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이 세상 모든 것이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5. ‘분별이 없는 분별’이 ‘원동력’(原動力)이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즉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의 성품이 ‘일성(一性)' 즉, 하나의 성품’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어떤 노선사(老禪師)의 다음과 같은 독백이 생각나는군요. 「이 세상 모든 것의 성품이 ‘한 성품(一性)’이라면 어떻게 이 세상 모든 것의 성품이 ‘한 성품(一性)’이라는 그런 사실을 알았을꼬?」만약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면 <m=n>이라는 수식도 한갓 재치 있는 연산기법 정도로 치부되어도 할 말이 없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의 성품이 끝내는 ‘하나의 성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서는 이 <m=n>이야말로 가히 인간예지(人間叡智)의 결정(結晶)이라고 할 만하지 않습니까? 결국 사람들이 이 ‘한 성품의 이치를 알았건 몰랐건, ‘진실’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성품은 본래부터 스스로 하나의 성품이었던 거예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과학과 ‘수학’이 인공위성을 달에 쏘아 올리는 일에서 능히 중추적 역할을 다할 수 있었겠어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 · ·
m=n ∴ m-n=0 · · · 이것은 만법의 ‘체(體)', 즉 이법계(理法界)를 수식으로 나타낸 겁니다. 이것이 이른바 ‘불가’에서 말하는 차전(遮詮 : 둘러 말하는 표현방식)의 수학적 표현이에요. ‘이체(理體)' 자체는 일정한 성품도 일정한 모습도 없으므로 이런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거예요. 즉 「이것이 만법의 ‘본체’다」라고 하는 말처럼 <m=n>도 하나의 ‘언어’라는 말입니다. 결코 이 m=n ∴ m-n=0 ‘기호’ 자체를 ‘본체(本體)’라고 말하는 게 아니니까, 결코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 · ·
m≠n 일 경우, m>n 이면 m-n 은 '+' 즉, 양(陽),
m≠n 일 경우, m<n 이면 m-n 은 '-' 즉, 음(陰) 으로 나타나는 이 말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작용’(作用), 즉 사법계(事法界), 즉 이 세상 모든 것의 현상을 나타낸 겁니다. <m≠n> 즉, m과 n이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즉 <m=n>은 불생불멸 불거불래인 여여(如如)한 ‘본체(本體)’를 나타내고, <m≠n>은 <m=n>이 홀연히 음과 양(陰陽)으로 갈라지면서 이 세상 이 현상세계가 나타나는 겁니다. 따라서 <m=n>뿐이면 마치 허공(虛空)이나 목석처럼 작용이 없을 것이고, <m≠n>뿐이면 이 세상 모든 것 이 현상세계에 휘말려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m=n>과 <m≠n>이 서로 막힘없이 잘 통해야 즉< m≦n 이면서 동시에 m≧n >이라야 비로소 활력(活力)을 얻게 되는 겁니다.
흔히 성문 연각의 근기들은 <선정에 들었다(入定)> 다시 <선정에서 나오고(出定)> 하는데 반해서 ‘진리의 세계’에 계합(契合)한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하루 종일, 항상 선정(禪定)에 들고, 동시에 항상 선정에서 나오는 겁니다. <선정에 들고 나는> 것이 자취가 없는 '이것'이 바로 ‘본분(本分)의 자리’, '본체(本體)’인 거예요. ‘고통 즐거움’(苦樂)이 모두 성품이 비어서 다른 느낌이 아니며, ‘번뇌’가 그대로 ‘도’(道, 깨달음)요, 지금 이렇게 ‘작용하고 움직이는 마음’ 그대로가 ‘고요한 마음’이니, ‘선정’에 들고 나오는 데 무슨 흔적이 있겠어요? 그러므로 모든 일생활이 늘 ‘선정’인 겁니다. 일상생활 자체가 늘 화발하면서 동시에 고요하고, 고요하면서 활발한 겁니다, 이것을 일러 성성적적(惺惺寂寂)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적멸(寂滅)한 경지만이 결코 ‘구경’<究竟 :궁극의 자리, 본체(本體)>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갖 법, 즉 m과 n은 ‘같음’ 중에 동시에 ‘다름’이고, ‘다름’ 중에 동시에 ‘같음’이어서, 이 ‘같음’과 ‘다름’이 항상 원융되어서 걸림이 없는 것이 바로 ‘법계’(法界)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즉 ‘본체’와 ‘작용’이 늘 하나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하여야, 즉 <m=n>과 <m≠n>, 이 둘이 항상 서로 엇바뀌면서 홀연히 한 가지로 어울려서 걸림이 없어야, 비로소 이 우주는 하나의 살아 있는 <무한한 원동력(無限原動力)>에 의해서 무시무종의 운행, 영원한 운행을 계속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작용 없는 근본지혜(無作根本智)>의 진실한 모습이며, 인위적인 노력이 없는 운행이기 때문에 ‘한량 없고 다함 없는 