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과 '대상 경계'는 허망하여 서로 알지 못한다

장백산-1 2020. 3. 22. 21:05

그곳엔 붓다도 갈 수 없다. 3장-2


2. '마음'과 '대상 경계'는 허망하여 서로 알지 못한다         


그 동안 '나'의 사상이나 종교적인 믿음 등을 지탱해 주던 모든 고정관념은 말끔히 소멸되고, 아무런 지식이나 선입견도 없이, 다만 아무 분별심 없이 그저 담담히 성인의 말씀을 대할 수만 있다면, 머지 않아서 그와 같은 갭, 즉 '지적 불일치' 현상은 본래 실재(實在)했던 현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겁니다. 더구나 <모든 법이 다만 '마음'으로 지어진 것일 뿐(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사실이 밝혀지기에 이르면, 문자 그대로 <스승 앞에 제자가 없는 도리>가 현전하게 되는 겁니다. 적어도 이런 마음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천년 묵은 업장을 소멸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만 되면 의심이 아무리 골이 깊은 것일지라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모든 의심이 얼음 녹듯, 기와 부서지듯 되고 맙니다. 모든 의심은 다만 우리들의 착각(錯覺) 때문에 있게 된 거예요. 따라서 남은 일은 눈을 가리고 있는 가리개만 걷어치우면 되는 겁니다. 만약 우리들의 느낌과 성인들의 말씀 사이에 '다리'라도 놓으려고 한다면, 즉 적당한 방편의 설명으로 싸바르려고 한다면, 그 같은 유위행(有爲行)으로는 결코 그 '틈', '지적 불일치'현상은 해소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은 잘못된 길에 떨어져서 돌이킬 수 없는 구덩이에 빠지고 말 테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헤아리거나 짐작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오직 텅~트인 허공성(虛空性)뿐인데, '누가' 있어서 '무엇'을 보고, 헤아리고 할 수 있겠어요?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지만, 그러나 지금처럼 보고 듣고 하는 것을 하나도 허물지 않을 줄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우선 우리들은 이 까다로운 명제에 도전하는 출발점을 어디에 설정해야 하는지를 정해야 합니다. 만약 출발점이 잘못되는 날엔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최상승(最上乘)의 '마음뿐(유심, 唯心)의 도리'를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출발점을 설정하는 이 문제에서 전혀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에서 더 나아갈 데가 없고, '마음'을 알면 모든 법을 다 안다」고 했으니, 그래서 마음이 최상승 아니겠어요? 앞으로 여러분은 이와 같은 탐구의 과정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결코 '마음'을 등지고 밖으로만 내닫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모든 것을 다 '마음'으로 돌릴 수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화엄경(華嚴經)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저 '십현문'(十玄門)도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 '마음'으로 돌리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잘 이루어진다는 뜻)을 두어서 경의 끝마무리를 장식했던 거예요.


한 마디로 '본래마음(本心)'은 '허공(虛空)' 같습니다. 허공(虛空)같은 본래마음(本心)엔 티끌 하나 붙을 여지가 없지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니까요. <무엇에도 의지할 것이 없고, 어디에도 머무를 곳이 없는>, 즉 '무의주성'(無依住性)이 바로 그 '마음의 성품'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이 말로도 역시 '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허공(虛空)같은 본래마음(本心)을 아무리 정교하게 방편의 말로 설명한다고 해도 그 설명을 이끄는 우리의 '의식'이 본래 불완전한 것이고 보면, 그 '유한한 의식'을 가지고는 결코 '무한한 허공(虛空)같은 본래마음(本心)'을 완전히 껴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이 점에 특히 유의하면서, '허공 같은 마음'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쓰게되는 숱한 방편에 불과한 '말'들에 결코 구속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조심 하면서 마음공부를 해나아가야 합니다. '허공'에는 당연히 아무런 '방위'(方位)도 '경계'(境界)도 본래 없습니다. 이 말이 갖는 진짜 의미는「텅 트여서 '방위'도 '경계'도 없다」고 하는 것은 곧, '나'도 없고 너도 없고, '그것'도 이것도 없고, '여기'도 '저기'도 없고, '과거도 지금도 미래도' 없다는 뜻이니, 따라서 「텅 트여서 '방위'도엇고 '경계'도 없다」고 하는 방편의 말은 곧 당연히 일체의 의식작용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무지 기댈 데가 없는 거예요>. 옛날, 선사(禪師) 같으면 이런 말을 듣고 뭐라고 했을까요?


