氣가 振動을 하고 完全히 금물이예요. 그걸 금액(金液)
이라 그래요. 그래 목욕을 하니까 목욕을 하는 대로 自己가 금부처가 되는 거예요. 온 몸을 씻으니까 온
몸이 금으로 되어서 그대로 미륵존불이 된 거예요. 그리고 옆에 보니까 蓮華臺(부처님이 앉는 좌대)가 생
긴 거예요. 그러면서 그 여인이 “나는 觀世音菩薩인데 스님이 道를 잘 이루게 하기 위해서 내가 도와주러
왔다” 그러고 보니까 一瞬間에 그 여인이 안 보이는 거예요. 금으로 목욕을 했으니 금부처가 돼서 연화대
에 앉으니 그대로 미륵불이 된 거예요.
한편으로 박박 스님은 날이 밝은 뒤에 ‘어제 그 여인이 틀림없이 부득 스님을 찾아 갔을 텐데 어지 됐을까,
계를 제대로 지켰을까, 무슨 일이 생겼을까..만약에 계를 못 지켰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으리라, 아주 혼을
내서 정신을 차리게 하리라.’ 이 맘을 먹고 왔습니다.
아 와보니까 천만 뜻밖에도 미륵존불이 돼 가지고 연화대에 앉아 있단 말예요. “아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
냐” 그러니까 얘기를 쫘악 하는 거예요. 그래 거기서 박박 스님은 참회를 하면서 “내가 業障이 많아서 觀
世音菩薩님이 오셨는데도 모시지를 못해가지고 성불을 못 했다. 그러니까 그대는 나 보다 성불을 먼저 했
으니 옛날에 그 약속을 저버리지 말고 나를 성불하게 제도 해 달라” 그러니까
“나는 다른 方法이 없고 내가 목욕하다 남은 저 금물이 있으니 목욕을 해보라” 해서 목욕을 했죠. 금물을
발라서 목욕을 하니까 역시 부처가 됐어요. 부처가 되고 나니까 역시 또 연화대가 하나 생겨요. 그래서
나란히 양쪽에서 부처가 됐는데, 이게 소문이 나가지고 찾아온 마을 사람들이 ‘아 희유한 일이다’ 감탄을
하고 이 두 부처님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법문을 잘 해 주시고 몸 채, 연화대 채 날아서 극락세계로 가셨
어요.
이것을 임금님께 알려서 거기다 큰 절을 짓고 한 곳에는 ‘現身成道 미륵지존’ 이다 해서 거기다 法堂을
짓고 미륵존불을 모시고, 한 곳에는 ‘現身成道 無量壽殿’ 이라는 강당을 짓고 거기다 아미타불을 모셨는
데, 이게 문제가 생겼어요.
彌勒佛은 온 몸이 금불이 돼 가지고 깨끗하고 환하고 빛이 나는데 이 아미타불은 금을 아무리 칠해도
얼룩 덜룩하니 자꾸 반점이 생겨요. 왜 그러냐 하면 먼저 목욕 할 때 부득 스님이 먼저 목욕을 다 하고
나서 하다 보니까 금물이 조금 모자란 거라. 그래서 얼룩덜룩한 점이 생긴 거예요.
도대체 이게 뭐냐? 박박 스님은 청정수행에 조금도 흠이 없는 일등 수행인데.그런데 거기서 뭐가 모자랐
는가. 方便이 모자란 거예요. 부득 스님은 청정수행을 서릿발 같이 유리알 같이 잘 지키면서도 여인이 길
을 잃었다 라고 하면 案內를 했고, 아이 낳는다 그러면 아이 날 準備 해드리고, 목욕 한다 그러면 목욕할
준비 해드리고 다 했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이 淸淨修行하고 慈悲方便이 圓滿하게 이루어져 가지고 完全한 부처님이 됐는데, 이 박박 스님
은 청정수행은 잘 닦았지만 길 잃고 힘들어 하는 여인네를 내쫒았다, 慈悲功德 慈悲方便은 없었다 이거죠.
그러니까 부처가 되기는 됐는데 좀 모자람이 있어. 그래 그 아미타불은 아무리 금칠을 해도 얼룩덜룩한 반
점이 계속 생기드라. 이게 아주 대단히 重要한 법문이거든요.
이 日常 世間事에도 自己 혼자만 잘한다고 잘하는 게 아니예요. 남도 도와줘가면서 잘해야 되는 거예요.
이게 똑 같은 겁니다. 나 혼자만 성공해서 돈 많이 벌고 出世한다고 絶對 幸福한 게 아니구요, 어떤 사람
은 自己 하나 만을 위해서 온갖 사람을 다 苦生시키고 그러는데..그게 그런 게 아니예요.
그래서 그거는 초학자, 초심자는 다 그렇지만 이게 올라 갈수록 ‘難勝地’ 고비를 넘어가야 된다. 다른 사람
도 도와주면서 나의 할 일을 하는거, 나에 할 일과 다른 사람 돕는 일이 다 같이 이루어지는 게 이게 가장
높은 거다 이말 입니다. 이것이 하나만 하다보면 나중에 이루긴 이루더라도 모자란다, 그래서 얼룩덜룩한
부처님 된다 이거예요. 이게 얼마나 重要한 법문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내 맘만 깨끗하면 됐지 形式이 뭐가 必要하냐’, 그게 그런 게 아니예요. 格式 속에
眞實이 있고 眞實이 格式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부득 스님이 여인네를 맞아들이긴 맞아 들였는데
청정심이 흔들렸으면 어찌 됐을까. 그건 박박 스님만도 못하거든요, 다시 중생계로 떨어지니까..
