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인데 윤회(輪廻)하는 주체(主體)가 있나요?
(질문) 불교에서는 생명이 있는 것은 죽으면 업보(業報)에 따라 윤회(輪廻)한다고 합니다.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아(無我)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윤회(輪廻)를 하는 주체(主體)는 무엇인가요?
(대답) 무아(無我)와 윤회(輪廻)에 대한 논란은 불교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온 질문이지만, 사실 무아(無我)와 윤회(輪廻) 이 둘은 전혀 모순되는 주장이 아니고 논란거리도 아닙니다. 먼저 '대장엄경론'에 나오는 내용을 보지요. “과거세에 분별 망상 번뇌(煩惱)로 말미암아 여러 업(業)을 지은 까닭에, 그 여러 업(業)에서 현재의 몸(肉身)이 생겨났으며, 현재에 또다시 여러 업(業)을 짓는다면 다음 생에 다시 그같은 업(業)에 해당하는 몸(肉身)을 받게 된다. 모든 조건(條件)이 결합되어 씨(種)에서 싹이 트는 것과 같다. 씨에서 싹이 트기 위해서는 싹이 트는 것을 돕는 조건(條件)이 필요하고 씨에서 튼 싹이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씨는 썩어서 없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씨와 싹의 관계에 있어서, 씨가 썩어 없어지는 점에서 볼 때에는 지속함이 없다고 해야 하지만, 싹이 트는 점에서 볼 때에는 씨와 싹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아(無我)이지만 업보(業報)를 받아 윤회(輪廻)하는 것 또한 바로 씨와 싹의 관계와 같다."
무아(無我)라면 아무것도 없어야 할 텐데 윤회(輪廻)를 하는 주체(主體)가 있지 않은가, 윤회(輪廻)를 하는 주체(主體)가 ‘아(我)’가 아닌가 하고 묻지만, 윤회(輪廻)의 주체(主體) 또한 공(空)하고 텅~빈 무아(無我)일 뿐입니다. 유식(唯識)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방편상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이름 붙여 놓았는데, 그 아뢰야식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한 부분일 뿐이지 실체적인 자아는 아닙니다. 아뢰야식은 그야말로 업(業)들이 모여 있는 업장(業藏, 업의 저장고)이요, 장식(藏識)인데, 아뢰야식 또한 찰나도 쉬지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모습입니다. 아뢰야식은 그 어떤 실체가 있어서 업장(業藏, 업의 저장고)이 아니라 그냥 방편으로 이름하여 업장(業藏), 아뢰야식이라는 방편상 임시로 이름 붙여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업(業)은 말(口業), 생각(意業)과 행동(身業) 3가지 입니다. 말과 생각과 행동도 언제든 변하는 것이고 그러니 그 '3가지 업(業)의 저장고'인 아뢰야식도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이번 생에는 사람의 몸을 받았던 것이 다음 생에는 축생의 몸으로도 태어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한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육도윤회를 한다는 말은 업(業)이 변한다는 증거입니다. 씨에서 싹이 트면 씨는 썩어서 사라지듯, 마찬가지로 나도 다음 생으로 윤회(輪廻)를 하면 전생(前生)의 ‘나’는 소멸합니다. 그러나 현생의 나의 뿌리는 여전히 전생의 나였기에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나와의 사이는 단절되었다고도 할 수 없고 지속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나는 다만 끊임없는 변화만 있을 뿐,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서의 윤회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는 없습니다. 무아(無我)입니다. 무아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라 하지만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아(無我)'의 성질, '공(空)'의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윤회(輪廻)하지만 무아(無我) 입니다. 그러니 무아(無我)와 윤회(輪廻)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습니까? 윤회(輪廻)와 무아(無我)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습니다. 아주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이지요.
2014.05.17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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