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찾아서!!!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 〈1〉

장백산-1 2020. 10. 17. 11:51

고조선 후예 '훈 제국' 세워..유럽 민족 대이동 '폭풍' 불러

입력 2020.10.17. 00:02 수정 2020.10.17. 00:17

 

 

고조선 서쪽 살던 기마족 '산융'


BC 108년 이후 중앙아 거쳐 유럽에


역공 기마전술로 서로마도 삼켜


우랄~알프스산맥 대제국 일궈


쫓겨난 서고트족, 이베리아 반도로


게르만·색슨족 등 연쇄 이동 일으켜

 


유럽으로 간 고조선 문명 〈1〉


‘고조선 문명’은 한국 문명의 기원일 뿐 아니라, 세계 최초 5대 문명의 하나이다. 고조선 국가가 서기전 108년 해체될 때, 고조선 서변 국경을 지키던 기마민족 일부는 중앙아시아로 이동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다시 그중의 일부는 유럽에 진출하여 새 국가를 건설하고 고조선 언어와 문명을 전파했다. 이번 연재에서 고조선 문명의 후예들이 유럽에 들어가서 수행한 여러 가지 활동 가운데 한국인과 유럽인들이 알아두어야 할 ‘증거가 확실한 몇 가지 큰 일’을 소개하려고 한다. 인류의 편견 없는 소통과 교류, 협동을 위해서다.

 

고조선 문명의 후예인 훈족(Huns, 중국 호칭 흉노족)이 4세기 후반에 유럽에 들어가서 거대한 ‘훈 제국’을 세우고, 유럽 민족 대이동을 일으키며 결국 거대한 서로마 제국을 붕괴시켰다면 아마 대부분 놀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우선 훈족이 고조선 문명의 후예인가부터 물을 것이다. 훈족은 고조선 연방 제국의 서변에 거주하던 ‘산융(山戎)’이라는 유목 기마족인데, 서방을 방위하던 후국족이 그들이었다. ‘융’은 군사집단의 뜻이다. 당시 그들은 자신을 반드시 훈(Hun)이라고 불렀다.

 

고조선 문명, 세계 첫 5대 문명 중 하나

 

로마 제국에 버금가는 제국을 건설했던 훈족의 왕 아틸라(406~453)가 이끄는 기병대. [그림 The Creative Assembly]

 

고조선은 훈 족장에게 ‘두만’(만 명 사령의 뜻)의 직책을 주었다. ‘두만’은 총사령관의 고조선 말이었다. 훈의 두만 성명은 단자(檀柘)였다. 성을 ‘檀’으로 쓴 것은 고조선 왕족 계열의 정체성을 취한 것이다. 훈족 두만의 군대는 기병부대였다. 모두 큰 활과 창을 썼으며, 모든 기병이 말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법(騎射法)의 달인으로서 막강한 군대였다. 두만과 아틸라(Attila)칸을 포함하여 모든 훈족의 종교는, 7세기 아르메니아 사가 모오제에 의하면, 탱그리칸(Tangri-quan)신을 조상신으로 모셨다. 즉 단군(檀君) 신앙이었다. 전쟁 전에는 소의 어깨뼈로 점을 치는 예언 점술사(占術師)의 말을 일단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중국(하·상·주)의 주(周)가 고조선과 친했던 상(商)을 멸망시킨 후인 BC 771년 훈이 주(周)를 공격하여 수도 호경(鎬京)을 점령했다. 주나라는 훈에 패배하여 동쪽으로 천도하는데, 이후부터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되고 조정은 약화되어 군웅이 할거하였다. BC 664년에 고중국 동주의 제(齊) 황공(桓公)이 조(曺)·허(許)·노(魯)·연(燕)·진(晋) 등과 고중국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조선을 공격해서 조·주 전쟁이 일어났다. 산융(훈)·고죽·불령지·불도하가 고조선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중국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훈’이 이 전쟁 때 고조선 연합군의 주력이었는데 훈이 고조선 후국이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후조선 멸망 후 두만의 아들 모돈(冒頓, 모돌)은 BC 3세기에 훈족의 독립을 선언하고 ‘탱그리고도단우(撑犁孤塗單于)’라는 호칭의 황제에 올랐다. 훈족 황제 호칭을 ‘單于(단우)’라 쓰고 중국과 한국에서는 ‘선우’라고 읽는데, 원래는 ‘단우’라는 고조선 · 훈어이다. ‘단=檀=單’이고 ‘하늘’의 뜻이며, ‘우’는 ‘왕·황제’의 뜻이다. ‘단우’는 ‘천왕(天王)’ ‘천제(天帝)’의 뜻이다. 모돈은 자기가 단군조선의 계승자임을 주창한 것이었다.

 

고조선, 훈 족장에게 ‘두만’ 직책 줘

 

고조선 연방제국의 서변에서 고조선을 지키는 역할을 해오던 막강한 유목 기마 민족 ‘산융’은 위만조선 멸망(BC 108) 후 한나라 무제(武帝)가 이끄는 새 기병 부대의 총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몽골고원으로 후퇴하였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BC 57년경에는 왕위 계승문제로 권력투쟁이 일어나서 흉노는 호한야(呼韓邪) 단우의 ‘동흉노’와 질지(郅支) 단우의 ‘서흉노’로 분열되었다. 두 흉노는 전쟁을 하여서흉노가 패배하였다. 동흉노는 중국에서 후한(後漢)이 수립된 후 다시 남북으로 분열되어 북흉노는 AD 72년 후한의 공격을 받고 서방으로 이동하여 몽골고원을 떠났다.

