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는 말의 진실한 뜻은?
유명한 어떤 목사님께서 불교를 믿는 나라는 다 가난하다. 스님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해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데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도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일 것 같고, 이번 장경동 목사님 뿐 아니라, 종종 타종교인들도 불교를 믿는 나라는 다 가난하다고 폄하하는데 쓰이는 논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논리에는 커다란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이같은 논리가 성립하려면, 지금 돈 많은 부자 나라들, 그리고 개발과 발전으로 경제적 부국이 된 나라들은 다 '잘 산다' '잘 살고 있다' '아주 잘 해 오고 있다'란 말이 되는데요. 과연 부자 나라들, 소위 선진국들이 그렇게 다 잘 사는 나라일까요? 잘 산다는 말의 진실한 뜻이 무엇입니까? 잘 산다는 것은 행복(幸福)하게 산다는 것이고, 지혜롭게 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잘 산다는 것을 단순하게 부자로 산다고 생각한다면 위에서 말씀하신 논리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잘 사는 것이 단순하게 '돈' 많은 경제적 부유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실제 가장 가난한 나라, 혹은 원시적으로 사는 원주민이나 인디언들의 행복지수(幸福指數)가 부유한 선진국 사람들의 행복지수보다 훨씬 높다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부자 나라들, 강대국이 만들어 놓은 개발과 발전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개발과 발전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고, 편리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 행복과 편리함의 달콤함 이면에는 엄청난 전 세계적인 환경오염과 파괴, 기상이변, 기후위기 등 수많은 환경 위기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환경 위기는 가히 재앙적이라고 할만 하며, 어떤 보고서에는 어쩌면 지구(地球)의 생명(生命)이 끝날 날이 몇 십년, 몇 백년도 안 남았을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인들이 누리고 있는 경제발전이라는 것도 그만큼 그 이면에 파괴와 종말적인 어리석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경제발전은 지속가능한 편리함, 지속가능한 행복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경제논리, 과학기술과 산업화라는 논리는 산과 나무와 숲등 지구의 모든 구성 요소들을 파괴시켜 그것들을 인간이 편리한대로 조합하는 기술일 뿐입니다. 그러니 개발과 발전이 심해질 수록 환경파괴는 더해질 뿐더러, 훗날 더이상 파괴할 지구가 남아 있지 않을 때는 그 때는 개발도 발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일 뿐입니다.
이를테면 석유, 석탄 문제만 보더라도 우리가 생활 속에서 쓰는 것에 석유, 석탄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어요? 플라스틱, 자동차, 각종 연료에서부터 시작해서 가히 석유, 석탄의 세기라고 할 만 합니다. 그런데 이 석유와 석탄도 언젠가는 소멸해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개발과 발전이라는 환상(幻想)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너도 나도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기를 쓰고 있습니다.
중국과 인도의 30억 가까운 인구가 한국 처럼 앞으로 20년 쯤 후에 너도 나도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구의 모든 기름은 금새 바닥이 날 것이고, 기름말고 다른 연료로 가는 자동차를 만들게 됨으로써 지구의 다른 자원까지 파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래서 작금의 세기는 가히 '환경' 문제처럼 중요한 이슈가 없는 시대입니다. 환경문제의 원인(原因)이 과연
무엇일까요?
생태학이나 환경학계에서는 환경문제의 원인(原因)을 산업화, 도시화, 과학기술의 발전, 인구증가, 인간의 탐욕, 성장위주의 가치관 등으로 보고 있는데, 그런 원인들의 사상적인 배경을 '유대-기독교적(성서적) 자연관'과 '근대 기계론적 자연관' 두 가지에서 찾는 것이 거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다시말해, 성서적인 자연관은 하느님과 인간을 수직적으로 둘로 나누고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는 철저한 이원론적 자연관이라는 것입니다.
'린 화이트' 라는 학자가 사이언스지에 <환경적 위기의 역사적 근원>이란 논문을 실으면서부터 기독교적 성서적 자연관이 현대 환경문제를 촉발시킨 원인(原因)이라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린 화이트'의 논문에 따르면, 기독교적 성서적 자연관에서는 인간은 자연과는 달리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 졌기에, 인간이 자연보다는 우월하다는 우월감을 낳았고, 나아가 인간은 신으로부터 신의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니다.
특히 창세기 1장 28절에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다스려라'에서 보이듯이 기독교는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목적에 따라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환경오염이 주로 서양 문명의 산물이고, 서양문명이란 것이 곧 기독교 문명이라고 보여지는 점, 또 기독교가 융성한 지역일수록 과학 기술문명이 발달하고 산업화가 진전되어 환경파괴의 문제는 더욱 심각한 곳이었다는 점 등을 보더라도 '린 화이트'의 이런 진단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 이런 설은 보편적인 이론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즘 기독교계에서는 성서를 다른 쪽에서 해석하는, 즉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또 환경파괴의 원인(原因)이 된 기독교적-성서적 자연관을 극복하려고 하는 새로운 신학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생태신학입니다. 생태신학에서는 불교적인 자연관, 즉 인간과 자연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그리고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서로 인연(因緣)따라 맺어졌기에,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에 따라 이루어 졌다는 연기적(緣起的)이고 자비적(慈悲的)인 불교의 자연관에 근접하게 다가서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계 내에서도 한 편으로는 기독교적 자연관 때문에 이 세상이 이렇게 발달했고 좋아졌다고 하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기독교적 자연관으로 인한 발전과 개발 때문에 이제 세상의 종말(終末)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지요.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 진실일까요, 아니면 그로 인해 환경파괴가 일어나고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는 환경적 재앙들, 이를테면 각종의 기상이변과 환경호르몬 문제, 환경병 문제들, 토양오염, 사막화, 황사, 수질오염, 물부족 문제, 산성비문제, 지구온난화, 기후위기, 오존층 파괴, 에너지 오염, 대기오염, 생물다양성 감소, 열대우림 파괴 등 말로 다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의 환경적인 재앙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진실일까요.
