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듣는 질문 몇가지
<질문>
부처님꼐 귀의한지 얼마 안되는 초보자입니다만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여러 스님들의 말씀을 들으면 "아 정말 그런거구나....모두가 내 마음이네.. 어쩌면 이럴수가....." 하는 기쁨의 탄성이 나오곤 한답니다. 저는 원래 기독교를 꽤 오래 믿었었는데 인연이 닿았는지 이렇게 부처님께 귀의하게 되는군요..
예수님도 성인이시고 부처님도 성인이시잖아요. 그런데 그냥 제 마음인가요? 어쩐지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대고 싶고 모든 걸 다 알아서 해주실 것 같은 느낌이구요, 부처님을 생각하면 왠지 내가 다 알아서 해야될 것 같은 느낌요..(질문이 넘 유치한가요?^^)
그리고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공양을 잘못 드시고 병이 나셔서 열반에 드신 걸로 아는데요 물론 그 공양이 안 좋은 것이란 걸 아시고 드셨겠죠? 육신의 병 또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거잖아요..부처님의 육신의 병을 어떻게 생각해야죠?
음 그리고 요새 젊음사람들을 보면(제 주위 친구들만 봐도) 대부분이 기독교를 믿는 것 같아요. 특히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더 심해지는 것 같구요. 좀 생각해봤는데 젊은사람들 입장에서 봤을때 왠지 기독교는 서구적이고 과학적이고 그런 긍정적 이미지로 비치는 것 같구요,
반면에 불교는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부정적 이미지로 보는 것 같더라구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죠. 부처님의 그렇게 좋은 법인데 말입니다.... 아난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은 불교계에서도 내용면은 잘모르겠고 형식면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현대 젊은이들에게도 어필할수 있는 변화가 있었음하는데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아난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질문한 내용들을 읽으면서 그렇구나 맞아 그런 궁금증들이 있을거야 하고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질문은 조금도 유치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질문을 못 하는 이유는 질문 속에 자칫 어리석은 '나'를 드러낼까 하는 두려움 때문인 경우가 많답니다. 그렇기에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용기'이며 아상(我相)을 녹이는 공부이기도 합니다.
이제 곧장 답변 드리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부처님에 대해 예수님은 내 요청을 다 들어주실 것 같고 부처님은 내가 다 해야할 것 같다는 말씀에 대한 답변부터합니다. 물론 부처님께 귀의함은 내가 다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다 한다는 그 말 속에는 내 안에 예수님도 계시고 부처님도 계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모든 해답이 다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도 실은 내 안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부처님을 밖에서 찾고 그 분들께 의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믿음에 힘이 붙질 않아요. 밖으로 향하는 믿음이란 뿌리가 튼튼하고 확실하지 못한 나무와도 같습니다.
'내 안이라는 말'을 불교에서는 '참나', '주인공', '불성', '한마음', '법신', '본래마음', '진면목', '본래면목', '본성' '마음자리', '대아', 부처(佛) 등의 방편상의 명칭으로 표현하는데 까짓 무어라 어떤 명칭으로 불러도 좋지만, '내 안'이라는 그 내면(內面)의 본성(本性)이란 일체(一切)와 둘이 아닌 ,즉 신, 사람, 동물, 식물, 하찮은 미물, 광물, 바람, 태양, 달, 별, 바위, 흙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닌 '한마음' 자리입니다. 일체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닌 '한마음' 자리 그 곳에서 거둬들여지고 펼쳐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자님도 부처님도 그 뿌리는 동일합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 믿음들을 모두 놓아버리고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나' 말고 누구를 믿을 수 있겠어요. 내 밖에 있는 그 무엇이 나를 지켜줄 수 있겠어요. 증명되지 않는 존재를 어찌 믿는다는 말입니까. 내 안에 생생히 살아있는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라는 존재, 이렇게 스스로 증명되는 나 스스로를 믿어야 바른 믿음입니다. 예수, 공자, 알라신, 부처, 모두가 이름일 뿐입니다. 누구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항 것입니다.
