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생각, 분별심을 주시(注視)하는 자(者)

장백산-1 2020. 3. 22. 18:50

생각, 분별심을 주시(注視)하는 자(者)


어떤 왕자가 불가의 계를 받고, 첫날 그는 붓다가 가보라고 한 집의 문 앞에서 음식을 구걸했다. 그는 음식을 받아서 먹고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 붓다에게 말했다. “용서하소서. 저는 그곳에 다시는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붓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승려가 말했다. “저는 몇 리를 가야 했고, 가던 도중에 제가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집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붓다를 따르는 비구니가 바로 제가 먹고싶었던 그 음식을 주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 일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음식을 먹으려고 자리에 앉았을 때 매일 집에서 몇 분 동안 편하게 쉬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쉬고 싶으냐고 누가 나에게 물어보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 비구니가 저에게 ‘벗이여, 당신이 음식을 먹고 잠시 쉬고 싶다면, 집을 깨끗이 치워놓았으니 잠시 쉬도록 하시오. 그대가 그리하면 저는 그대에게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비구니가 제 마음을 읽는 것 같아 저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우연의 일치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 방에 누워서 쉬려는 순간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 나는 내 침대도 없고, 내 보금자리도 없구나. 나는 오늘 다른 사람의 집에, 다른 사람의 방에 누워 있구나. 그러자 그 순간 그 비구니가 제 뒤에서 ‘오 스님, 그 침대는 당신 것도 제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워졌습니다!


저외 비구니의 이런 생각의 우연한 일치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비구니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생각을 읽었습니까? 내 안에서 생각의 파동이 이는 것을 당신이 감지한 것입니까?’


비구니가 대답했습니다. ‘꾸준히 명상을 하면, 내 생각, 분별심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저는 너무나 두려웠고 곧바로 붓가 계신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저를 용서하소서. 저는 내일 그곳에 다시 갈 수 없습니다.”


붓다가 물었다. “왜 다시 못 가겠다는 말인가?”


승려가 답했다. “왜냐하면, 제가 못가겠다는 이유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저를 용서해 주소서. 그곳을 다시 가라고 하지만 말아주소서.”


그러나 붓다는 승려에게 말해보라고 재촉했다. 승려가 대답했다.


“그 집에 이는 비구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욕정이 제 마음에서 일어났고, 그녀가 이런 제 생각을 읽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녀의 얼굴을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그녀의 집 앞에 다시 설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곳에 다시 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붓다가 말했다. “그대는 그곳에 다시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명상의 일부분이다.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이 그대는 그대의 생각을 주시할 수 있을 것이다.” 승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다음날 그곳에 다시 가야만 했다. 그러나 다음날 그 비구니 집에 간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날에 비구니 집에 갔을 때는 그는 반쯤 잠에 빠진 채로 길을 걸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흐르는지 주시하지 못했다. 다음 날 그는 깨어있는 상태로 갔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깨어있는 의식을 갖고 그 집에 도착했다. 그가 비구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계단을 오르기 전에 잠시 멈췄다. 그는 스스로 의식을 깨우고 자신의 내적인 의식에 집중했다. 붓다가 ‘그저 내면을 바라보고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 아무 생각도 보이지 않는다고 인식하라. 그대가 그대의 생각을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 생각도 흐르지 않는다고 인식하라.’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계단을 오르면서 자신의 내면을 주시했다. 그는 자신의 호흡만 주시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움직이는 것도 주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음식을 먹을 때 그는 매번 음식을 삼키고 씹는 것까지 인식했다. 내가 아닌 타인이 음식을 먹고 있고, 자신은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음식을 먹으면서 음식을 먹는 사람과 음식을 먹는 광경을 구경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인도에서는, 그같은 공경을 이미 알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은 ‘주시하는 자가 진정한 그대이고, 행위 하는 자는 진정한 그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주시(注視)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는 춤을 추며 붓다에게 돌아와서 붓다에게  말했다. “저는 정말로 놀랐습니다! 저는 뭔가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두 가지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는 제가 완전히 깨어있을 때 생각이 멈춘 것입니다. 제가 깨어있는 의식으로 내면을 주시(注視)하자 생각들이 멈추었습니다. 또 하나는 생각들이 멈추자 저는 행위자(行爲者)는 주시자(注視者)와는 다르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붓다가 말했다. “그것이 열쇠이다. 그리고 그 열쇠를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발견한 것이다.”


생각을 하는 자가 아니라 일어나는 생각을 주시(注視)하는 존재가 되어라. 이 점을 명심하라. 생각을 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 생각을 주시하는 존재, 주시자(注視者)가 되어라. 그래서 우리는 현자들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시자(注視者) 관조자(觀照者)라고도 부른다. 붓다 역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시자(注視者) 관조자(觀照者)이다 .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생각을 많이 한다. 주시자(注視者) 관조자(觀照者)는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 분별심을 주시(注視)한다. 주시자(注視者) 관조자(觀照者)는 생각을 주시하기에 생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는 생각을 바라보는 방식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주시(注視), 관조(觀照),관찰(觀察)하는 것이다. 가고 멈추고, 앉고 눕고, 잠자거나 깨어있을 때 그같은 행위가 마치 자신의 생각이 하는 것처럼, 어떤 생각과도 자신을 동일시(同一視)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통해 흐르는 모든 생각의 흐름을 주시(注視), 관조(觀照),관찰(觀察)하는 것이다. 자기 생각을 자신의 마음과 분리되어 흐르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부녈을 하는 생각들과 분리하도록 하라.


내면에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 생각만 하는 보통의 사람은 한 가지의 흐름만 갖고 있다. 명상가는 생각과 주시라는 두 가지의 흐름을 갖고 있다. 명상가는 내면에 생각과 주시라는 두 개의 평행한 흐름을 갖고 있다.


생각의 상태로부터 색각을 주시하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생각과 주시에 대해 나란히 명상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으로부터 주시로 옮겨가야 한다면, 생각과 주시를 동시에 명상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마음을 통해 흐르는 모든 생각의 흐름을 주시(注視), 관조(觀照),관찰(觀察)하는 것이다.


- 오쇼의 <명상이란 무엇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