이미 환경문제 관련 서적으로는 고전이 된 책,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라는 책을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 책에 보면 티벳의 라다크라는 곳은 불교적인 삶을 사는 곳으로, 처음에는 가난하고 자원도 없고 개발과 발전이라는 것이 전혀 들어오지 않은 오지 중의 오지였습니다. 개발과 발전이 없었던 때는 사람들이 모두 너무도 행복했고, 평화로왔으며, 지혜로왔고, 마음은 늘 풍요로왔습니다.
그러나 그 불교의 땅, 오지의 땅, 원시적인 곳 라다크에 개발과 발전의 바람이 불고, 과학기술과 산업화의 물결이 들어오면서부터 그 곳은 더이상 행복이 넘치는 곳도, 평화로웠던 곳도,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도 아니고, 오직 괴로운 사람들, 못 사는 사람들이 서양 문물과 발달된 사회와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척박하고 고통스런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책에서 보면 불교적인 자연관, 또 소박하고 가난한 삶이사람들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얼마나 진리와 맞닿아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서양적인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얼마나 사람의 정신을 황폐화시켜 놓았는지, 얼마나 지구라는 땅을 오염시키고 파괴시켜 놓았는지 그 결과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인도나 네팔, 티벳 같은 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스스로를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여긴 것은 기독교적인 문명, 서양적인 문명이 그 나라들을 무자비하게 파고들면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기독교적 서양 문명이 못 사는 나라를 잘 살도록 해 주겠다고 했지만 불행하게도 결국 더 큰 괴로움만 안겨 준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선진국이란 나라들이 후진국에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후진국의 자연을 개발과 발전이란 이름으로 파괴시키고, 후진국의 온갖 자원들을 도둑질해 감으로 선진국은 더욱 부유해지고, 후진국은 더욱 가난해 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진국에서 환경오염으로 인해 나온 온갖 폐기물들을 후진국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 넘기고 있는 실상입니다. 미국같은 나라도 어때요? 미국의 부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끊임없이 전쟁을 도모하거나, 후진국, 못 사는 나라에서 자원을 뺏어 오거나, 이라크 같은 나라에서 기름을 뺏어 오거나 그러는 것으로 부유함을 유지하지 않습니까?
기독교를 숭상하는 나라들은 오로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온 자연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고 하셨지요?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누리며 산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파괴시키고, 오염시켜 놓음으로서 결국 인간의 정신(精神)까지도 황폐화시켜 놓은 것이지요. 사람들의 가치관이 기독교 원론적인 인간중심주의나 자연을 함부로 쓰겠다는 생각등을 버리지 않는 이상, 앞으로 세계적인 기상이변, 기후위기, 환경오염으로 인한 위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생태학자, 환경 전문가들은 불교적인 자연관, 연기와 자비의 생태학, 시스템 이론, 가이아 이론 등 불교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불교적인 가난하고 환경친화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면 지구의 미래는 그 누구도 보장해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경제학자인 E. F. 슈마허는 하나뿐인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작고 적은 것, 소박한 것에서 만족할 수 있고, 인간에 대한 폭력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폭력까지도 행사하지 않는 비폭력적인 불교적인 경제학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개발과 발전의 꿈을 접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구에서 사는 사람들은 큰 빙하에 곧 부딪혀 배(지구)가 파손될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배 안에서의 달콤한 것들에 빠져 배를 구할 생각은 못 하고 있다는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가치관(價値觀)이 더 지혜로운 가치관입니까? 자연과 인간이 둘로 나뉘지 않으며, 자연의 생명이, 동식물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과 동등(同等)하게 존귀하다는 가르침인가요? 아니면 인간을 우월하게 놓고 자연이나 동식물은 인간을 위해 마땅히 희생되어도 좋다는 가르침인가요? 그래서 인간의 식욕을 위해 화학비료, 제초재, 농약에 버무려진 하우스 식물들을 먹거나, 철창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며 항생제, 성장촉진제, 호르몬제 등을 잔뜩 투여받아가면서 30년 이상을 살 생명을 단 한 달 만에 죽인 닭을 후라이드치킨으로 먹는 등의, 그러고도 전혀 생명에 대한 자비심 하나 없이 인간의 식욕만을 챙기는 그런 생명관, 자연관이 옳은 것입니까?
기독교적 자연관은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이 상하관계를 맺는 수직적(垂直的)인 자연관인데 반해, 불교적인 자연관은 부처와 인간과 동식물, 자연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존재 모든 생명을 평등(平等)하게 보는 수평적(水平的)인 자연관입니다. 언뜻 보면 불교적 자연관은 시대에 뒤떨어진 듯 느껴집니다. 그러나 가난과 청빈과 비폭력과 생명존중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서로 연결(連結)되어 있기 때문에 내 생명이 소중한 만큼 자연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그런 불교적 가치관이야말로 지금 한없는 위기로 치닫는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생명관이요 자연관이 아닐까요.
물론 이상에서와 같은 답변이 불교와 기독교를 나누고 그 가운데 불교를 우위에 두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태신학에서 말하듯이, 기독교 사상, 성서의 가르침을 문자그대로 파악하기 보다는 지혜로운 시선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성서 속에서도 아름답고 지혜로운 말씀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던 비교는 갇혀있거나 보수적인 기독교라고나 할까요, 옛날의 문자주의적인 닫혀 있는 기독교의 시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들 가운데는 그러한 기독교적인 이원론적이고, 자연 위에 인간을 두는 그런 것은 참된 성서의 이해가 아니라고 보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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