내면의 나, 주인공은 무량광 무량수 무한생명을 지닌 존재로 쉽게 말해 하나님, 하느님, 부처님, 관세음보살 하듯이 무량한 절대의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하느님, 부처님, 관세음보살은 내 밖에 존재하면서 나에게 힘을 주는 존재라 믿지만, 내면에 주인공은 동일한 절대 무한생명이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 상한 음식을 드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그 맛있는 공양을 혼자서만 드셨습니다. 본래 승가의 공양물은 차별이 없기에 부처님과 모든 스님들께서 함께 드셨어야 하지만 아무 말 않으시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혼자 공양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구토를 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상한 음식임을 미리 알고 계셨지만 공양 올린 시주자의 마음을 공양 받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육신(肉身)이 있는 한 깨닫는다고 해서, 즉 성불(成佛) 한다고 해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깨달은 자, 즉 성불(成佛)하면 슈퍼맨이 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부처님이 되고 깨닫게 된다는 것은 그런 외양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절대로 인과(因果)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과(因果에 얽매이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구토와 몸의 병은 그저 하나의 인과(因果에 따른 병이라는 현상일 뿐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병고'의 괴로움인 것은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몸은 잠시 왔다 가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렇기에 몸에 조금 무리가 올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상한 음식의 공양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몸이란 허망하지만 복력과 수행력은 꾸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신의 몸을 조금 힘겹게 하면서라도 시주자의 마음, 공양하는 그 자비스런 마음을 그대로 받으심으로써 시주자에게 큰 복을 짓게 하신 것입니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너와 내가 하나라는 동체대비의 자비심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면 신식같고 과학적, 합리적인 듯 하지만, 절에 다니면 구시대적인 듯 하고, 미신같고, 비과학적이라는 느낌... 조금 달리 생각해 봅시다. 지금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교회나 절에 대한 느낌이 지금 우리의 느낌과는 정 반대로 다가온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믿으면 왠지 예로부터 모두가 그래왔으니 구시대적인 듯 느껴지지만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왠지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된다고 합니다. 무언가 내면 세계가 꽉 차고 합리적이며 명쾌한 이성과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본다고 합니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 대부분 사회의 지도층이나 엘리트 계층의 대부분입니다. 그렇기에 실제 종교 인구 분포에 비해 불교가 그렇게 큰 영향력과 새로운 정신세계의 대안역할을 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에서 미래학자들의 논문을 보면 미래의 정신세계의 대안으로 이구동성으로 '동양철학' 그 중에서도 '불교'를 꼽고 있습니다.
서양의 미래학자들 중에는 목사나 신부가 다수 계십니다. 그런 분들도 논문에서 마찬가지로 미래의 정신세계의 대안으로 '불교'를 꼽고 있습니다. 심정적으로는 기독교, 천주교이지만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으로 논문을 쓰다보니 어쩔 수 없이 '불교'를 꼽을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불교가 과학적으로 보이느냐 기독교가 과학적으로 보이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가 시대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리잡았느냐에 따라 그 종교가 과학적으로 보이느냐 아니냐의 판단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科學)이 무엇인가요? 물질 세계에 대한 원인(原因)과 결과(結果)를 철저히 분석하여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을 발견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물질세계에 대한 인과법칙은 어느정도 밝혔다고 치더라도 정신세계(精神世界)에 대한 부분은 밝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정신이 개입되 버리면 과학에서는 혼돈이 일어납니다. 반쪽짜리 과학인 것이지요.
온전한 과학이란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에 두루 통용되는 진리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인 것입니다. 정신과학, 그리고 물질과학 그 두 세계의 바탕이 되는 것이 불교인 것입니다. 서양의 유일신 사상은 신과 인간을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기에 현대과학의 바탕을 제공하였습니다. 인간과 자연은 별개의 존재이니 인간이 신을 위해 희생하는 것 처럼 자연은 인간을 위해 희생되어도 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을 마구 훼손하여 집도 짓고, 온갖 문명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과학' '산업' '도시화' '기계화'라는 합리적인 명분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인간과 자연은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온갖 기상이변 현상을 통해 자연이 인간에게 응보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 만큼 자연 또한 인간을 지배하며 인간의 목숨을 앗아갈 것입니다. 인과응보는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 하찮은 미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모든 것, 일체(一切)는 둘이 아닌 '하나' '한마음' '한생명'이라 합니다. 세계의 환경학자들, 미래학자들이 세계는 하나를 자연과 인간은 하나를 외쳐대고 있습니다. 실제로 불교에서는 불교를 '참과학'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길들여져 왔던 관념(觀念)의 늪에 노예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종교가 더 과학적으로 보이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떤 종교가 더 과학적이며 진리에 가까운 것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과학을 공부하는 과학도들이 불교를 접하고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가 그렇게 고생해서 수백년 수천년 동안 발견해 낸 것을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젊은 청년은 그저 깨침 속에서 2,500여년 전에 확연하게 깨달았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보았을 때, 그동안 사람들은 밖에서 행복(幸福)을 찾고자 애써 왔지만, 그래서 자연을 이용하고 온갖 과학을 발전시켜 왔지만 이제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앞으로는 불교의 가르침 진리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게 될 것입니다. 애쓰지 않더라도 인류가 더 잘 압니다. 결국엔 그렇게 다시 '내면(內面)'으로 돌리게 될 것입니다. 밖으로 치달아 보니 아무리 쌓고 쌓아도 도저히 행복(幸福)은 요원해 보임을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내면(內面)'에서 행복(幸福)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법우님...너무 번잡해진 답변이었습니다. 마음공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 공부를 해 보시면 질문하신 모든 의문이 확연히 풀려질 것입니다. 마음공부해 보면 너무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데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법우님의 수행에 밝은 응원을 보냅니다.
글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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