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한번은 법좌(法座)에 오른 남전선사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마대사(馬大師)께서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 하셨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불시심(不是心). 불시불(不是佛). 불시물(不是物)이라 말하노니, 이렇게 말하는 것에 잘못이 있느냐 없느냐." 그때 조주스님이 남전선사 앞으로 나오더니 절을한 뒤 물러가고, 이것으로 이 날의 설법은 끝났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눈이 휘둥그래진 한 선객이 조주스님을 쫓아가 물었다.
"아까 조주 상좌(上座)께서는 남전선사께 절하고 나가버리셨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조주 상좌는 대답했다. "궁금하거든 남전 선사께 여쭈어봐라." 선객은 남전선사를 찾아갔다. "아까 조주 상좌가 선사께 절을 한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통 알지 못하겠으니 일러 주십시오." 그러자 남전 선사가 말했다. "조주 상좌가 도리어 이 늙은이의 뜻을 잘 알고 있느니라."
마조 대사가 말한 즉심즉불(卽心卽佛)은 즉심시불(卽心是佛). 시심즉불(是心卽佛). 심즉시불(心卽是佛)로서도 표현되는 바, 마음(心)이 곧 부처(佛)라는 뜻이다. 그러면 즉심즉불(卽心卽佛)은 어떤 사상이며, 무엇을 배경으로 해서 이루어진 사고(思考)의 내용이겠는가?
따지고 보면 마음(心)에 의존(依存)하지 않는 존재(存在)란 있을 수가 없으니,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라는 존재가 사실이라 해도 우주를 인식하는 마음에 의지해서만 우주가 인식되며, 아무리 원자(原子), 미립자(微粒者)라라고 불리는 미시(微視)의 세계가 신비하다 하더라도 마음을 떠나서는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 바 유물론 (唯物論)조차도 마음에 의존하고 있는 점에서는 같다. 더구나 우리의 실존(實存)을 고(苦)라고 규정하여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온갖 관심을 집중하는 불교이고 보면, 모든 것을 마음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겨진다.
이런 경향의 극치를 보인 것이 화엄경의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말하는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는 말씀이니, 그 앞부분과 함께 번역하면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心如工畵師)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을 그려내니(能畵諸世間), 온갖 세계 속에서 어떤 사물이건 만들지 않음이 없다. 마음이 그림을 능숙하게 잘 그리는 화와 같이 이러하듯 부처도 화가와 같이 그러하며, 부처님이 그러하듯 중생도 화가와 같이 그러하니, 마음 부처 중생 이 셋 사이에는 어떤 차별 분별도 없이 똑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부처를 불계(佛界)라는 말로 표현하면, 중생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天上)에 이르는 육도(六道)와 성문. 연각. 보살이라는 삼승(三乘)을 포함해서 구계(九界)라 할 것이므로, 불계(佛界)를 더해 십계(十界)는 단지 마음(心)의 표현일 뿐이어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존재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위에서 한 말이 마음을 중심으로 한 인식론(認識論)에 그친다고는 할 수 없으니,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아 하루 빨리 중생의 처지에서 벗어나라는 데에 그 주안점이 놓여 있을 것은 뻔한 일이고, 마조의 즉심즉불(卽心卽佛)도 중생의 처지에서 조속히 벗어나라는 그런 취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취지가 이것만이라면 교가(敎家)의 이론은 될지 몰라도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가(禪家)의 선지(禪旨)는 되지 못하니, 보다 직접적(直接的)이요 근원적(根源的)인 데에 즉심즉불(卽心卽佛)의 본래 뜻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교학(敎學)을 버리고 선문(禪門)에 들어온 것은 가상하다 해도, 부처와 마음과 중생을 분별 구분해서 갈라놓은 다음에 중생의 처지에서 부처를 추구한다면, 교학의 자리에서 여전히 뭉개고 있는 꼴이 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곧바로 부처임을, 바꿔말하면 내가 곧 부처임을 알라는 것이 마조가 말한 즉심즉불(卽心卽佛)의 뜻이었다 할 수 있으니, '알라'고 했다 해도 마음과 부처를 향해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온갖 분별 차별 구별 구분을 초월한 처지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하라는 직시(直示)였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은 할(喝)이나 방(捧)과 동일한 수단 도구 방편일 뿐 언구(言句)는 아니었던 것이매, 이를 사상(思想)으로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데 남전 선사는 '불시심. 불시불. 불시물'이라 했는 바, 불시(不是)는 부정을 나타내고, 물(物)은 화물(化物). 익물(益物), 사물(事物), 인물(人物의 경우같이 중생(衆生, 이 세상 모든 것, 이 세상 모든 존재)을 뜻하므로 불시심(不是心). 불시불(不是佛). 불시물(不是物) 이 말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하여, 마조대사가 말한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선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남전이 불시심(不是心). 불시불(不是佛). 불시물(不是物) 이렇게 말한 본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참 뜻을 다시 검토하는 것에 의해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니, 다음 같은 문답이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참 뜻을 시사해 준다.
한 선객이 마조 대사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째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을 말씀하십니까?" 마조 대사가 대답했다. "어린애가 우는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즉심즉불(卽心卽佛)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린애가 우는 울음을 그쳤을 때는 어떻게 말을 해야합니까."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 말한다.
즉심즉불(卽心卽佛)도 어디까지나 방편(方便)의 말일 뿐, 실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해서 마음인 것도 아니며, 부처라고 말했다 해서 부처인 것도 아니고, 중생이라고 말했다 해서 중생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니, 인식의 주체이기는 해도 인식의 대상은 되지 않음이 마음(心)이기에 마음은 마음이 아니며, 그런 주체로서의 마음을 확인하여 더 이상 구함이 없는 사람이 부처이기에(佛是無求人) 부처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는 말의 참뜻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 데에 있었던 것이니, 마조의 즉심즉불(卽心卽佛)이나 남전의 불시심(不是心). 불시불(不是佛). 불시물(不是物)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이 하나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염화시중의 미소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과 같은 경지였던 것이기네, 어디에 한마디 말인들 끼어들 여지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조주가 남전의 말끝에 절을 하는 것에 의해 조주스님은 자기의 선기(禪機)를 보여준 것이고, 절을 한 뜻을 선객이 묻자 "남전 선사에게 물어보라" 한 것 또한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멸처(心行滅處)의 소식을 보여준 언어가 아닌 언어 었으니, "남전 선사에게 물어보라" 한 말이나 남전 선사에게 절을 한 것을 언어 이전의 자리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선객의 우왕좌왕하는 언행에, 우리 범부의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엿보여 슬프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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