허공(虛空)같은 본래마음(本心), 「텅 트여서 '방위'도 '경계'도 없다」는 방편의 말은「도무지 기댈 데가 없다면 허공(虛空)같은 본래마음(本心), 「텅 트여서 '방위'도 '경계'도 없다」는 그런 소식을 어떻게 알았을꼬?」 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런 말도 역시 "아는 척!" 하는 소리임을 면할 길이 없으니 어찌 해야 합니까? 무엇을 어떻게 알더라도, 살풋이 '아는 바(所知)'가 있기만 하면 바로 '아는 바'(能知)가 있게 되어서, 이 '아는 자'와 '아는 바'가 서로 의지하게 되면서, 그 허공 같은 본래마음,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은 곧 숨어버리고 말 테니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곧장 「그래! 이 '마음' 가운데는 본래 '아는 자'도 '아는 바'도 없다」고 알아들을 테니, 어느 세월에 회심해서, 말 그대로 아는 자 아는 바, 즉 능·소(能所)가 다한 '마음'을 증험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제법 깊숙하게 헤쳐 보이면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런 말들 역시 '마음'의 한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지, 결코 어떤 말로도 '마음' 자체를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는 걸 거듭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인(古人)들도 한결같이 말하기를, 「결코 헤아리고 짐작하고 하지 말라. 아무리 묘한 생각이라도 생각 없는 것만 못하니라」 하고 경책해 마지않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조심조심 하면서 가자는 거예요.


아무튼 일체의 '사고'(思考)가 붙을 데가 없다면, 당연히 '이것'이니, '여기'니, '지금'이니 하는 따위의 모든 <주관적 용어들>은, ― 사실 이런 말들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서두요, 완전히 설 땅을 잃고 말지 않겠어요? 적어도 이 '가장자리가 없는 허공계'(무변허공계, 無邊虛空界)에서는 분별을 하는 그런 조관적인 말들이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게 움직일 수 없는 '진실'입니다.


「소도 둔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지금'이니 '여기'니 하는 말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건 어떤 경우일까요? 그건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본래 '하나'일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지금'이니 '여기'니 하는 숱한 차별개념으로, 마치 '허공'에 손가락으로 마구 획을 긋듯이 허공을 갈라놓고는, 이것을 다시 억지로 짜 맞춰 놓은, 그 '의식의 세계', '망상의 세계' 안에만 한정되는 허망한 분별개념입니다. 허망한 분별개념 속에서만 지금이니 여기니 하는 이런 분별하는 말들이 의미를 갖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분별개념은 모두가 잠꼬대인 셈입니다. 이것이 열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다음 단계의 놀라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라는 게 인간들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 마음 의식으로 꾸며서 지어낸, 가상의 세계, 가상현실(假想現實, Virtual reality)dl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여럿이 공유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게 아니라, 각각 저마다 제가 익힌 솜씨(業)대로 자신의 세상을 그려놓고는, 마치 제 꿈을 제가 꾸듯이, 제가 지은 '세계'를 제가 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어김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천백억의 화신(千百億化身)이 있으면 천백억의 국토가 있게 되는 거죠. 이 무수히 많은 세계가, 아무리 많아도 여럿이 아니고, 늘 '하나'이면서도 항상 여럿인, 이것이 곧 이 세계의 실상니다. 마치 방안에 수많은 촛불이 켜져 있어도 그 불빛들이 서로 방해하는 일이 없듯이, 그렇게 겹겹이 어울려 있는 게 바로 이 세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다라의 그물>로 표현되는 화엄(華嚴)의 세계예요. 여기서 화신(化身)이라 말한 것도, '국토'뿐 아니라 자·타(自他) 간에 그 국토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모든 생령들이 다 허망한 생각 마음 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서두에 이야기의 실마리가 됐던 저 밤하늘의 별들은 다 뭘까요? ·어느 것 하난들 우리의 '마음'을 벗어나서 따로 존재하는 게 있겠습니까? 아무리 받아들이기 거북해도, <만법이 다만 생각 마음 의식으로 꾸며낸 텅~빈 헛것일 뿐(萬法唯識)>이라는 이 말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각 마음 의식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석가모니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새벽 별을 보고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새벽 별을 본 적이 있을 텐데, 어째서 깨닫지 못했어요? 여러분이 본 별과 세존이 본 별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여기서 우리는 똑같은 별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 문제가 '새벽 별'에 있는 게 아니라, '새벽별'을 보고 있는 '마음'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본래마음'(本心)을 깨닫고 보니, 허공(虛空)과 같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본래마음'(本心)거기엔 본래 티끌 하나 붙을 게 없다는 걸 석가모니는 본 거지요.


그러나 수도 없이 많은 형상들이 비록 자체의 성품이 없는 실체가 없는 허망한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 것이긴 하나, 그 모두가 허공(虛空)과 같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본래마음'(本心)의 작용 아닌 게 없습니다. 이건 아주 단순한 이치예요.  '바다에서 출렁거리는 물결'이 그대로 본래 '바다'란 말입니다. '물결'이 비록 출렁이는 외양 때문에 '바다'와는 다른 물결이라는 이름을 얻고, 마치 바다와 따로의 존재인 양 여겨지긴 하지만, '물결'이 어찌 '바다가 아닙니까?


