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부정(否定)의 방법

장백산-1 2021. 10. 31. 23:21

부정(否定)의 방법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원리는 긍정(肯定)의 방법이 아니라 ‘부정(否定)의 방법’이다

‘부정’은 논리적 사유 위한 도구(방편)… 부정에 실재성 부과하면 오류 빠져
중도(中道)는 양극단을 부정, 무아는 자아 존재를 부정, 연기는 자성을 부정해
가(假)· 환(幻) · 현상(現象)으로 존재하는 만물이 이 세계에 현란히 펼쳐지는 것

사람에 대해 사용하는 ‘부정적(否定的)’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안 좋은 의미로 쓰인다.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임하며 살지 않으면서 일이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비판적’이라는 말과 다르다. 어떤 사안을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져본다는 뜻에 가깝다. 요즘같이 만사를 긍정적으로만 보다가는 바보 되기 쉬운 세상에서 더욱 필요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부정(negation)’ 또는 ‘부정적(negative)’이라는 말은 자비심이 깃든 언어를 써야 할 불자가 사람에 대해 적용하기를 원치 않을 표현이다. 그렇지만 이 듣기 불편한 단어에서 좋고 나쁘다는 가치판단을 제거하고 그 개념(槪念)을 논리적으로만 이해해보면, 부정(否定)의 방법(the way of negation)은 사실 여러 종교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도구다.

바라문교는 우주의 존재적 근원 및 원리가 너무도 위대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특정 색깔을 가진다면 그 색깔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위대함이 제한되므로 그것은 색깔이 없어야 한다. 모양도 가져서는 안 된다. 가계족보도 없고 또 시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남겨진 그 어떤 무엇을 바라문교는 ‘브라만’이라고 불렀다. ‘브라만’은 어떤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무한히 위대한 것을 지칭하기 위해 편리하게 선택된 ‘소리’로 받아들여야 옳다.

서양의 자연신학도 기본적으로 바라문교와 같은 부정의 논리를 이용해 서양인들이 숭배하는 신을 이해했다. 바라문교와 자연신학은 모두 부정의 방법을 통해 가리켜진 무엇인가의 실재(實在)와 무한한 속성을 인정한다. 위대한 무엇인가가 존재하는데, 그것의 무한한 속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도 부정의 방법을 이용하며 세계와 우리 삶에 관한 가르침을 펴 왔다. 그런데 불교는 이렇게 도달한 진리(眞理)가 보여주는 것의 실재(實在)나 자성(自性)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점이 불교와 다른 종교와 철학을 구분해 주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다. 

서양철학사의 칸트(18세기 독일)와 비트겐슈타인(20세기 영국)은 부정(negation)의 개념에 해당되는 대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이 세상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부정 그 자체를 찾아낼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부정(否定)이라는 개념(槪念)이 사람들이 세계에 대한 경험을 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적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부정(否定)이라는 개념(槪念)은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또는’ ‘만약’과 같이 우리가 인식내용을 구성하는 데 사용하는 장치의 하나이다. 그래서 ‘부정’이라는 논리적 도구에 실재성(實在性)을 부과한다면 심각한 철학적 오류가 된다.

영어의 ‘nothing’ ‘none’ ‘nobody’와 같이 부정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는 동아시아 언어로 번역이 잘 안 되고, 또 그러다보니 우리로서는 영어의 이런 개념에 대한 이해도 어렵다. 예를 들어, 영어권 사람은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Nothing can come out of nothing’이라는 문장을 살펴보자. 이것은 서양고대 희랍철학 시기부터 받아들여져 온 명제인데, 한국어로 번역하기는 까다롭다. 한국의 서양 고대철학 전공자가 영어로 된 책 한 권을 다 번역해 놓고도 이 문장을 번역하지 못해 곤란해 한 적도 있다. 당시 미국에서 대학원생이던 내게까지 이 문장이 전해져 내가 ‘아무 것도 무(無)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고 번역해 준 기억이 있다. 외국어로 공부하기는 역시 어렵다.

언어체계가 다르다보니 부정의 개념이 들어가 있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인도유럽어 계통의 산스크리트어인 ‘nirvana’에는 ‘(번뇌의) 불길이 꺼짐’이라는 부정의 개념이 들어가 있는데, 동아시아 언어로는 직역이 잘 안 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음차(音借)로 ‘열반(涅槃)’이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부정의 개념은 어떤 긍정적인 것의 존재를 함축하지 않는다. ‘열반’에는 어떤 굉장한 쾌감이나 신비한 경험 또는 초능력의 획득 같은 내용이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공(空, emptiness)’ 또한 ‘자성이 없음’이라는 부정적 개념이다. 공은 단지 자성이 없다는 말인데, 공이 마치 어떤 신비한 속성을 가지고 실재하는 무엇이라고 오해하면 참 곤란하겠다.

주지하듯이, 붓다의 중도(中道)는 수행에 있어서의 쾌락주의와 금욕주의 양극단을 모두 부정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중관(中觀)의 중도는 사물이 고정불변의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는 상주론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의 두 극단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붓다의 무아(無我) 또한 불변불멸의 자아(self)의 존재를 부정한다. ‘연기(緣起)’도 만물이 조건(條件)에 의해서만 생성·지속·소멸하기 때문에 만물의 아무 것도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부정의 개념이다.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니 스스로의 속성, 즉 자성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연기는 자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불교가 부정의 방법을 사용하고 또 그 방법을 통해 가리켜진 것의 실재와 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교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교는 단지 수행(修行)에 있어서의 양극단과 존재론의 양극단을, 그리고 고정불변한 자성의 실재를 부정할 뿐이다. 

열반, 공, 중도, 무아, 그리고 연기의 가르침은 모두 근본적으로 부정의 개념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열반에 이르러 번뇌의 불길이 꺼져 있어도 우리는 예전처럼 일상을 살 수 있다. 번뇌가 없어 좋기만 할 뿐이다. 만물이 공해 자성이 없어도, 그것들은 가(假), 환(幻), 또는 현상(現象)으로 묘하게 잘 존재한다. 수행법과 존재론에서는 양극단을 부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중도의 길이 있다. 불변불멸의 자아는 없어도 우리는 오온의 모임으로서 한 평생 그럭저럭 잘 살아간다. 그리고 만물이 끊임없이 연기하는 덕분에 이 세계는 온갖 현란한 현상들이 신나게 펼쳐지는 곳이다. 불교는 결코 단멸론이 아니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606호 / 2021년 10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