佛心이 깨끗하면 아무리 여인의 벗은 몸을 본다든지 아이 낳는 걸 도와드린 다든지 내 佛心이 전혀 흔들
림이 없다. 그래서 무엇을 보느냐가 重要한 게 아니라 그 보는 마음이 흔들리느냐 안 흔들리느냐 이게 重
要 한거예요. 그래서 道가 아주 높아지면 죽을 때도 안 흔들리고, 來世에 다시 태어날 때도 안 흔들리고,
이게 道입니다. 내가 도가 높아지면 누가 辱을 해도 안 흔들린다,그래서 욕하는 소리를 듣느냐 안 듣느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거기에 말려드느냐 안 말려드느냐, 이게 중요 한거예요.
사람이 살다보면 無限히 많은 現實이 있는데 그 現實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 이게 重要 한거예요.
이게 眞實과 方便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생들이 다 태어나서 불교를 만났으니까 신심, 어쨌든지 부처님 법을 믿어야 되거든요.
그럼 부처님 法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가 因果法예요 因果. 내가 하는 대로 받는다. 그래 福 지면 반드시
福 받거든요. 그러니까 이 因果를 믿고 첫째는 福을 지어야 돼요. 罪 짓지 말고 福 지어야 된다 이거죠.
둘째는 解脫이예요. 허망한 상상 속 일인 이 生死輪回에서 벗어나는 거. 因果와 解脫, 이거 두 가지만 믿
으면 信心이 깊은 거예요. 解脫은 뭐냐? 이 生老病死 죽는 그대로가 그게 解脫 열반이란 말이죠(生死涅
槃常共和). 이건 道를 닦아야 알지 그냥은 모르는 거예요. 말만 들어가지고는 도저히 모르는 거예요. 그
래서 죽는 속에서 죽지 않는 것을 바로 보는 게 解脫이다 이말이죠. 그걸 涅槃이라고 해요. 부처님은 돌아
가셨지만, 돌아가심이 없는 걸 바로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첫째는 福 닦고, 둘째는 道 닦고, 이게 修福 修道입니다. 道를 닦으면 生死에서 解脫하고, 福을 닦
으면 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좋은 곳에 태어나고 살아생전에 고통이 없어지고..그게 신심이고 닦는 거거
든요. 그래서 믿고 닦아야 돼요. 그게 佛子거든요. 그렇게 믿고 닦는 데에는 眞實과 方便이 있다라는 말
씀입니다.
아이고 이거 만날 하는 소리 같은데 오늘은 노래를 한자리 할까 싶어요 노래. 법상에서 뭔 노래를 하는가
한번 잘 들어 보세요. 제목이 멍텅구리 노래예요. 곡조도 이상하고 가사가 특이하고 그래요.
「올 때는 빈손에 왔으면서 갈 때에 무엇을 가져갈가 공연한 貪慾을 부리누나 그것도 저것도 멍텅구리
멍텅구리」 이거 順序가 바뀌었어. 이게 두 번짼데...나이가 드니까 옛날에 많이 하던 것도 가사를 잊어
버려..(^^)
「멍텅구리 멍텅구리 모두 모두가 멍텅구리
온 곳을 모르는 그 人間이 갈 곳을 어떻게 안단말인가
온 곳도 갈 곳도 모르누나 그것도 저것도 멍텅구리 멍텅구리
올 때는 빈손에 왔으면서 갈 때에 무엇을 가져갈가
공연한 貪慾을 부리누나 그것도 저것도 멍텅구리 멍텅구리
백년도 못사는 그 인생이 천만년 죽지를 않을처럼
끝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그것도 저것도 멍텅구리 멍텅구리
세상에 학자라 하는 이들 동서에 모든 걸 안다하되
自己가 自己를 모르누나 그것도 저것도 멍텅구리 멍텅구리
멍텅구리 멍텅구리 모두 모두가 멍텅구리 멍텅구리」
이게 노래요 법문요? 한번 말해봐요. (^^) 젊을 땐 저 통도사에서 많이 불렀는데요, 이게 다 人生無常
느끼고 發心해서 福 짓고 道 닦으란 內容이거든요. 어디서 왔는지 몰라요 우리 人生이..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올 때도 빈손으로 왔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가는데 웬 貪慾이 그렇게 생겨가지고 꼼작 못하게
罪를 짓게 만들어요.
그리고 學者라는 게 定해진 게 아니고 모두가 배우지요, 다 학자지요. 그런데 동양이다 서양이다 너다
나다 물건이다 사람이다 이렇게 分別해서 이름하고 모양만 배우지 배우고 보는 自己 自身을 모르는 거
예요. 내가 무엇인지 이건 깨달아야 알거든요.
實際로 보면 人生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人生인데 웬 걱정을 몇 萬年 걱정을 해요.
百年도 못살 그 人生이 千萬年 걱정을 한다. 그러니 멍텅구리가 아니고 뭐냐...
그러니까 그런 멍텅구리 되지 말고 因果 믿고 福 짓고 道 닦아서 生死解脫 하자 이런 법문입니다.
-결가부좌 생활(명상) 참선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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