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받아들임, 받아들이지 않음, 내려놓음, 깨어있음

장백산-1 2018. 12. 13. 13:57

받아들임, 받아들이지 않음, 내려놓음, 깨어있음 / 릴라님


법(法), 진리(眞理)는 여러 개가 없고 오직 하나 입니다. 진리는 무시무종으로 영원히 늘 하나이고 하나라는 말조차 붙을 수 없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의 실재(實在)입니다. 진리, 법은 말로 결코 표현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진리, 법을 가리키는 방편인 가르침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 미묘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법(진리)를 수많은 말이나 글인 방편으로 표현하여 깨닫게 하지만, 사람들이 자각해야 할 것은 진리를 가리키는 방편인 말의 내용이나 말의 뜻이 아닙니다. 진리(법)은 말의 어떤 뜻도 아니고 내용도 아니면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서 변함없이 한결같은 것입니다. 말은 변하고 말의 내용도 달라지지만 법(진리) 이 하나의 사실만이 영원히 언제나 한결같고, 진실합니다.


깨달음의 체험이란 이 사실 하나가 모든 말이나 글과 행동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눈을 뜨더라도 눈을 뜨기 이전의 습관이 자꾸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모양 있는 것들이 진짜라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습관은 깨달음의 체험이 있더라도 오래동안 남아있슴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상세계(現象世界)라는 분별세상(分別世上)이 하나라는 사실에 당장 분명해지는 것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미세해서 잘 알지 못하는 분별의식이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잠재해 있습니다.


법(진리)를 체험한 이후의 공부는 분별세계, 가상세계(假想世界, virtual rality)에 사로잡히는 고질적인 습관성에서 벗어나는 일이자, 자기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미세한 분별의식에서 깨어나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실체가 없는 허망한 분별 망상 번뇌에 습관적으로 사로잡히지 말고, 미세한 분별의식에서도 깨어나게 하는 여러 방편의 말들이 제시됩니다.


그 대표적인 방편의 말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마라', '내려놓아라', '깨어있어라'라는 말입니다. 말 뜻만 놓고 보면 너무도 다른 접근의 말 같습니다. 있는 받아들임과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음은 정반대의 의미라 헷갈립니다. 또, 내려놓음은 어떤 의미이고, 깨어있음은 어떤 뜻인지 모호합니다. 너무도 다른 의미의 말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법(진리)라는 사실에 통하고 의심이 사라지게 하는데 목적을 둔 말들니다. 그런데 말들의 의미가 너무 다르다 보니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종잡을 수 없어 머리가 아픕니다. 


'받아들임'이라는 방편의 말은 어떤 대상(경계)를 거부할 때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상을 좋은 것 싫은 것으로 분별해 나눠놓고 좋은 것은 받아들여 집착하지만 싫은 것은 거부하고 회피하려고 합니다. 아마 마음공부에 입문하여 얼마 되지 않는 초심자들이 취사선택하는 이런 장애를 많이 겪을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좋은 것, 긍정적인 것은 탐닉하고, 싫어하는 것, 부정적인 인연은 거부하고 회피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하나의 일이라는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좋고 긍정적인 경계(대상)을 크게 탐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싫어하는 대상(경계, 인연) 특히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는 상황이 빚어질 때는 사람들은 싫어하고 부정적인 그 경계(대상, 인연)에 큰 거부감과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나면 자기도 모르게 이 인연(대상, 경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멀리 회피하려 합니다. 이때 받아들임의 처방이 필요합니다. 받아들인다고 해서 싫어하는 그 부정적인 경계(인연, 대상)을 끌고 와 극단까지 가져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대상을 싫어해서 거부하고 멀리하려는 분별심(分別心)을 무너트리라는 말입니다. 만약 싫어하는 괴로운 경계(인연, 대상)에 집착하여 거기에 머물면서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공부라고 여긴다면(이것이 신을 만나는 길)이라고 착각하는 종교인들도 많습니다. 이는 방편인 말에 집착한 것이고, 방편인 말을 과잉 해석한 것입니다.


자신을 처벌하고 학대하는 것은 오히려 에고의 존재를 강화하는 에고의 변형된 속임 수 놀음입니다. 모든 것이 평등한 법의 성품, 하나의 일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는 길을 갈 때 자만심으로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학성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모두 양변에 치우친 것이자 자기 존재를 강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말이 되었든 가르침이 되었든 양극단적으로 적용하거나 집착할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 필요한 것이지 정해진 무엇은 없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임은 주로 서양 영성가들이 제시하는 방편의 말입니다. 그런데 동양적 전통, 특히 조사선에서는 '받아들이지 마라', '갈애를 끊어라', '취모검으로 갈등을 끊어내라' 등 대상(경계, 인연)을 제거하는 듯한 방편의 말을 제시합니다. 어떤 경계(인연, 대상)이 내게 오더라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받아들이지 말라는 방편의 말은 나와 경계(대상, 인연)과의 동일시, 사로잡힘을 염려해서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현상(경계, 대상, 인연)이 펼쳐지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현상(대상, 인연, 경계)를 실재하는 존재로 여겨 그것에 사로잡여 집착합니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면 하늘이라는 이름을 붙여 하늘의 존재를 인정하고, 땅을 보면 땅이라는 분별적 이름을 붙여 땅의 존재를 인정하는 매우 어리석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분별된 현상세계로 드러나는 온갖 것들에 사람, 사건, 사고, 시간, 공간 등의 이름을 붙여 그 이름, 개념(槪念)을 객관적인 실체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동일시에 빠집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방편이 그 모든 분별(인연, 경계)를 긍정하지도 말고 받아들이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좋아하는 일이나 집착하는 일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분별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편의 말입니다.


