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외롭게 사는 즐거움

장백산-1 2021. 3. 10. 11:50

외롭게 사는 즐거움


외로움의 의미를 생각해 보시는지요. 외롭다는 것은 내가 나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나와 조금 더 가까워 진다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은 고개를 치켜들고 내게 찾아와 혼자있음의 고요를 방해합니다.

외로움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찾아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외로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외로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혼자 있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외로움이라는 느낌이 없다면 사람들은 아주 쉽게 혼자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아마 보다 많은 수행자들이 깨우침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외로움이라는 느낌이 올라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그러다 보니 자꾸 밖으로만 무언가를 찾아나섭니다.

사람들은 혼자 있게되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TV를 켜든가, 비디오를 보던가, 사람들 많은 곳을 방황하던가, 아련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그런 노력들 때문에 오랜만에 맑게 텅 비워지려던 내면은 다시금 물들고 여러가지 일들로 꽉 채워지게 됩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외로움을 온전히 느껴보고 외로움과 하나가 될 때, 사람들은 조금씩 내면의 본래의 나와 마주할 수 있습니다. 가볍고 변덕스런 마음이 늘상 밖으로 치닫는 사람은 내면이 헛헛하지만, 혼자 있음을 즐기는 수행자는 내면에 맑은 향기가 충만합니다. 혼자 있어도 당당하고 초연합니다.

무언가를 함께 할 때의 당당함, 많이 가지고 있을 때의 행복함,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마는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홀로 있을 때도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있어 외로움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것이 내 영혼을 맑게 정화해 줄 것입니다. 외로움 속에서 혼자 있음! 그 속에서 사람들은 가장 순수(純粹)해 질 수 있습니다. 혼자있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내면은 조금씩 내면의 본래의 나 에게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으려 하지 말고 법(진리)을 믿어라. 사람은 변함이 있지만 법(진리)은 변함이 없다.

믿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으면 그 사람에게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파계 하면 그 사람에게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면 그 사람에게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세상을 하직하면 의지처를 잃게 된다. 법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으면 그와 같은 허물이 생긴다. [잡아함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불법을 믿을 것이지 스님을 믿지 말고,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변하는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이 변할 때마다 내 마음도 함께 흔들리게 됩니다. 중심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오직 법(진리)을 믿고 부처(佛)를 믿으면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금강과도 같은 굳은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사람에 있지 않고 법(法)과 부처님(佛)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파계를 하고, 원효스님이 속세로 돌아가고, 법정스님이 대사찰을 소유하고, 원성스님이 결혼을 하고, 법상스님이 큰 죄를 지었더라도 내 마음의 중심(中心)은 조금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스님들이 타락하고, 절이 청정함을 잃더라도 내 마음공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자성부처님(自性佛)을 등불로 삼고, 법(法, 진리)을 등불로 삼을 일이지 사람을 등불로 삼아선 안 될 일입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해야 할 일이지 승등명(僧燈明)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우둔한 범부들이 느끼는 감정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 감정적으로 더 예민할 수도 있다. 다만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움을 만나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괴로움에 부딪쳐도 괴로움 때문에 공연히 근심을 더하지 않아 괴로움과 즐거움의 감정에 구속받지 않고 괴롭고 즐거운 감정을 다 버릴 줄 알아 감정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울 뿐이다. [잡아함경]

지혜로운 수행자라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감정이 없다거나 늘 여여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경계를 만나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똑같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중생은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기에 그 감정에 마음이 머물러 휘둘리지만, 지혜로운 수행자는 감정이 즉한 순간 관하여 깨어있기에 그 감정에 마음이 머무르지 않으며 그 감정을 곧바로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경계에 닥쳐 욱! 하고 올라오는 마음은 같지만, 그 마음에 머무느냐 빨리 놓아버리느냐는 다른 것입니다. 곧바로 올라오는 느낌 감정 마음을 관하면 그것들을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빨리 놓아버리면 느낌 감정 마음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절에 오면 자기들에게 좋은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나쁜 일들은 부처님께서 다 거두어 주시고 늘 즐거운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부처님 앞에서 당당해 져야 합니다. 떳떳해 져야 합니다. '내가 지은 것 모두 내가 받겠습니다.'하는 마음이 진실된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다 받아들이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일체의 모든 경계는 어느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일체의 모든 경계는 다 이유가 있기에, 원인이 있기에 내 앞에 펼쳐져 나온 것입니다. 내 마음이 짓지 않은 것은 절대 내 앞에 펼쳐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안과 바깥의 일체 모든 경계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수행심입니다. 불교 교리의 핵심을 연기법(緣起法), 인과법(因果法)이라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연기법 인과법을 '공(空)'이라 말합니다. 큰스님네들은 연기와 공을 실천키 위해 '마음을 비워라' '놓아라' 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야 연기, 공을 실천할 수 있고 어찌 해야 마음을 비울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진정 비우는 것인가요? 비운다는 것, 공을 실천한다는 것, 연기를 실천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내 앞에 펼쳐진 일체 모든 경계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함을 뜻합 니다.

업(業)을 지을 때는 선업도 악업도 모두 닥치는대로 지어놓고 업에 대한 보(報)를 받을 때는 좋은 것만 받겠다고 하니 중생심(衆生心) 분별심(分別心)이라는 것이 얼마나 교활합니까. 괴로움은 받기 싫은데 지어 놓았으니 지은대로 자꾸 나오게 되고 그걸 받지 않으려고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에 당당해 지세요.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모두 받아 들이세요. 나는 수행했으니 나는 기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괴로움이 나를 비켜갈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진정한 수행자라면 괴로움, 즐거움 다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히 싸워 몽땅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기도 많이 하고, 수행 많이 한다고 해서 괴로움이 그 사람을 비켜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같은 수행심으로 괴로움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괴로움 없는 이가 아니라 괴로움에 얽매이지 않는 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괴로움이라는 과보(果報)가 내게 왔을 때 그 괴로움이라는 과보를 싫다고 비켜가면 그만인 듯 하지만 도리어 더 큰 과보가 되어 언젠가 내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우주법계의 이치입니다. 그렇기에 내게 찾아오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경계를 다 녹여 내셔야 합니다. 내 내면에서 다 녹여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리켜 용광로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그 경계를 나의 참생명 주인공 속에 몰록 놓고 나면 다 녹아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까짓거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 어떤 경계가 두려움을 몰고 온다 해도, 묵묵히 관찰하고, 다 놓고, 다 비우고, 다 받아들이세요. 나의 참생명 주인공은 무엇이든 다 녹일 수 있는 부처(佛)입니다. 

2009.05.15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