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모르고 하는 말은 허망한 꿈 속에서 헤매는 소리.
서양에서 말하는 시성(詩聖) 단테의 시(詩)중 대표작이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내 소년의 눈에는 사랑이 깃들었네. 그를 보는 사람은 거룩하여라.
그대 나의 비길 바 없는 기쁨이로다. 가까이 있으면 내 머리를 숙이고 까닭 없는 잘못을 뉘우치도다.
그대 가는 곳에 오만과 노여움이 사라진다. 바라노라! 나에게 그대를 받들 슬기로움을...
그대 말을 들으면 내 맘 스스로 가라앉고 내 머리 스스로 숙여지도다.
그 모습 보는 자 영광이 있도다. 그대 웃음 처음 보는 거룩한 기적이여!
말도 미치지 못하고 기억에도 남기지 못하도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인 "말도 미치지 못하고 기억에도 남기지 못하도다." 이 말은 나름대로는 극도의 차원에서 말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완전히 경계를 벗어난 말은 아닙니다. 단테가 이 말을 내놓고 보는 경계는 인생 최고의 진리를 보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 대한 걸 좀 느끼긴 느꼈지만 똑 떨어진 해결이나 결론이 나지 못하고 어느 한 곳(경계)에 빠져 있는 말입니다.
동양의 선지식 스님들이 말씀한 글귀와 위 단테의 시(詩)를 대비하면 천지차이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주로 경계(境界)에서 보고 느낀 그걸 시(詩)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서양 과학자들도 경계를 놓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동양 조사스님들이 말씀한 건 그런 거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어떤 경계에 있는 것을 두고 최고라 하는 건 발 밑에 있는 낮은 차원입니다. 조사스님들이 말씀한 것은 서양 시인이나 과학들 보다 월등하게 높고 뛰어난 차원입니다.
과거 조주스님 같은 조사스님들이 많은 말씀을 했지만, 지구상의 어느 학자들이 그 말을 놓고 논의를 할 수 있겠느냐? 조사들의 의지를 간파할 수 있겠느냐?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걸 모르는 겁니다. 나름대로 깨달음이 있다 하더라도 동양 선지식의 차원에는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바깥 경계를 놓고 연구한다 해도, 결국 가까운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건 큰 생명력(生命力)이 있고 깊이 있는 말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모르고 하는 소리는 모두 허망한 꿈 속에서 헤매면서 하는 소리입니다.
나를 올바로 아는 사람은 말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조주스님 같은 분이 그렇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내가 내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조주스님 차원을 모르고 부처님 차원은 더구나 모릅니다. 내가 내 마음을 항복받아 나라는 존재가 뭔지 확실히 알게 되면 그때는 다릅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마음 쓰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현실에서 하는 행동도 다른 것입니다.
지식이나 학문, 이런 것 가지고는 현실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어요. 지식이나 학문 그건 한 부분적인 면에 있어서 도구, 수단, 방편일 뿐인거지요. 언어나 문자나 지식, 상식 이런 거는 현실적인 생활하는데 잠시 편리하게 쓰는 방편, 수단, 도구이지, 지식이나 학문, 언어나 문자나 상식 그게 완전하게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내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건 남이 해줄 수가 없습니다. 남이 대리로 해줄 수 있으면 좋은데 그게 안 됩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18.09.02 대원스님 소참법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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