 

남흉노도 ‘한’(漢)족 장군들이 AD 349년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흉노족을 대대적으로 살해하기 시작했으므로 서방으로 이동을 감행하게 되었다.

 

흉노족은 서방으로 이동하여 카스피해 북쪽 볼가강과 카마강이 합류하는 지역의 초원지대에서 상당 기간 정착해 유목생활을 하면서 힘을 배양했다. 흉노족은 한발이 장기화되어 목초지가 메마르게 되자 AD 375년경 볼가강을 건너서 동유럽 판노니아 평원에 살고 있던 게르만족인 동(東)고트(Goths)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고 신민으로 삼았다.

 

훈(흉노)족의 동아시아식 경기병(輕騎兵) 부대, 강력한 활, 질풍노도 같은 기동성,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기습·돌격, 위장 후퇴로 적의 튼튼한 대오를 분산시킨 후 전격적 급반전 역공의 기마전술 등을 유럽민족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연속 패하였다. 훈족은 카르파티아 분지(판노니아 평원)를 정복하여 이곳을 자기의 정착지로 삼고 ‘훈족의 땅’(The Land of Huns, Hungary)이라고 칭하였다. ‘가리(gary)’는 훈족어로 ‘땅’의 뜻이었다. ‘가리’는 현대 몽골어에서도 ‘땅’의 뜻이다. 훈족은 이어서 서고트족을 공격하여 내쫓았다.

 

정착지를 빼앗긴 서고트족은 AD 378년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서로마 영토로 이주해서 자치권을 획득했다가, 410년에 4일간 로마를 약탈하고 이베리아 반도로 이동 정착하였다. 프랑크족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의 북부에, 부르군드족은 갈리아 지방의 남부에 이동 정착하였다.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 북부로 남하 이동하였다. 라인강 유역에 거주하던 반달(Vandal)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통과하여 지금의 아프리카 튀니시아 지방에 정착해서, 455년 로마시를 습격 약탈하기도 하였다.

 

아틸라 외모, 영락없는 동아시아인

 

훈족의 유물. 1 군마의 안면 갑구(4세기). 2 금과 보석으로 된 팔지(5세기). 3 아틸라의 검(4세기). [사진 Walters Art Museum]

 

 

유트족과 색슨족은 바다를 건너 브리타니아섬에 들어가 선주민 켈트족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각각 소왕국을 세웠다. 수에비족은 이베리아 반도를 통과하여 지금의 포르투갈에 수에비 왕국을 세웠다. 훈족의 카르파티아 분지(판노니아 평원) 점령과 정착을 계기로 게르만인을 비롯한 모든 유럽민족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옮겨 다니면서 민족대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민족대이동 중에 각처에서 약탈을 자행했는데, 이것이 마치 훈족이 행한 것처럼 전해졌다. 이 시기 민족대이동이 현재의 유럽 각 민족의 정착이 되었다.

 

훈(Hun, 흉노)족은 그사이에 중부 유럽에 ‘훈 제국’을 세웠는데, 아틸라(Attila)칸 때에는 그 영역이 동쪽은 우랄산맥과 카스피해, 서쪽은 알프스산맥, 북쪽은 발트해, 남쪽으로 다뉴브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아틸라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를 몇 미터 앞에서 본 동로마 역사가 프리스쿠스(Priscus)의 기록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프리스쿠스는 “그는 키가 작고 어깨가 넓었으며, 머리는 매우 컸고, 눈은 작았다. 수염이 성기게 나 있고, 머리털은 흰 머리가 섞여 있었다. 코는 납작하였고, 피부색은 엷은 갈색이었다. 출신 족에 의한 특징이 현저하였다”고 하였다. 즉 아틸라의 외모는, 서양 초상 그림과는 전혀 달리 전형적인 동아시아인이었다.

 

아틸라와 그의 정치를 분석적으로 연구한 엣셰(Katalin Escher)와 레베딘스키(Lebedensky)에 의하면, 아틸라는 언제나 검소하고, 솔직했으며, 매우 겸손하고 관대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황금을 전혀 탐하지 않았으며, 거두어들인 황금을 모두 통치자금에 쓰거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조선 연방을 서쪽 변방에서 지키던 소수의 훈(산융)족이 ‘말’을 동력으로 하여 유럽에 들어가서 AD 4~5세기 서유럽·북유럽·동유럽을 포괄하면서 동 로마제국 ·서 로마제국에 맞서는 거대한 ‘훈 제국’(Hun‘s Empire)을 건설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 ‘훈’과 ‘흉노’

「 ‘훈’족은 동아시아에 있을 때도 자기를 ‘훈’(Hun)족이라고 했다. ‘사람’‘따뜻한 사람’의 뜻이라고 한다. 몽골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고중국에서 다른 민족에게 나쁜 뜻 한자를 붙여 작명하는 악습으로 ‘훈’을 비하하여 ‘흉노’(匈奴)라고 주로 칭했는데, ‘흉측한 노예’라는 뜻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뒤에 ‘흉노’(匈奴)라는 호칭을 썼지만 훈육(葷粥)과 훈육(薰育)으로도 나온다. 『맹자』에는 훈죽(獯鬻)으로 나온다. 여기서 훈(Hun)을 葷, 薰, 獯 등 여러 글자로 표기한 것은 흉노족이 자기를 훈(Hun)으로 호칭한 것을 동일 음차(音借) 표기한 것이고, 粥, 育, 鬻 등은 비하하는 의미를 붙인 꼬리표기이다. 비칭 꼬리표기를 떼어버리면 흉노족이 곧 훈(Hun)족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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