행’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곧 비밀한 우주법계의 진수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m≠n>인, 즉 우리가 사는 이 현상계에만 얽매여서 이 세상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가 하면, 또 지견이 좀 열린 사람들은 금방 <m=n>인, 즉 움직임 없는 본체(本體)만이 유일한 진실이라 여기면서, <m≠n>인 이 세상 이 현상세계를 멀리 여의고, 다시금 ‘본체(本體)’에 대한 집착심을 일으키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정위(正位)에 머무르는 것이야말로 구경의 깨달음인 양 오인하고 있으니, ‘법계 허공계’(法界 虛空界)에 무슨 ‘정위’(正位)와 ‘편위’(偏位)의 차별이 있겠습니까? 진정한 수행자라면 결코 ‘수승(殊勝)한 자리’를 탐내어 구하고, 머물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법의 평등’, 즉 <m=n>인 동시에 <m≠n>임을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오늘도 허망한 유위행을 쉬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느 세월에 성스러운 진실한 이치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성성적적(惺惺寂寂) 적적성성(寂寂惺惺)한 본체(本體) 거기는 ‘범부와 성인’(凡聖), ‘깨끗함과 물듦’(染淨)이라는 모든 분별 차별의 흔적이 없는 자리입니다.
모든 숫자에 ‘0’을 곱해서 몰록 ‘0’으로 사라져 버리는 순간의 통쾌함만을 즐겨해서 그 말쑥한 고요(寂寂)함에만 머무른다면, 그야말로 이 세상을 몽땅 허물고, 흔한 말로 자손을 영영 멸망시키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두려워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이에 이르러선 그 어떤 한 법도 불사(佛事)가 아닌 것이 없고, 그 어느 것도 ‘부처의 출흥(出興)’이 아닌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 늙은이도 없고, 이 자리에서 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도 모두 없고, 오직 이 세상 모든 것이 ‘진여법성’(眞如法性), 본체(本體가 인연에 감응해서 나타나눈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앞에서도 ‘부처’라는 이름에 달라붙은 그 토속적인 때, 고정관념을 씻어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지만, 이 ‘불사’(佛事)라는 말도 역시 앞으로는 순수히 ‘진리’에 즉(卽)한 ‘사업’(事業), 즉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참 이치’요, ‘참 이치’가 그대로 ‘이 세상 모든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크고 작은 일이 다 ‘참 이치’인 겁니다. 그런데 이 ‘참 이치’는 영겁(永劫) 전에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도,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전혀 움직이고 변하는 법이 없거든요. 그러면서도 움직이고 변하는 현상이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는 거예요. 거듭되는 말이지만, 이 <작용 없는 작용>이야말로 바로 다함 없는 ‘불사’의 정수(精髓)인 겁니다.
동산(洞山)이 스승 운암 선사(雲岩禪師)에게 물었습니다. 『화상께서 백년(百年, 涅槃)하신 뒤에 누군가 묻기를 「스님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겠는가?」 한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이에 운암이 침묵했다가 말하기를, 『그저 ‘이것’뿐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에 동산이 우두커니 생각에 잠기니, 운암이 말하기를, 『이 말을 이해하려면 모름지기 자세히 살펴야 되느니라.』 하였는데, 동산이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더니 나중에 동산이 냇물을 건너다가 냇물 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는 크게 깨달았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송했어요.
"절대로 딴 곳에서 찾지 말지니 다른 곳에서 찾으면 멀고 멀어서 ‘나’와는 멀어진다.
나는 지금 혼자서 가지만 곳곳에서 ‘그’를 만난다.
'그'가 바로 지금 여기의 나요, 비로소 여여(如如)에 계합하리라."
후에 동산이 운암의 초상화에 공양을 하는데 어떤 중이 묻기를, · · ·
『운암께서 말하기를, 「그저 ‘이것’뿐이니라」고 한 뜻이 무엇입니까?』 하니, 동산 선사가 말하기를, · · ·
『내가 그때, 자칫했으면 선사(先師)의 뜻을 잘못 이해할 뻔했었느니라.』
『그러면 운암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만약 알지 못했다면 어찌 그렇게 말할 줄 알았겠으며, 만약 알았다면 어찌 그렇게 말하는 것을 수긍했겠는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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