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평상시의 마음(心)이 도(道)다.

장백산-1 2021. 3. 30. 15:54

평상시의 마음(心)이 도(道)다.

회양(懷讓)은 마조 도일(道一)의 그릇을 보시고는 물었다. “대덕은 좌선(坐禪)하여 무엇이 되려고 하시오?”

도일이 말했다. “부처(佛)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회양은 벽돌 하나를 가져와 마조 도일 옆에서 갈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도일이 회양에게 물었다. “벽돌을 갈아 무엇을 만들려 하십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鏡)을 만들려 하오.” “벽돌을 간다고 벽돌이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그대가 좌선(坐禪)을 한다고 어찌 부처(佛)가 되겠소?” 이에 도일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가 끄는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할까요? 아니면 소를 때려야 할까요?” 도일이 대답이 없자, 회양이 말했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려고 하십니까? 좌불(坐佛)을 배우려고 하십니까? 만약 좌선(坐禪)을 배우려고 한다면, 선(禪)은 앉는 것도 아니고 드러눕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좌불(坐佛)을 배우려자 한다면, 부처(佛)는 정해진 모습이 아닙니다. 머뭄이 없는 법에서는 취하고 버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대가 좌불(坐佛)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佛)를 죽이는 것입니다. 만약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내가 말한 이같은 이치(理致)에 통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도를 더럽히지만 말라. 분별심으로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이 도를 더럽히는 것이다. 도를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이 도다. 평상심은 조작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것이다. 도는 또한 단멸하거나 항상 하는 것도 아니고, 범부와 성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전에서는 이를 두고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것이 바로 보살의 행이다’라고 했다.

 모든 것 전부(全部), 일체(一切)가 마음(心)이다. 이 세상 온갖 것이 전부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니 마음(心)이 만물(萬物)의 근본(根本)이다. 마음(心), 즉 진리(眞理)를 떠나서는 서있을 곳이 없다. 서있는 곳이 바로 진리고, 모든 것이 자신의 본바탕이다. 모든 것이 전부 불법이고 해탈이다.

그대들 각자의 마음이 부처임을 믿으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죄의 자성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느 순간에도 죄는 없으니, 자성이란 본래 없기 때문이다. 삼계는 오직 마음일 뿐이며, 삼라만상은 이 마음의 흔적(그림자)일 뿐이다. 선(善)에 머물고 악(惡)을 제거하며, 공(空)을 관(觀)하고 선정(禪定)에 드는 것은 모두 마음이 조작(造作)하는 것이다. 마음이 부처인데 마음 바깥으로 달려나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와는 더욱 멀어질 뿐이다.

[마조어록]

 
✔ 도불용수 단막오염(道不用修 但莫汚染),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다만 도를 더럽히지만 말라’는 말씀은 초기 조사선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를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는 좌선(坐禪)을 열심히 하고 앉아 있는 마조도일(馬祖道一)에게 벽돌을 가는 비유와 소가 끄는 수레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소가 끄는 수레가 가지않고 멈춰서으면 소를 때려야지 수레가 굴러가지 수레를 때려서는 수레가 굴러가지 않는다. 런마음을 닦고자 하는 사람이 앉아 있는 몸의 모양을 통해 마음을 깨닫고자 한다면 그것은 수레를 때리는 것과 같다.

이 공부는 마음공부이지 몸의 공부가 아니다. 마음공부는 애써 좌선(坐禪)만을 고집할 것도 없고, 염불이나 진언이나, 특정한 수행 방법만을 고집할 이유도 없다. 마음공부는 마음으로 하는 공부이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방법, 앉는 방식, 수행방법, 그런 수단과 방법으로 하는 공부가 아니다.

부처(佛)는 정해진 모습이 없으니 특정한 정해진 모습을 오래 취한다고 해서 부처(佛)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참된 이치를 모르고 오로지 앉아서 좌선(坐禪)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부처(佛)를 죽이는 것이다. 회양의 가르침 덕분에 마조 도일은 깨달음을 성취하고, 10년 동안 회양선사를 모시면서 마조 도일의 깨달음은 더욱 깊어 갔다.

이후 마조 도일은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다만 더럽히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더럽힌다는 것은 곧 분별심(分別心) 으로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조작과 추구가 끝나지 않는 이상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그 모든 조작과 추구가 완전히 쉬어질 때 문득 도는 드러난다.

도는 거창하고, 위대하고, 신비로운 어떤 곳에 있지 않다. 평상심(平常心)이 그대로 도(道)다. 조작하지 않는 지금 이대로의 마음,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무분별의 상태의 마음, 취하고 버리지 않는 할 일 없는 무위의 상태의 마음이다. 평상심, 도, 깨달음 그 자리는 항상 하는 것도 아니고 끊어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범부와 성인이 따로 나뉘지도 않는 참된 불이법(不二法)의 자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다. 범부와 성인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참된 보살이 아니다.

이것과 저것 중 어느 하나 속에만 마음, 본성, 불이법,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모든 것, 우주만물이 똑같은 하나의 마음이다. 마음이 곧 만물의 근원이다. 마음, 부처, 깨달음, 진리 아닌 곳은 이 세상어디에도 없다. 진리를 찾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진리가 아닌 곳에는 단 한 순간도 발을 내디딜 수조차 없다.

지금 이 순간 서 있는 바로 여기 이 자리가 곧 바른 진리요 자신의 본바탕이다. 모든 것이 전부 똑같이 불이법으로써 둘이 아닌 불법이고 해탈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는 어느 것 하나 소외되고 차별되는 것이 없다. 일체의 모든 것이 그대로 불법(佛法), 진리, 깨달음, 도, 본바탕, 불이법, 마음이다.

2017.07.14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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