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緣起法)을 거스르는 주장과 증명의 책임
“불성사상(佛性思想) · 본각사상(本覺思想)은 붓다의 가르침과 정면 배치”
불성(佛性) · 본각(本覺), 창조적인 재해석 없으면 연기(緣起)와 공(空)에 어긋나
‘참나(진아/眞我)’도 붓다의 무아(無我)라는 가르침을 거스르는 비불교적 주장
‘깨쳐야만 안다’는 등 방식 논증은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붓다가 깨달은 당시 음미하고 있었다는 이 연기법(緣起法)을 접할 때마다 그 가르침의 깊이에 새롭게 놀라게 된다. 연기법(緣起法)은 대승사상(大乘思想)에 이르러 단순한 인과(因果, causation)를 넘어 관계(關係, relation) 일반으로까지 확대 해석된다. 대다수 불자에게 연기법(緣起法)은 존재계(存在界)를 가장 근본적으로 그리고 가장 포괄적으로 품는 진리(眞理)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붓다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붓다의 깨달음을 가능케 한 연기법(緣起法)으로부터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연기(緣起)란 만물(萬物),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원인(因)과 조건(연/緣)에 의해 생(生). 성(成) · 지속 · 소멸한다는 붓다의 통찰(洞察)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원인(因)과 조건(연/緣)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기(起) 때문에, 아무 것도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實體)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도 못하니 스스로의 독립적인 본성(本性), 즉 자성(自性)을 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 즉 만물(萬物)이 제각각의 독립적인 본성(本性), 즉 자성(自性)을 결여한다는 의미에서 만물(萬物)은 공(空)하다[제법개공(諸法皆空)].
이 세상 모든 것은 스스로의 본성(本性)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지도 못해서 무상(無常)하다[제행무상(諸行無常)]. 수많은 원인(原因)과 조건(연/緣)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만물(萬物), 즉 이 세상 모든 것이 생겨나고 소멸한다는 통찰(洞察)이 연기법(緣起法)인데, 찰나에도 한 사물을 구성하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 가운에 몇몇이라도 이합집산하기 마련이니,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본성(本性/自性)을 가진 나 또는 개인(個人)의 인격체(人格體)가 존재할 리 만무하다[제법무아(諸法無我)]. 연기법(緣起法)이라는 진리(眞理)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그대로 적용되는 이치다.
나는 붓가가 깨달은 연기(緣起),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어떤 주장도 붓다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연기(緣起),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그런 주장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요즈음은 좀 뜸한 것 같지만, 한 동안 유행하던 ‘참나(眞我)’라는 말은 붓다의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인데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오랫동안 인기가 있었던 주제였다.
기본적인 이치를 따져가며 ‘참나(眞我)’라는 이 문제를 한번 파헤쳐 보자. 힌두교의 아뜨만이나 서양종교의 영혼(靈魂과 같은 고정불변(固定不變)의 참나(眞我)가 존재한다면 그 참나(眞我)는 원인과 조건(緣)에 의해 생멸(生滅)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참나(眞我)는 붓다의 연기법(緣起法)이 포착하지 못하는 어떤 굉장한 본성(本性) 자성(自性)을 가진 실체(實體)이다. 만약 그런 실체(實體)의 참나(眞我)가 정말 존재한다면, 만물의 연기(緣起)를 통찰(洞察)함으로써 깨달은 붓다의 깨달음이 완전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붓다의 깨달음인 연기(緣起)는 참나(眞我)를 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나(眞我)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붓다의 제자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붓다보다 오히려 더 위의 진리(眞理)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나(眞我)의 존재는 먼저 그 참나(眞我)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명해야 할 의무(burden of proof)가 있다. 이 세상 모든 것, 만물(萬物)이, 제법(諸法)이 연기(緣起)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소소한 일상(日常)으로부터 소립자(素粒子) 물리학(物理學)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어김없이 또 끊임없이 확인(確認)되고 있지만, 아뜨만이나 영혼(靈魂)과 같은 참나(眞我)는 소위 ‘신앙(信仰)’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어야만 볼 수 있다’거나 ‘오직 깨쳐야만 그 존재를 안다’는 식의 논증은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다. 왜냐하면 영혼(靈魂)이나 참나(眞我)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이 그것을 증명할 의무가 있지, 영혼(靈魂)이나 참나(眞我)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에게 영혼(靈魂)이나 참나(眞我)의 존재를 증명하는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증명의 부담을 질문자에게 부과하는 일은 논리적으로 오류일 뿐만 아니라 예의에도 어긋난다.