'내려놓음'도 분별되어 드러나는 현상세계의 각각의 현상(대상, 인연, 경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분별하고 망상하는 습관에 대한 방편의 말입니다. 특히 사람들마다 스스로가 현상에 의미를 두는 일, 현상에 크게 집착하는 일에 해당됩니다.


사람들은 세속적으로 자식에 대한 집착이라든가, 재물에 대한 집착이라든가, 성공에 대한 집착, 사랑에 대한 집착 등 무상하고 진실하지 않은 일들에 고질적으로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그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그것이 또 다른 원인이 되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문제들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이것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대상(경계, 인연, 현상)에 집착하는 마음은 많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음, 법, 진리에 대한 갈망과 집착심은 다른 세속적인 것보다 더 강하고 질깁니다.


선사들이 제시하는 대부분의 방편의 말은 이 법(진리, 깨달음)에 대한 집착심을 내려놓게 하는 것입니다.


'내려놓음'이라는 방편의 말의 대표적인 사례가 조주 선사와 엄양 존자 사이에 오고 간 문답입니다. 


엄양 존자가 조주 스님을 찾아와서 물었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의 답, "내려놓아라(放下着)."

엄양,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게 있습니까?" 조주, 그러면 "가지고 가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법이라는 물건이 없다', '한 물건도 없다'라는 방편의 가르침을 많이 듣습니다. 엄양 존자는 '한 물건도 없다' 라는 이 말을 사용해 깨달음이 무언지 묻습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이 '방하착'하라고 합니다. 방하착이라는 이 말은 지금 그 ' 한 물건도 없다', '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엄양 존자의 생각의 집착을 내려놓아라는 뜻입니다.


본성(本性, 모든 현상, 인연, 대상, 경계의 근본성품 본래 모양)은 모든 집착이 사라졌을 때 저절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엄양 존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에게는 한 물건도 없다'라는 그 물건이라는 말에 집착합니다. 조주 선사는 엄양 존자가 알아듣지 못하자 도로 '가지고 가라' 라고 합니다. 이 순간 엄양 존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 물건을 돌아보았다면 극적인 전환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깨어있음'이라는 방편의 말은 앞의 모든 방편의 말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깨어있음이라는 방편의 말은 '바로 지금 이 법뿐임'에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실제적 성품에 밝아 어떤 경계(현상, 대상, 인연)에 의지하거나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좋은 인연이 나타나도 그것에 머물지 않고, 싫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있는 사실이라고 여기지 않고,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망상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법이라는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 법은 이런 것이라는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않아서 이 홀로 밝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깨어있음을 잘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의지를 가지고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하는 것을 깨어있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내가 의지를 내어 무언가를 행하는 그 자체가 망상 경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깨어있음이 아니라 깨어있음의 유사 상태입니다. 진정한 깨어있음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도 사라져 이 하나가 홀로 의지함 없이 밝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체험되고 나서 실행할 수 있는 방편이 깨어있음 입니다. 이런 전환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깨어있음이 무엇인지 감각이 생깁니다. 


본성(법, 진리)이가 자각되면 저절로 깨어있게 되고, 저절로 밝게 됩니다. 그러기 이전에는 분별하는 것이 전부여서 분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법성(본성, 법, 진리)를 체험하고 나면 스스로 내적 전환이 이루어집니다본성 자리에서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일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알게되며, 분별 집착에 떨어지는 것이 불편한 일이 됩니다. 본성을 체험하고 나서도 습관적으로 분별 망상에 사로잡히는 일이 있지만, 불편함을 느껴 저절로 본래 상태로 환원됩니다.


어떤 경계(대상, 인연, 현상)에도 물들지 않는 본성자리가 자각되지 않은 상태에서 깨어있다는 것은 노력이 가미된 조작입니다. 깨어있으려는 주체가 의도적으로 생각을 끊거나, 내려놓거나,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허망한 분별의 주체가 의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어서 이 자체가 분별망상에 떨어진 일입니다. 진정한 깨어있음은 수행의 주체인 나도 없고 상대할 무엇도 없습니다. 깨어있음이 목표가 아니라, 현실이 됩니다. 평소 일이 없다가 망상 경계의 광풍이 불 때 면 흔들리다가 돌아오고마는 전환입니다. 


사람마다의 성향이나 마음공부의 깊이에 따라 여러 방편의 말들이 유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공부 시기에 따라 이런 방편의 말들은 필요를 달리할 것입니다.


마음공부 과정 중에 적용될 수 있는 여러 방편의 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방편의 말이 제각각 너무도 달라 혼란스러울 수 있는 것들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일이 있는 그대로 평등하다는 법성을 깨달아 이것과 하나가 되도록 안내하는 처방전들입니다. 이런 방편의 말들은 사람의 근기에 따라, 때에 따라 필요할 수 있고, 깨어남에 등불이 될 수도 있지만, 이런 방편의 말에 머물러 집착한다면 방편의 말은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방편도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방편의 말이 제시된 이유를 알아 방편의 말에 집착해서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가르침이라는 모든 방편의 말은 길을 떠나 궁극의 자신을 만나보게 하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편의 말은 때가 되면 숙명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시기와 인연에 따라 징검다리가 되어 완연한 하나의 삶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방편의 말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방편의 맡은 바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