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허공에 핀 꽃과 같다
깨달은 사람들의 삶이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든, 삶이란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감각을 느끼고, 사실들을 알고 또 거기에 따라 필요한 반응과 작용을 하는 일 그 자체이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의 안목에 따라 보고 듣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몇 가지로 분류해서 이야기한다. 첫째, 보통 사람들, 즉 범부의 안목은 눈에 보이는 현상(존재)들을 그대로 집착해서 현상이 있다고 본다. 둘째, 성문(聲聞)들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존하여, 보이고 들리는 모든 현상(존재)들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안다. 셋째, 연각(緣覺)들은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모든 현상(존재)는 인연(因緣) 따라 결합(結合)된 가유(假有 : 가짜로 있음)이기 때문에 모든 현상들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안다. 이 연각이 아는 공(空)을 교리적 용어로 필경공(畢竟空), 또는 분석공(分析空)이라 한다. 넷째, 보살들은 모든 현상(존재)가 존재 그 자체 그대로 공(空)이라는 사실, 즉 당체즉공(當體卽空)의 이치를 안다.
불교를 말할 떼 누구나 할 것 없이 공(空)의 철학(哲學)을 역설한다. 위에서 말한 4가지 공(空) 중에 어떤 공(空)을 설하든지 들은 대로 짐작하여 사량 분별로 공(空)을 설하면 성문의 설공(說空)이며, 필경공이나 분석공을 설하면 연각의 설공(說空)이며, 당체 그 자체 그대로가 공(空)임을 설하면 보살의 설공(說空)이다.
붓다나 조사들도 사람들의 근기에 맞춰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서의 공(空)을 설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깨달음의 극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일 때에는 앞에서 열거한 어떤 공(空)도 설하지 않는다. 부처의 삶은 공(空)만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이 세존의 살림살이며 세존의 삶이다. 오대산에서 무착 문희(無着文喜) 선사가 죽을 끓이고 있을 때 문수보살이 죽 끓이는 솥 위에 나타나자 주걱으로 문수보살을 후려친 것이 무착 선사의 살림살이며 삶이다. 임제(臨濟) 스님이 황벽(黃蘗) 스님에게 부처가 뭐냐고 물었는데 황벽 스님이 임제스님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팬 것은 황벽 선사의 삶이며 설법이다. 할(큰 소리)이나 방(몽둥이 질)이나 손가락을 세워 보이는 등등의 법(法, 부처, 진리, 깨달음)을 거량해 보이는 일이 곧 그들의 삶이며 설법이다. 이것이 선사의 법문이다.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의 설법과는 다르다.
보이고 들리는 것은 모두가 환영(幻影)이며, 이 세상은 실재(實在)하지 않는 허공(虛空)에 피어있는 꽃(허공꽃)과 같으니, 분별 망상 번뇌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 그 모든 것이 꿈속의 일과 같다고 하는 가르침은 보살의 안목으로 볼 때 이 세상 모든 현상(존재)가 지금 있는 그 자체 그대로 공(空)이라는 사실, 즉 당체즉공(當體卽空)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출처 :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④ [소를 때려야 수레가 가는가, 수레를 때려야 수레가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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