밤하늘의 별들도 마찬가지로 '허공(虛空)'이면서 동시에 '법계, 즉 허공계'(法界, 즉 虛空界)가 별들로 변해서 나타난 거예요. 그런데  '허공계'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허공은 안보이고 '별'만 보이는 거지요. 따라서 별은 또렷한 '별'이면서 동시에 '별'이 아니고, '별'이 아니면서 동시에 '별'인 거예요. '지구' 땅갈피에 달라붙어서 살아오는 동안에 형성된 인간의 '의식공간'에서 보면 또렷한 '별'인데, 동시에 그 모든 별이 의지하고 있는 '허공계'에서 별을 보면, <'별'이면서 동시에 '별'이 아닌 거예요. 별은 별이자 동시에 허공입니다. 이것이 '깨달음 자의 눈'(佛眼)으로 본 이 세상의 참모습입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깨달음 자의 밝은 눈'(佛眼)으로 이 세상을 살펴봅시다.·바로 지금 여기서 이렇게 여러분과 내가 마주 '보고 있는 게' 그대로 '마주 보고 았는 것이 아니고', '보지 않는 게'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건, '여러분'과 '나'는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나 '여러분'이나 모두 독립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이른바 '행위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오직 허공(虛空)과 같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본래마음'(本心) 인연에 감응해서, 중생들이 여기는 바를 따라서 나투는,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 현상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도무지 '밥'과 '반찬'의 인연이 아니면 아무 짓도 하지 못하는 허깨비인데, 허깨비가 어떻게 보고 듣고 합니까? 따라서 '보는 것'이 곧 '보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참 기막힌 이야기 아닙니까?


경에 이르기를 『'경계'는 '마음'의 변화이므로, '경계'는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음'은 '경계'를 의지하여 생겨남으로, '마음'은 '경계'를 알지 못한다. '경계' 밖의 '마음'이 '마음' 밖의 '경계'를 능히 취하는 일이 없나니, 따라서 '마음'과 '경계'는 허망하여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마음과 경계는 저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성품은 공(空)하여 자체의 성품이 없으므로, 마음과 경계는 서로가 의지하되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작용'이 없다. 즉 마음과 경계는 '자체의 성품'도 없고 '작용'도 없기 때문에 본래 서로가 알지 못한다.』고 했어요.


여러분, 여기서 잠깐 꿈속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 봅시다. 꿈에 나타난 '갑'과 '을'은 서로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는 헤어집니다. 그러나 둘의 만남은 분명히 만남이 아니고, 이들의 대화는 분명히 대화가 아닌, 한갓 꿈속의 영상이 아닙니까? 지금 이렇게 여러분과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알고 보면, 내 마음 속의 여러분에게 여러분 마음 속의 내가 설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의지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는 '법계 허공계'(法界 虛空界) 가운데서의, '꿈'과 같은 '현실'이고 '현실'과 같은 '꿈'입니다. '마음'이 미혹해서 '경계'를 좇으면서 움직이면 이 '가상현실'만이 드러나고, '마음'이 온갖 법의 실상을 깨달아서 회심하면 '법성'(法性)의 '고요함'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나 '법성'(法性; 법의 성품)과 '법상'(法相; 법의 모습)은 체(體)와 용(用)으로서 서로 여의는 게 아니므로, 따라서 '체'의 '고요함'과 '용'의 '움직임'은 본래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겁니다. 마치 '물결'과 '바닷물'이 본래 둘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이 현실세계를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여몽여환 如夢如幻)>고 말하는 것은 현실세계를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존재론적인 물질관에 얽매어 있는 범부의 치우친 집착을 떼어주기 위해서 하는 말인 겁니다.


따라서 일상의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다양한 작용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즉 '있음'과 '없음'으로 파악한다면 이것이 바로 '경계'에 빠졌다는 거예요. 결국 '상'(相)에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몽삼매'(如夢三昧), '여환삼매'(如幻三昧)를 말한 겁니다. 즉 "있기는 있는데 '빈 이름뿐인 있음'이고, ··· " 하는 등이 모두 이 '삼매'에 들었을 때의 안목인 겁니다. 그러나 '진여법성'(眞如法性), 허공(虛空)과 같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본래마음'(本心)은 분명 '현실'도 아니고, '꿈'도 아닙니다. '현실'과 '꿈'은 '하나의 법'입니다.


따라서 '성품'을 밝히는 마당에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임도, 회광반조(廻光返照)도 모두가 방편설(方便說; 방편으로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이 보입니다.


세존이 새벽 별을 보고 '마음'를 깨쳤다. 마음을 깨닫고 나니 '별'이 '별'이 아님을 알고, '사물'을 쫒지도 않거니와 '사물 아님'도 쫒지 않는다.


- 현정선원, 대우거사님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