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경계)는 고정된 실체로 실재하지 않아…그 저 심층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일뿐
감각되는 이 세상 모든 것과 삼매까지도 오로지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환상
업력의 씨앗이 제8식인 아뢰야식에 보존돼 있다가 인연 만나면 현행
견성(見性)은 본래 마음을 자각하는 것…남의 마음과 나의 마음은 한마음
불자를 포함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유식론(唯識論)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오직 유식일뿐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합니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오직 식(識,마음, 생각)이 있을 뿐이고 바깥의 경계, 즉 대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사람들은 눈앞에 실재하는 대상, 즉 물리세계가 있는데 이 물리세계가 어떻게 가상의 세계(virtual reality)인가 라고 의문을 가집니다.
실재하는 이 세계가 가짜의 세계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matrix)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가 경험하는 세계는 입력된 정보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假想現實, virtuall reality)입니다. 그러나 주인공 네오는 이 세상이 실재하는 세계인 줄 알며 적응해 살아갑니다. 또 다른 영화는 2010년에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입니다. 인셉션에서 드림머신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은 드림머신을 타고 누군가의 꿈 속으로 들어갑니다. 누군가의 그 꿈속 세계도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꿈입니다.
물론 매트릭스의 세계나 인셉션 꿈의 세계에서 살면서 이런 세계가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려면 매트릭스의 가상세계나 꿈의 세계를 벗어나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가상세계나 꿈의 세계에서 깨어나고자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큰 깨달음이라는 의미의 ‘대각(大覺)’이라 말합니다. 수행으로서 깨달음을 얻어 꿈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길입니다.
수행 없이 의식차원에서 생각으로 엮어낸 이론체계가 희론(戱論)입니다. 유식(唯識)은 머릿속에서 사유해 개념적으로 만든 희론이 아닙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인도에는 요가수행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유식학파는 바로 요가를 수행하는 요가수행자들이었습니다. 통찰력으로 유식을 체험했는데 후에 이론가들, 또는 논설가들이 이론화, 개념화, 체계화한 것이 유식사상(唯識思想)입니다.
‘해심밀경’의 분별유가품에서 유식(唯識)의 개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씨보살은 부처님께 삼매수행에서 본 영상(影像)이 마음과 다른지 같은지를 묻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다르지 않다. 오직 식(識)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상은 곧 식(識)의 변현(變現)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자씨보살이 중생이 색 등 마음의 영상을 반연(攀緣)하면 그 영상도 마음과 다르지 않은지 다시 묻습니다. 부처님은 “그것 또한 식(識)일 뿐, 다르지 않다. 다만 어리석은 범부가 전도되어서 모든 영상이 오직 식일 뿐이라는 유식임을 알지 못하고 전도된 견해를 일으킨다”고 답해주십니다. 결국 삼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감각하는 영상들도 마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이나 지옥, 물리세계도 우리들 마음이 만든 영상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실재라 여기는데 이것은 마치 꿈을 실재라 여기는 것처럼 전도된 망상입니다.
물리세계를 불교에서는 색(色)이라고 합니다. ‘안’ ‘이’ ‘비’ ‘설’ ‘신’ 오근과 ‘색’ ‘성’ ‘향’ ‘미’ ‘촉’ 오경이 색(色)에 포함됩니다. 유식(唯識)에서 오근은 몸의 감각기관에 해당하고 이런 오근을 가진 몸을 유근신(有根身)이라고 합니다. 유근신이 의지해서 사는 물리세계를 기세간(器世間)이라고 합니다. 유식에서는 유근신과 기세간을 식이 만든다고 합니다. 느낌과 세상 전체 즉 일체를 식이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럼 어떤 식이 일체를 만드는가. 일체(一切)를 만드는 식(識)은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意識)이 아니라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입니다.
제1식부터 제5식은 안이비설신 전오식(前五識)입니다. 제6식은 앞의 다섯 식을 종합해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의식입니다. 제6식의 식는 평소 의식이라고하는 개념입니다. 제7식은 말나식이라고 합니다. 제1식부터 제7식은 표층식입니다. 그러나 제8식 아뢰야식은 심층식입니다. 아뢰야는 ‘함장’ 또는 ‘포함’의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종자함장식’ ‘일체종자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종자(種子)는 무엇일까요. 불교는 업보사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선인락과 악인고과’, 업이 있으면 보가 있습니다. 종자는 바로 업(業)이 남기는 업력(業力), 정보(情報)입니다.
