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물(無情物, 생각이 없는 것들)이 하는 설법(법문)
이 세상 모든 것들은 항상 법(法)을 설(說)하고 있다.
바위나 물이나 바람이나 나무나 해나 달이나 별도 설법을 한다.
선사(禪師)들은 무정물(無情物)이 하는 설법(說法)을 듣고 깨달았다.
성철 스님도 무정물(無情物)이 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강조했다.
깨닫는 것은 분별 망상 번뇌를 내려놓을 때 가능하다.
아무나 법(法)을 설할 수는 없다. 법(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도(道), 진리(眞理)를 깨쳤든지, 아니면 도(道), 진리(眞理)를 깨친 것에 상응하는 교학이나 정진력을 갖춘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런데 대승(大乘)에서는 생각이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생각이 없는 것같은 축생(畜生)과 무정물(無情物)까지도 설법(說法)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에 설법을 안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이라도 아무나 할 수 없는 설법(법문)을 개나, 돼지나, 새나, 나무나, 돌맹이나, 생명이 없는 것 같은 것들이 다 설법을 한다니 선뜻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축생들이야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니까 설법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소리를 못 내는 바위나 돌맹이나 나무도 설법을 한다는 말은 상식 밖의 일로 들리기 십상이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과학, 철학, 종교, 문학에서도 찾기 어려운 이야기가 불교에는 많다. ‘화엄’의 사상에 무정설법(無情說法)의 묘한 이치가 들어 있고, 선가(禪家)에 들어서면 무정설법(無情說法)의 가치는 더욱 강렬하게 빛을 발한다. 한 스님이 혜충국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과거 부처의 마음입니까?” 국사가 말했다. “담장을 구성하는 기왓장과 돌맹이다.” “담장을 꾸리고 있는 기왓장과 자갈은 무정(無情)이 아닙니까?” “그렇다 무정물(無情物)이다.” “기왓장이나 돌맹이는 무정물(無情物)인데도 설법(說法)을 할 수 있습니까?” “무정물(無情物)도 영원히 항상 설법을 하고 있다. 무정물(無情物)도 불처럼 활활 타오르듯 설법을 하며 그침이 없다.” 혜충국사의 이같은 대답 이것이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시초이다. 후에 동산양개 화상도 운암담성 선사로부터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이치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문인 소동파가 쓴 폭포소리가 하는 설법도 꽤나 유명하다. 소동파가 황주에 머물 때 흥룡사의 상총 선사를 찾아가 법을 물었다. 상총 선사가 소동파에게 물었다. “대관은 어느 스님을 찾았소?” “예, 여러 고을을 전전하였기에 많은 스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대관은 어찌 무정설법(無情說法)은 듣지 못하고 스님들이 하는 유정설법(有情說法)만 들으려하시오?”
소동파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상총 선사에게 묻지 않았다. 낙담한 소동파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동파의 마음은 오로지 '무정설법(無情說法)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화두에 머물러 있었다. 무엇이 무정설법(無情說法)이고 어떻게 해야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소동파는 나귀 등에 올라타고 나귀가 알아서 가는대로 나귀에게 길을 가는 것을 맡겼는데 어느 계곡을 지나가다가 폭포수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려 폭포의 물은 장대했고 폭포소리는 웅장했다. 순간 소동파의 마음에 번갯불과 같은 섬광(閃光)이 일었다. 무정(無情)이 하는 설법(說法)을 듣게 된 것이다. 소동파는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계곡의 폭포소리가 부처님 말씀인데(게성변시장광성/溪聲便是廣長說)/ 산의 빛깔이 어찌 청정한 부처님 모습이 아니겠느냐(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밤새 들었던 폭포소리의 팔만사천 게송의 법문을(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다른 날 남들에게 어찌 전할 수 있겠는가?(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소동파가 노래한 무정설법(無情說法)에 관한 이 게송은 소동파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전해지며 선가의 공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근래에 무정설법(無情說法)을 강조한 분은 성철 선사이다. 진정한 불자라면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부처님(佛, 깨달은 자)뿐만 아니라 유정(有情)이고 무정(無情)이고 가릴 것 없이 이 세상 모든 것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항상 설법(說法)을 하고 있다. 심지어 저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法堂)에 모셔진 부처님 불상보다 몇 백배 이상의 설법을 항상 하고 있다. 무정물(無情物)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생명(生命)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說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똑바로 알려면 돌, 바위, 흙덩이가 항상 설법(說法)하고 있는 내용을 들어야 한다. 그뿐 아니다. 모양(형상)도 없는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허공(虛空)도 항상 설법(說法)을 하고 있는 것을 들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온 세상에 설법(說法)을 안 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안 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다.” 성철 스님이 하신 이 말씀을 듣고 보면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문도 무정설법(無情說法)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성철 스님과 같은 시대 선지식(善知識)인 송광사 구산 스님의 일화도 흥미롭다. 어느 날 일본에서 한국에 온 일본 고승이 송광사를 찾았는데 대웅전 앞에 세워진 돌사자 앞을 함께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구산 스님이 일본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방금 저 돌사자가 설법(說法)을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들으셨는지요?” 일본 스님은 구산 스님의 돌연한 질문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했다. 무정(無情)이 설법(說法)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인간(人間)도 자연(自然) 속에 사는 자연(自然) 의 일부(一部)다. 자연(自然) 은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다. 늘 자연(自然) 그 자체가 진실이며 평온이다. 인간들의 마음이 자연(自然)을 역행(逆行)할 뿐이다. 갖가지 분별, 망상, 번뇌를 쉬면 무정물(無情物)이 설하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572호 / 2021년 2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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