유식론(唯識論)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 범아일여(梵我一如) 조차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바라문교와 힌두교의 최고 진리(眞理)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주장이 어떻게 불교의 가르침으로 둔갑했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서양종교에서 말하는 신(神)과 영혼(靈魂)에 비유될 수 있는 범(梵, 브라만)과 아(我, 아뜨만)가 동일(同一)하다는 주장이 범아일여(梵我一如)인데, 처음부터 그런 신(神)과 영혼[(靈魂) 참나(眞我)]의 존재를 부정(否定)하고 불교교단을 성립한 붓다가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말을 들으시면 어찌 생각하실지 부끄럽기만 하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이 주제도 기본 이치부터 따져가며 헤아려보자.
범아일여(梵我一如)라는 주장에 따르면 절대신(絶對神)이나 브라만[그리고 영혼(靈魂)이나 아뜨만(참나/眞我)]는 원인과 조건(緣)에 의해 생성 · 지속 · 소멸하지 않는다. 절대신(絶對神)이나 브라만(그리고 영혼이나 아뜨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연기법(緣起法) 바깥에 있다. 절대신(絶對神)이나 브라만(그리고 영혼이나 아뜨만)은 무시(無始)로부터 불변불멸(不變不滅)하면서 존재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영원히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질문해 보자. 무시(無始) 이래로 불변불멸(不變不滅)하면서 존재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영원히 존재한다고 하는 그같은 존재자(存在者)가 과연 있을까?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소위 ‘믿음(信仰)’ 말고 현대인 대다수가 수긍하는 이치(理致)에 맞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절대신(絶對神)이나 브라만(그리고 영혼이나 아뜨만(참나/眞我)의 존재를 성공적으로 증명한 적이 있었던가? ‘믿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식으로 절대신(絶對神)이나 브라만[(그리고 영혼이나 아뜨만(참나/眞我)] 그 존재의 증명을 질문자에게 부담지우면 안 된다. 증명의 책임은 그런 절대신(絶對神)이나 브라만(그리고 영혼이나 아뜨만)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 있다.
한편 ‘열반경’뿐만 아니라 내가 애독하는 ‘법화경’이나 ‘화엄경’에서도 펼쳐지는 불성(佛性)과 본각(本覺) 사상 또한 바라문교의 아뜨만이론(아론我論)이라는 비판이 있다. 나는 불성(佛性)과 본각(本覺)의 개념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해서 연기(緣起)와 공(空)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불성(佛性) 및 본각(本覺) 사상은 붓다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본다. 그 이유도 기본 이치를 헤아려 보면 알게 된다.
기본 이치를 파헤쳐보면 만물(萬物), 즉 이 세상 모든 것에 내재(內在)한다는 불성(佛性)은 원인과 조건(緣)에 의해 생성 · 지속 · 소멸하지 않고 고정불변(固定不變)하다. 만약에 불성(佛性)이 있다면 그 불성(佛性)은 연기법(緣起法) 바깥에 있다. 그래서 불성(佛性)이라는 그 존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편 불성(佛性)의 존재를 바탕으로 한 본각사상(本覺思想)은 만물(萬物),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기(緣起)하지 않고 변치 않는 ‘본래 깨달음(本覺)’이라는 자성(自性)이 있다는 말이어서 공(空)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공적영지(空寂靈知)에서도 ‘공적(空寂)’까지는 좋으나 ‘영지(靈知)’의 존재는 결국 어떤 고정불변(固定不變)의 굉장한 자성(自性)이 있다는 뜻이어서 받아들이기가 곤란하다. 유구한 선문(禪門)의 전통이 상당 부분 불성(佛性) 및 본각사상(本覺思想)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불성(佛性) 및 본각사상(本覺思想)의 주장에 대한 재해석이 시급하다.
불성(佛性)과 본각(本覺)의 존재를 의심하며 명상을 통한 깨침의 가능성에 의심하는 질문자에게 흔히 하는 말들이 있다. ‘불성(佛性)은 깨친 자만이 불성(佛性)의 존재를 안다’ ‘바닷물의 짠 맛을 글로는 표현할 수 없고 직접 마셔봐야 안다’ ‘일 주일만 참선해 보라, 그러면 불성(佛性)을 안다’ ‘알음알이로는 불성(佛性)을 깨칠 수 없으니 잔말 말고 참선하라’ 등등··· 우리가 귀가 따갑게 들어오던 이 모든 말은 결국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증명의 부담을 질문자에게 떠넘기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71호 / 2021년 1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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