이 업력의 종자는 언젠가 보(報)가 될 씨앗입니다. 그러나 종자가 보존되어야 보로 피어날 수 있습니다. 아뢰야식이 존자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보관소입니다. 업력의 종자가 아뢰야식 안에서 자라나면서 더욱 힘을 키웁니다. 그리고 적절한 인연을 만났을 때 구체화 돼 세계를 만듭니다. 현행화 되는 겁니다. 이 현행화를 종자생현행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성된 세계가 바로 유근신이 의거해서 사는 기세간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곤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예시로 중생의 몸은 전생에 지은 업의 보로서 만들어집니다. 악업을 많이 지으면 지옥세계에 태어나고 선업을 많이 지으면 락과를 받아 천상세계에 태어납니다.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둘 다 적절히 지으면 인간의 몸을 받아 인간세계에 태어납니다. 그러니까 육신, 유근신은 종자가 물리세계에 드러난 겁니다.
진화론에서도 이에 대한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보가 축적돼 새로운 근을 가진 종이 생겨나는 방식으로 진화가 이루어지는 거죠. 반대로 경험의 정보가 쌓이지 않으면 근이 퇴화할 수도 있습니다. 어두운 동굴에서 사는 박쥐는 색을 볼 일이 없어 안근의 경험이 쌓이지 않습니다. 박쥐들의 눈은 자연스레 퇴화해서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와인의 맛을 보고 감별하는 소믈리에, 듣고 감상하는 수준이 판소리 명창의 경지에 이른 귀명창 등 경험에 의해 정보가 쌓였기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뢰야식의 존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우리가 깜깜한 암실에 있을 때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도 없으면 안 듣는다고 합니다. 대상이 없으면 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음을 알려면 봐야 합니다. 소리도 있는지 없는지 일단 들어봐야 합니다. 이것을 보고 마음의 활동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활동이 있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의식되는 대상이 없어도 이미 깨어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의 본래적 각성, 본각(本覺)이라고 합니다. 심층식인 아뢰야식은 성성히 깨어있는 마음, 본각, 불성, 대승불교에서는 일심, 선에서 본래면목이라고 하는 방편의 말인 겁니다.
일체는 물리세계고 이 물리세계를 만드는 것이 제8식 아뢰야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물리세계를 만드는 이 심층의 마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나의 본성을 깨달아 볼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 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견성(見性)입니다.
견성을 달성하는 법 세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수심결’에 나오는 무심법입니다. 무심법은 대상을 좇아가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다음은 지눌 국사가 말한 성적등지문이 있습니다. 일상의 의식은 대상을 좇습니다. 성적등지문은 성성(惺惺)함과 적적(寂寂)함을 함께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적적은 무심법처럼 대상을 치운다는 뜻입니다. 그럼 대상을 좇는 마음이 없어지고 표층식에 대상이 없으니까 잠이 듭니다. 잠이 든 상태를 혼침(昏沈)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때 깨어있는 것이 성성(惺惺)입니다.
세 번째는 간화선입니다. ‘이뭣고’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 등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의심이 걸리면 궁금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의심을 유지하면 의정이 되고 시간이 더 지나면 오직 의심만이 몸에 남아 의단이 된다고 합니다. 굉장히 답답하겠죠. 이때 만나는 답답함의 벽이 은산철벽이고 은산철벽이 터지면 화두가 타파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저는 사유의 틀 바깥에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수심결’에서 제자가 지눌 국사에게 “본심이 무엇인지 설명을 들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본심은 어떤 마음입니까”하니 지눌 국사가 “지금 묻고 있는 그 마음이 바로 그 마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닌 뭔가가 있는데 정확히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그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마음이다. 계속 모른다고 생각하면 넘어서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만 궁금해하는 마음, 알고자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문득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돈오입니다.
견성은 본래 마음, 심층 마음의 자각입니다. 그리고 ‘나의 심층마음과 너의 심층마음이 다르지 않다’, 이것을 알아차리면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알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부처라는 사실을 알 테니 말입니다.
정리=윤태훈 기자 yth92@beopbo.com
이 강의는 한자경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가 10월19일 대한불교진흥원이 서울 마포 다보빌딩 3층 다보원에서 개최한 화요열린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606호 / 2021년 10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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