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전변(識轉變), 즉 의식이 나와 세상을 만든다
초기불교에서는 내가 세상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이 생기는 과정을 십팔계로 이야기한다.
눈귀코혀몸뜻 6근이 색성향미촉법 6경을 만날 때 6識이라는 인식(認識)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눈을 통해서 어떤 대상을 볼 때 보고 인식해서 아는 마음, 즉 안식(眼識)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6근도 6경도 모두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며, 6근 6경의 접척으로 인해
연기(緣起)되어 나타나는 6식 또한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한다. 즉 우리들 인간의
생각으로 볼 때는 여기 내가 있고 나 바깥에는 실체적이고 독립적인 세상이 있어서 내가 바깥에 있는
세상 만물을 인식해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나도 空하고, 나 바깥에 있는 세상도 空하고, 내가 바깥 세상을 인식해서 아는 행위 또한 空해서
나, 바깥 세상, 인식해서 아는 행위 이 셋은 연기적(緣起的)인 허망한 현상일 뿐,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가 바깥에 있는 대상을 본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내 안에 이 세상을 보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 보이는 대상도 별도로 나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깥 대상을 볼 때 인간의 腦는 과거에 경험한 정보, 즉 선험적인 기억들을 재빨리 검색한 뒤에 과거에
그 대상과 비슷했던 기억들을 떠올려 그 기억과 지금 보는 대상을 비교 대조해서 눈앞의 대상을 과거의
경험정보 기억으로 대충 묶어서 규정지어 보는 것이다. 즉 바깥의 대상 그 자체를 온전히 봐서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던 기억의 조각들과 업의 그림자라는 망(網)에 필터링해서 머릿속으로 대충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내 마음 안에서 바깥 대상을 인연으로 해서 또 다른 기억의 찌꺼기를
꺼내어 보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인간은 눈귀코혀몸뜻(眼耳鼻舌身)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대상들을 끊임
없이 만나고는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빛깔, 소리, 향기, 맛, 감촉, 法(생각의 대상)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진부한 기억들을 재조합해서 재상영하는 환영을 만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나 바깥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같은 현상을 유식(唯識論)에서는 유식이라는 말 그대로 ‘오직 識뿐’이라고 표현한다. 정신적 물리적
현상인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오직 識뿐이지 별도로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나(자아)와 고정
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세계와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인식이 서로서로 분리 분별
되어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하나라는 말이다.
정심적 물질적 이 세상 모든 것은 識이 전변(轉變)하여 허망하게 조작되어진 꿈, 물거품, 허깨비,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으로 識이 주관과 객관과 인식으로 전변하는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識이 전변한 것 중에 인식하는 주관 즉 보는 부분을 견분(見分)이라고 하고, 보여지는 인식의 대상
을 상분(相分)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해 내가 저 바깥의 꽃 한 송이를 볼 때, 꽃을 보는 나는 견분이고 보
여지는 대상 꽃 한송이는 상분이다. 이 두 가지가 따로 따로 분리되어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인식작용일 뿐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기적으로 상호의존적으로 성립되는 것이지, 별도로 내가 독립적으로 존재
하거나, 꽃이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인식작용은 견분과 상분, 즉 주관과 객관은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하게 되는데, 이를 ‘관계를 맺는다’ 혹은 ‘인연을 맺는다’는 의미에서 ‘緣’이
라고 한다. 주관의 보는 부분인 견분은 ‘능히 연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능연(能緣)이 되고, 보이는 대상
은 연해지는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소연(所緣)’이라 한 다.
또한 인식(認識)이라고 할 때 이 ‘識’이란 분별(分別)한다, 헤아린다라는 의미로 능연의 식이 소연의 경계를
분별하고 헤아려 알기 때문에 ‘량(量)’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즉 인식 주관을 능량, 인식 대상을 소량이
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유식에서 말하는 식전변설(識轉變說)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평소 안에 있는 ‘나’와 밖에 있는 ‘대상’을 독립적이고 실체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유식론
에서는 그 안팎의 주관과 객관 모두가 식이 전변한 주관과 객관으로서 주관 객관은 허망한 것이라고 한다.
인식하는 주관인 견분도 능연식으로 식이 전변한 것이고, 인식 대상, 식의 대상 즉 소연경 또한 식이 전변
한 것 즉 식소변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유식에서는 언뜻 보기에는 ‘식’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듯 보이지만,
초기불교의 無我와 대승(大乘)과 중관의 空사상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들은 나도 없고 내가 마주하는 외부 대상도 없는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고, 좋다 싫다 분별하는 대상이 있다고 여기는 데서부터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만나고 접촉하는 모든 대상과 사람들은 사실 그만의 독자성을 지닌 누군가이거나 무언가가 아니라,
사실은 내 마음 안에서 그렇게 인식된 연기적인 존재(현상),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닐 뿐이다.
그러니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집착할 것이라고는 없다. 허망한 분별심이 헤아려 능량과 소
량이라고 분별할 뿐, 분별할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법상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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