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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네이멍구의 뜻 깊은 성묘

장백산-1 2020. 10. 2. 19:33

[특파원리포트] 中 네이멍구의 뜻 깊은 성묘

 

안양봉 입력 2020.10.02. 15:53

 


잊힌 독립운동가가 있다. 중국 네이멍구(내몽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잠든 고(故) 이자해(李慈海, 1894~1967) 선생이다. 후허하오터는 우리 말로 '푸른색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역만리 중국 땅, 한겨울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네이멍구의 한 기독교 묘지에 잠든 독립운동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자해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추석날 오전에 선생 묘소에…….

 

추석날 오전, 후허하오터 산기슭에 자리한 선생 묘소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단에 음식과 술을 올렸다. 깊은 절을 하고, 도란도란 모여 앉아 차례 음식도 나누었다. 한국의 추석 성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묘소를 찾은 사람들은 중국 네이멍구의 우리 교민들과 이 선생 후손들이다.

 

교민회 회장 김병주 씨는 "항일운동, 독립운동 업적이 큰 선생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건 저희 교민들에게도 큰 위안과 뭔가 시대를 초월하는 공감대, 위로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교민회는 작년엔 교민은 물론 후손과 중국 동포까지 초청해 이자해 선생을 추모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묘소에 찾아와 교민들이 명절도 같이 보내고, 선생님 업적도 기리고…. 또 착한 일, 좋은 일을 하면 다들 이렇게 기억해 주는구나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이 아닐까 합니다."

 

 

1945년 9월 3일, 이자해 선생이 광복을 기념해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故 이자해 선생은 누구인가?

이자해 선생은 보기 드문 의사(醫師)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다. 1894년 평안북도 중강진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한 외과 의사였다. 이 선생의 삶을 바꿔 놓은 건 1919년 3.1운동이다.

 

들불처럼 번진 만세운동은 압록강 변 중강진에도 전해졌다. 선생은 교회 장로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조직했다. 예배가 끝난 일요일 중강진 시내는 만세 소리로 넘쳐났다. 일제 헌병은 총칼로 진압했다.

 

선생은 자서전 <이자해자전,李慈海自傳>에 당시 만세운동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33명이 일제 헌병에 체포됐다고 기록했다. 일제 헌병 보조원으로 일하던 무리가 심지어 자기 스승과 학교 교장까지 무자비하게 구타했다는 기록도 남겨 놓았다.

 

이 일을 계기로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다. 대한독립단 의무부장에 선임됐고, 임시정부에 대한 광복군이 창설되자 사령부 군의처 처장과 사령부 비서도 맡았다. 일본군이 만주 일대 한인들을 학살할 때 맞서 싸우다 다리에 총상을 입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가기를 20여 년, 마침내 광복이 찾아왔다. <이자해자전>을 보면 김구 선생은 해방되자, 인편으로 이자해 선생에게 편지를 보낸다. "나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가 조국 건설을 위해 노력하자"는 친필 서신이었다.

 

 

1945년 광복 뒤 이자해 선생이 중국 네이멍구에 결성한 한인회


"난 사명을 다 했다."

 

그러나 선생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마다했다. 선생의 손녀 리웨이싱(李伟星)은 KBS에 "할아버지는 자신의 일을 항일 독립투쟁을 하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독립을 이루었으니 임무를 완수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더 이상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신 선생은 당시 네이멍구에 흩어져 있던 한인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한인회를 조직했다. 본인은 비록 조국에 돌아가지 않더라도 고향 땅을 애타게 그리는 사람들을 조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렇게 수백 명의 네이멍구 한인들이 선생의 도움으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갔다.

 

이자해 선생의 후손 리웨이싱, 리웨이민, 리웨이잉 씨


그리고 선생은 병원을 열었다. 65세이던 1958년 건강 문제로 더는 수술칼을 잡을 수 없을 때까지 인술(仁術)을 베풀었다. 선생의 장손 리웨이민(李伟民) 씨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일까?

 

"할아버지는 자상하고 사랑이 깊은 분이었어요. 가난한 사람들은 무료로 치료해줬어요. 만약 사랑이 없다면 조국을 사랑하거나 나라를 위해 희생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제가 할아버지 후손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선생은 '네이멍구의 슈바이처'라는 명예를 얻었다. 그리고 1967년 중국 땅에서 영면했다. 하지만 조국은 귀국하지 않은 선생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렇게 선생의 업적은 잊히는 듯했다.

 


영면 40년 만에 수여된 건국 훈장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이자해자전>이 알려지면서 선생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2007년 마침내 선생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영면한 지 40년 되는 해였다.

 

선생의 손녀 리웨이싱(李伟星)은 "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일제 침략을 받았습니다. 항일과 민족을 위해 공헌한 사람을 찾아 기억하는 일은 한국 정부가 제일 잘하는 거 같습니다. 나라를 위해 공헌한 사람을 잊지 않는 거, 저는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한국 정부의 훈장 추서에 후손들의 감정은 남달랐다. 장손 리웨이민(李伟民)씨는 할아버지 건국훈장을 받기 위해 난생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하늘에서 다 보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2007년 한국에 갔을 때 손수건에 한국 흙을 한 줌 떠 와서, 할아버지 묘소에 뿌렸습니다."

 

선생의 자서전 <이자해자전, 李慈海自傳>은 작년 국가 등록 문화재 756호로 지정됐다. 1930~40년대 네이멍구 일대 독립운동을 기록한 사료적 가치 때문이다. 독립기념관에도 선생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석 명절 네이멍구 산기슭에 자리한 조그마한 선생 묘소를 찾아, 아이들에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선생의 업적을 전하는 교민들이 있다.

 

안양봉 기자 (beebee@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