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실재(實在)와 존재(存在)

장백산-1 2020. 8. 29. 15:14

실재(實在)와 존재(存在)

 

실재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과력 없다면 우리 인식체계에 어떤 변화도 못 만들어내

모든 상과 개념은 인과력이 없고 따라서 실재하지도 않아

만물은 자성을 결여해 공(空)한 채로 현상 또는 환(幻)으로 존재

 

 

 

                                               허재경 = 그림

 

철학적 창발론과 복잡계이론의 선구는 20세기 초반 영국의 창발론자들이었다. 당시는 기초과학으로 모든 학문을 남김없이 완벽하게 통일할 수 있다는 믿음이 굳건하던 시절이었다. 현상이 복잡해지면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고 뇌의 구조가 복잡해지면 의식이 생겨난다는 창발론자들의 주장은 신비주의에 의존하는 비합리적 견해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20세기말 과학의 통일운동이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하면서 창발론이 새로 주목받게 되었다. 나는 신비주의에 기반한 창발론의 이론적 일관성(integrity)에 회의해 왔고 또 그것이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된다고 보는 지극히 반(反)불교적 입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창발론자들도 설득력 있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과력을 갖는 것이다(To be real is to have causal powers.)”라는 사무엘 알렉산더의 주장이 그 가운데 하나다. “to be real”은 ‘실제로 또는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번역하는데, 서양인들에게 ‘실제로 존재함’이란 ‘자성(自性)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즉 실체(實體)로서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to be real”을 ‘실재(實在)함’ 또는 ‘실재’로 번역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공(空)의 가르침에 밝은 독자라면 ‘자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라는 개념에 저항감을 느끼겠지만, 우리의 철학적 논의를 위해 일단 이 개념을 사용하겠다.

 

“실재한다는 것은 인과력을 갖는다는 것이다”라는 명제의 대우(對偶)는 “인과력을 갖지 못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이다. 이 말은 이치에 잘 맞는다. 인과력이란 세계에 인과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힘을 의미하는데, 실재하려면 이 세상에 물리적, 심리적, 또는 어떤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아무런 인과적 차이를 가져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것이 있을까? 설혹 그런 것이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한 어떤 인식도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인과력도 없다면 우리 인식체계에 어떤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존재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있든지 없든지 이론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을 굳이 거추장스럽게 존재한다고 보아 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용(龍)이나 날개달린 말(페가수스, Pegasus)은 실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로 울고 웃고 또 감명 받지 않는가? 실재하지 않는 것들도 우리 세계에 인과적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지 않은가? -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한 상(相)을 만들어 놓고 그것들에 대해 이런 저런 믿음을 가지며,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든다. 말하자면 용과 페가수스 자체가 아니라 용과 페가수스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의식상태가 세계에 인과적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통찰은 우리가 실재한다고 여기는 모든 상(相)에 적용된다.

 

수학과 과학은 수많은 개념으로, 즉 여러 상(相)들로 이루어  져 있다. 그러나 수(數)와 과학 그 자체는 아무런 인과력이 없다. 종이 위에 쓰여 있는 숫자들이나 물리학 교과서에 나열되어 있는 방정식들이 그 자체로 어떤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신이 수학과 과학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실은 ‘수학과 과학을 신뢰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엄청난 힘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고, 이것은 언어가 가진 힘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지만, 이 경우에도 실제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쓰인 글을 읽은 사람들의 의식과 마음이지 글 자체는 아니다. 모든 상(相) 또는 개념은 인과력이 없고, 따라서 실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상태)는 그 스스로의 인과력이 있어서 실재한다고 보아야 할까? 심리철학은 의식의 실재 가능성에 회의한다. 현대인은 뇌가 기능하지 않는 한 의식이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뇌가 손상되면 우리 의식에 변화가 생기며, 뇌가 그 기능을 멈춘다면 의식 또한 사라진다. 의식이 물질적 기반인 뇌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면서도 독자적인 인과력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묻는다. 만약 우리 세계에서 뇌와 그 기능을 그대로 놔둔 채 의식만을 모두 제거한다면, 이 세계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철학자들은 ‘어떤 작은 변화도 없을 것이다’라고 답한다. 뇌만 그대로 작동한다면 내가 의식이 있든지 없든지 나는 똑같이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식사하고, 걷고, 대화하고, 또 코미디 영화를 보며 웃을 것이다. 의식이 가졌다고 생각되던 인과력은 알고 보면 모두 뇌가 가지고 있다.

 

의식 또는 우리 마음은 그 스스로의 인과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실재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면 의식의 존재적 기반인 뇌와 그 기능은 실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뇌에서 일어나는 인과 작용이 이 세계에 그 많은 변화를 가져오니까 뇌와 그 기능은 실재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to be real(실재한다)’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실재한다’는 것은 ‘자성을 가지고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과력이란 자성을 가진 원인이 자성을 가진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그러나 용수의 ‘근본중송’ 이후 잘 알려져 있듯이, 불교는 자성을 가진 원인과 자성을 가진 결과의 실재를 부정한다.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멸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기에 스스로의 본성 즉 자성도 가질 수 없다. 이렇게 자성과 실재를 결여한다는 의미에서 만물이 공(空)하다. 그래서 뇌와 그 기능도 스스로 인과력을 자성으로 가질 수 없어서 실재하지 않고 공하다. 물리세계의 모든 것이 이와 같이 공하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실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만물은 자성을 결여해 공(空)한 채로 현상 또는 환(幻)으로 존재한다. 물리세계와 그것에 의존한다고 여겨지는 우리 의식세계는, 비록 자성을 가지고 실재하지는 않지만, 현상의 그러그러(如如)한 흐름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만물은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만물이 이렇게 무상(無常)한 이유가 연기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50호 / 2020년 8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