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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것이 마음이다

장백산-1 2017. 7. 15. 12:37

마조어록의 핵심 가르침 | 선어록과 마음공부


이 세상 모든 것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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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양(懷讓)은 도일(道一)의 그릇을 보시고는 물었다. “대덕은 좌선(坐禪)하여 무엇을 하려 하시오?”

도일이 말했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회양은 벽돌을 하나 가져와 그의 옆에서 갈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도일이 물었다.

“벽돌을 갈아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하오.”


“벽돌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다고 그대가 어찌 부처가 되겠습니까?”


이에 도일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가 끄는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할까요? 아니면 소를 때려야 할까요?”


도일이 대답이 없자, 회양이 말했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좌불(坐佛)을 배우려고 하십니까? 만약 좌선을 배우려고 한다면, 禪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닙니다.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佛)는 정해진 어떤 모습이 아닙니다. 머묾이 없는 法에서는 취함과 버림의 분별이 없어야 합니다. 그대가 좌불을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곧 佛(부처)를 죽이는 일입니다. 만약 앉은 부처의 모습(坐佛)에 집착한다면, 정해진 모습이 아닌 佛(부처)의 이치에 통하지 못할 것입니다.”

  

道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만 말라. 分別心으로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이 더럽히는 것이다.


道를 알려고 하는가? 平常心이 道다. 평상심은 분별 망상으로 조작하거나 추구하지 않고, 옭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분별해서 취하고 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한 단멸하거나 항상 하는 것도 아니고, 범부와 성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전에서는 이를 두고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것이 바로 보살의 행이다’라고 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마음 뿐이다. 정신적인 현상 물질적인 현상 온갖 것이 전부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니 마음이 만물의 근본이다. 만물의 근본, 진리를 떠나서는 설 곳이 없다. 지금 여기 서 있는 곳이 바로 진리, 만물의 근본자리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본바탕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불법(佛法)이고 해탈(解脫)이다.

 

그대들 각자의 마음이 부처(佛)임을 믿으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佛), 만물의 근본자리다.

 

罪의 自性이 空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느 순간에도 죄는 없으니, 자성이란 본래 없기 때문이다. 三界(欲界 色界 無色界, 이 세상)는 오직 마음일 뿐이며, 우주삼라만상은 이 마음의 흔적, 그림자, 환영일 뿐이다.

 

善에 머물고 惡을 제거하며, 空을 관하고 禪定에 들어가는 것도 모두 분별 망상으로 조작하는 것일 뿐이다. 밖으로 치달려 구한다면 더욱 멀어질 뿐이다.


[마조어록]

 

✔ 도불용수 단막오염(道不用修 但莫汚染), ‘道는 애써 닦을 일이 없으니 단지 더럽히지만 말라’는 말은 초기 조사선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구절을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는 좌선(坐禪)을 열심히 수행하고 앉아 있는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에게 벽돌을 가는 비유와 소가 끄는 수레의 비유를 통해 말하고 있다.


소가 끄는 수레가 가지 않으면 소를 때려야 수레가 굴러가지 수레를 때려서는 굴러가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을 닦고자 하는 이가 앉아 있는 몸의 모양을 통해 마음을 깨닫고자 한다면 그것은 수레를 때리는 것과 같다.


이 공부는 마음공부지 몸공부가 아니다. 마음공부는 애써 좌선만을 고집할 것도 없고, 염불 진언 특정한 수행 방법만을 고집할 이유도 없다. 마음으로 하는 마음공부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수행 방법이나, 앉는 방식 같은 그런 수단과 방법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다.


부처(佛)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기에 어떤 특정한 모습을 오래 취한다고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참된 이치를 모르고 오로지 앉아서 좌선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부처를 죽이는 일이다.


마조 도일은 회양의 가르침 덕분에 깨달음, 부처을 얻고, 10년 동안 회양선사를 모시면서 그의 깨달음은 더욱 깊어 갔다.


이후 마조는 道는 애써 닦을 일이 필요 없으니 다만 더럽히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더럽힌다는 말은 곧 망상 분별심으로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분별 망상에 의한 조작과 추구가 끝나지 않는 이상 깨달음, 부처는 오지 않는다. 분별 망상에 의한 그 모든 추구와 조작이 완전히 쉬어질 때 문득 그것, 道, 깨달음, 부처(佛)은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道는 거창하고 위대하고 신비로운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平常心이 그대로가 道, 깨달음, 부처다. 분별 망상으로 조작하지 않는 지금 여기 이대로의 마음, 옳고 그름을 따지고 분별하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無分別心의 상태, 취하고 버림이라는 분별이 없는 할 일 없는 무위의 상태다. 그 자리는 항상 하지도 끊어져 없어지는 자리도 아니고, 범부와 성인이 따로 나뉘지도 않는 무분별의 참된 不二法의 자리다. 범부와 성인이 분별 차별되어 따로따로 있다면 그것은 참된 보살이 아니다.


이것과 저것 중 어느 하나 속에 마음, 本性, 부처(佛),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모든 것이 똑같은 하나의 마음, 하나의 부처, 하나의 도, 하나의 깨달음이다. 마음이 곧 만물의 근원, 본바탕 자리이다. 진리가 아닌 곳은 어디에도 없다. 진리를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진리가 아닌 곳에는 단 한 순간도 발을 내디딜 수조차 없다.


지금 이 순간 서 있는 바로 여기 이 자리가 곧 진리, 부처, 도, 깨달음, 나의 본바탕이다. 정신 물질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똑같이 不二法으로써 둘이 아닌 佛法이고 해탈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는 어느 것 하나 분리 분별되어 소외되고 차별 차등되는 것이 없다. 일체법,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한 덩어리, 불법이다.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